* 2022년 1월 디페스타에 발간한 회지입니다.

* <우리는 서로의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어>에서 이어집니다.

 

 

 

 

 

시작은 이렇다.

 

티 한 점 없는 말간 구름이 높고 푸른 하늘에 둥실 피어오르고 쨍쨍한 태양이 지구의 모든 생명 위에 따사로운 볕을 내리쬐는 어느 목요일의 이른 오후, 나루미야 메이는 미유키 카즈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은 양지바른 들녘의 풀꽃처럼 찾아왔다. 다가올 싱그러운 생명의 계절을 고대하며 아무 걱정 없이 이파리를 활짝 피운. 대지의 온기는 양분이었고 보드라운 서풍의 물기는 은총이었다. 메이는 눈을 감았다. 마음을 가득 채운 건 수많은 소리. 들이쉬는 숨결에는 무르익은 흙내. 신발코에 휘감기는 잡초부터 시작한 진동이 전신으로 번져 몸을 감싸는 공기의 입자로 단숨에 퍼졌다.

 

세상이 찬란하고 가슴은 두근거렸다. 대기는 소리가 되고 소리는 색이 되어 수백 가지의 그림을 허공에 그렸다. 얼룩진 글러브의 가죽이 손안에서 우그러지며 눈앞의 모든 빛이 하얀 점으로 쏠렸다.

 

그날이 첫 발현이었다.

 

 

 

 

 

재와 돌로 만든 도시

 

 

 

 

 

“링을 끼워?”

 

파일을 넘겨보던 행정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네.”

“왜 굳이? 그게 좋대?”

“그런가 보지.”

 

심드렁한 태도로 답한 옆의 동료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 낱장을 건네 가장 위쪽에 붙은 증명사진을 가리켰다.

 

“가이드가 없는 건 아냐. 여기.”

 

사진 속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이 있었다.

 

“뭐야. 심지어 전담이잖아.”

“응.”

“붙어서 관리해주겠다는 사람이 있는데도 링을 끼운다고? 미친놈 아냐?”

“제정신이겠냐. 게다가 거기 등급 보면 알겠지만,”

“실례합니다.”

 

둘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매끈한 종이 표면에 찍힌 얼굴이 실물이 되어 문간에 서 있다.

 

경악스럽게도 교복 차림으로.

 

“안녕하세요.”

“아. 저기, 그,”

“미유키 카즈야입니다.”

“어. 그래……요. 여기 앉아서 기다려요.”

“메이는 아직 안 왔어요?”

“누구요?”

“메이요. 거기 그놈. 방금 말씀하시던 미친놈.”

 

소년의 단정한 입꼬리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유키가 처음 관리국에 간 건 열 살 때였다.

 

학교에서 매년 의무로 받아야 하는 판정 이후였을 테니 아마 5월 즈음이었을 거다. 테스트 결과에 관해 설명하던 선생님 뒤편의 창유리 너머로 참나무 잎사귀가 푸르게 우거졌던 걸 기억한다. 선생님은 말하는 중간중간 헛기침을 했었다. 당시 어린 마음으로는 감기라도 걸리셨던 걸까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곤란함 때문이었던 듯했다.

 

「보호자 동행이 의무는 아니지만, 가능하면 누군가와 같이 가도록 해.」

 

그렇게 말한 선생님은 친절하게도 아버지가 바쁘시면 자기가 함께 가겠노라 제안하셨다. 미유키는 정중히 고개를 저었다. 으레 그러는 것이 예의라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다. 장장 일곱 시간을 잡혀있었으니까. 각종 검사, 시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답변을 전부 마치고 마지막으로 상담실에 안내되었다. 그때서야 미유키는 이 야단법석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미유키는 가이드였다.

 

그날 보았던 모든 광경을 아직 기억한다. 건물은 높고 넓었고 한결같이 소독약 냄새가 났다. 티끌 없는 격자무늬 복도는 완벽히 들어맞는 정사각형의 타일로 덮여 있었고 붉은색과 흰색 띠로 둘린 난간은 미유키의 키보다 훨씬 높아 까치발을 딛어도 닿지 않았다. 방도 굉장히 많았다. 좌우로 난 문들은 하나같이 꼭 닫혀 있어서, 미유키는 어쩌면 이 문 안에 괴물이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실없는 생각을 했었다. 우습게도 현실과 그다지 동떨어지지 않은 상상이었다. 그들이 괴물보다 더 두려워하는 존재들을 넣어두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다음 테스트 때 봐요, 미유키 씨.」

 

끝나고 정문까지 자신을 데려다주었던 연구원이 했던 인사였다. 야구 글러브의 낡은 가죽 냄새를 두 뺨에 배고 나타난 열 살의 소년은, 그날부터 「미유키 씨」가 되었다.

 

 

 

 

 

복도 끝에서부터 잰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미유키는 읽던 노트를 닫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네가 여기 왜 있어.”

 

만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하마터면 인상부터 쓸 뻔했다. 겉으로나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수년간 메이를 견뎌온 덕분이다.

 

“위원회 브리핑. 너도 가는 길이지?”

 

답은 없으나 시선이 날카롭다. 미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둘러맸다. 허름한 스포츠백의 끈을 잡은 손등 위로 미세한 바늘이 콕콕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내 미팅이 너랑 무슨 상관인데.”

“말을 꼭 그렇게 해야 되겠냐.”

“사실이잖아.”

 

삐딱하게 선 자세, 시비조의 말투였으나 스웨터 밑으로 받쳐 입은 셔츠의—미유키처럼 메이도 교복을 입고 있었다—옷깃만은 반듯하다. 그게 너무나도 메이다워, 미유키는 대놓고 으르렁대는 그에게 뭐라 하는 대신 뒤편의 행정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가봐도 되죠?”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필요한 서류는 준비해왔느냐, 간단한 확인 후 가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미유키는 적대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들을 노려보는 메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접수창을 등지고 나와 문이 닫히기 직전, 틈새로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저거. 특수능력 보유자는 다 저래?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한 팔 가득 들었던 서류가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잠시만, 말하고 쪼그려 앉았다. 주변에 널브러진 종이를 한 장, 한 장 줍는 동안 대화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정상 맞아? 저 정도면 격리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야?

–글쎄. 묻는 말에 대답은 하니까.

–정신 감응 제대로 되고 있는 거냐고. 그게 아니면 가이드 옆에서 저렇게까지 사람 기분 나쁘게 할 이유가 뭔데.

–실패했대.

–뭐?

–각인. 실패했대.

 

 

 

 

 

학기가 끝날 무렵, 메이가 관리국에 들어갔다.

 

그전부터 심심찮게 이야기가 돌긴 했다. 3학년의 마지막 시즌이 가까워지면서 더욱더 그러했는데, 문제의 경기 이후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링을 깨 먹으면서까지 마운드에 서는 투수를 눈감아 줄 팀은 없다. 그래도 이렇게 미련없이 놔줄 줄 몰랐지. 그런 말을 지나가듯 했더니 쿠라모치에게서 답지 않게 차가운 반응이 돌아왔었다. 그러면 뭐, 절대 안 된다고 감쌀 줄 알았냐? 그것도 웃기잖아.

 

사실이었다. 이 세상엔 고등학교 야구부가 해줄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다. 하물며 관리국 소관인데 오죽할까. 다만 이대로 두면 타 학생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해 서두른 듯한데, 그것만은 동의할 수 없었다. 메이는 미유키를 포함해 타인을 위험에 빠뜨린 적이 한번도 없다. 발현한 지 얼마 안 되어 가장 불안정했을 중학교 시절에도, 짜증은 냈을지언정 그 무시무시하다는 능력을 쓰는 건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미유키가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었다. 관리국에서 자신은 어느새 메이의 증상을 숨긴 공범이 되어 있었다. 능력자에 관한 정보를 감추는 건 중죄에 해당한다. 그런데 불안정한 사춘기 소년의 가이딩을, 역시나 제대로 훈련도 거치지 않은 동갑내기가 몇 년간 해주었다. 그것도 관리국과 담당의의 눈을 피해 쉬쉬하면서.

 

이나시로와 세이도는 물론이요, 서도쿄 고교 야구 전체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치기였다 우기는 것이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중간 어딘가에서부턴 목숨을 걸고 친구를 위해 희생한 눈물 나는 우정이라는 사족까지 붙었다. 웃기지도 않았다. 이게 먹혀 들어갔다는 게 더 기가 찼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상부에서 지침이 내려오기까지 몇 주간 피 말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최후통첩일 거로 예상했던 내용은 의외로 담백했다. 우선 계속 학교생활을 이을 것. 이제껏 해왔던 대로 기숙사에서 지내며 학업을 끝내는 데에 집중할 것. 부 활동은 금지. 정식 경기 출전은 물론 연습 시합도 금지. 그리고 특별한 금전적, 제도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둘 다 관리국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릴 것.

 

어쩌다 미유키까지 딸려가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아니, 사실은 잘 알았다. 메이를 제어할 수 있는 게 저뿐이라 오해한 모양이지—협상 여지가 없는 결정에 항의할 길은 없었다. 결국 둘 다 꼼짝없이 관리국에 끌려가 입소 절차를 밟아야 할 운명이었다. 아직 미성년자라 준요원. 정식 요원으로 임명되는 건 첫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난 후에.

 

이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 소문으로, 그리고 뉴스에서 보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관리국 직속 산하의 군에 들어가는 것. 더는 이 사회의 일원이 아닌, 전혀 다른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고 평생 이능력자로 살아가는 것. 메이는 센티넬로서 전투병이 되고, 미유키는 가이드로서 보조병이 되는 것.

 

학교를 가지 못하는 것. 일상을 살지 못하는 것. 야구를 하지 못하는 것.

 

서로가 서로의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

 

 

 

 

 

“너 여기서도 멋대로 하고 다니냐?”

 

복도의 난간을 툭툭 치며 걷던 메이가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무슨 상관이야. 아쉬운 건 자기들인데.”

“성깔 하며…….”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으나,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진 않는다. 미유키는 두어 발자국 떨어져 걷는 메이의 등을 물끄러미 보았다. 좀 조용해졌나? 확실히 키는 그대로였다. 어딘지 모르게 자세가 바뀐 듯하고. 아니면 단순히 살이 빠진 걸 수도……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마지막으로 보고 고작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상기했다. 마치 몇 년은 흐른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니 실소가 나왔다.

 

“오늘 잘하자. 무슨 말인지 알지?”

 

이쪽을 향하는 눈에 불만이 잔뜩 서린 걸 보니 전혀 그럴 의사가 없는 것 같지만. 만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응? 저쪽 하는 말 마음에 안 든다고 뒤엎지 말고. 나까지 곤란해지는 건 사양이니까.”

“처음부터 안 왔으면 됐잖아.”

“내가 놀러 왔냐? 불러서 온 거지.”

“널 부를 사람이 누군데.”

“누구겠어? 관리국에서 필요하다잖아. 원래 위원회는 전담이 출석해야 모이는 거라면서.”

 

툴툴거리는 메이에게 조목조목 반박하는데 맞은편에서 발소리가 났다.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이는 어딘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위아래로 갖춰 입은 탁한 하늘색의 유니폼을 보니 아마 오가며 마주친 연구원들 중 한 명이지 싶다. 안녕하세요, 부러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하자 살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뭐 그렇게 바빴어. 현장 뛰었어? 에이, 저 현장 안 뛰어요. 학생이 그런 걸 어떻게 해요. 맞아, 미유키 군은 아직 고등학생이었지. 가벼운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메이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에 꽂혔다.

 

복도 반대쪽으로 사라지는 이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돌아섰다. 묵묵히 연구원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메이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흉흉한 눈빛에, 입매는 할 말이 잔뜩 있는 모양새다. 평소보다 더 날카롭고 한층 더 위태로운 분위기였는데, 이걸 느낄 수 있는 건 자신이 가이드여서일까, 아니면 상대가 메이이기 때문인 것일까.

 

오늘 무슨 일이 터져도 터지겠네. 한숨이 나왔다. 툭하면 누구 한 명 잡겠다는 듯이 날을 세우는 건 무슨 근성인지 모르겠다. 사방에 잘 보여야 할 사람들뿐인데 미련하게…… 물론 이놈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게 관리국에만 오면 시종일관이라 문제지.

 

미유키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잘 지냈어?”

 

샛노란 야간등의 빛줄기가 통로의 창을 통해 들어와 어두운 벽을 훑고 굳게 다문 입술에 반사되었다 사라졌다.

 

“그럭저럭.”

 

돌아온 건 짧고 메마른 대답.

 

지금부터 뛰어도 미팅에 늦을 시각이지만…… 왠지 모르게 서두르고 싶지는 않았다. 미유키는 묵묵히 걷는 메이를 응시했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 옆얼굴뿐이라는 건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관리국에 들어가기 전에도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다.

 

이상한 일이다. 메이를 만나 맨 처음 솟은 감정이 반가움도, 짜증도 아닌 아쉬움이라는 것이.

 

“훈련은 안 힘들어?”

“전혀. 야구에 비하면 애들 노는 수준이지.”

 

확실히 둘만 있을 때는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진다. 미유키는 티 나지 않게 조심하며 걷는 속도를 더 늦추었다.

 

“자신만만한데?”

“그냥 내가 잘난 거야.”

“뻔뻔한 것도 여전하고.”

“너 여기 왜 왔냐? 나 놀리려고?”

 

욱하는 목소리가 순간 어렸을 시절의 메이 그대로라, 미유키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하하, 커다란 소리가 복도에 울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로 오래간만에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웃음을 만끽했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몇 달—아니, 몇 년 전. 가이딩도, 능력도, 발작도, 각인도 없었던 때.

 

“요새 수치는 어때?”

 

메이가 고개를 돌려 드디어 미유키를 쳐다보았다.

 

“괜찮은데, 왜?”

“한계치 넘긴 적은 없어?”

“없어.”

“밥은 잘 먹고?”

“알아서 먹어. 그리고 그만 좀 물어. 왜 이렇게 따져 묻는 게 많아?”

“궁금하잖아.”

“뭐가?”

 

미유키는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을 주먹 쥐었다 다시 폈다.

 

“그냥.”

 

왜 부르지 않는지. 어째서 아무 연락 없었는지. 미유키는 꺼내지 못하고 혀끝에 고인 말을 다시 삼켰다.

 

정말로 가이드가 필요 없어진 건지.

 

 

 

 

 

최종 심사 결과, 불합격.

 

위 내용이 담긴 짤막한 통지서는 개학을 코앞에 두고 도착했다. 그전까지 미유키는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관리국에 들어가 정식 가이드 임명을 위한 훈련을 받을 계획이었다. 어느 정도 사회적 통념에 따른 결정이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즉각적인 압력이 없지는 않았다. 문제의 사건 후, 벌써 결정 난 거나 다름없으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몇 번이고 구두로 전해 들었었다. 그런데 막판에 뒤집혔다. 나이, 학생이라는 신분, 본인의 의지 부족 등 변명 같은 이유가 구구절절 적혀 있었으나 진짜 이유는 뻔했다.

 

–정식 페어만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안 하겠다더라.

–…….

–너랑 붙으면 자기가 나가겠다며 소란을 피우는데. 알잖냐, 그놈 성격.

 

메이의 완강한 거부. 열 살 때부터 미유키를 맡아왔던 담당의에 의하면—사실상 미유키가 그쪽 세계와 가진 단 하나의 연결고리였다—관리국이 발칵 뒤집혔었다고 한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미유키가 전담으로 딸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며 온갖 소란을 피우더니, 나중에 가서는 이판사판으로 미유키와 자신 중 한 명을 고르라며 공갈 협박을 했다고. 구슬리고 달래고 윽박지르고, 하여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봤지만 그 고집 앞에서 아무런 소용 없었다고.

 

개체 수가 적은 가이드는 능력치를 떠나 존재 자체로도 귀하다. 하지만 관리국의 입장에서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아직 학생인 미성년자를 등록시킬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들이 원하는 건 메이였다. 정확하게 말해 메이의 그 무시무시하다는 능력. 컨디션이 다소 들쭉날쭉하다곤 하나 그거야 링 몇 개로 꾸역꾸역 버틸 때의 이야기이고, 전문가들에게서 제대로 된 관리를 받기 시작하면 금방 안정될 터였다. 메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으나 미유키는 항상 그럴 거라 믿어왔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 외 상부에서 어떤 담론이 오갔는지는 모른다. 중요한 건 메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는 것이다. 메이는 관리국에 들어가고, 미유키는 이곳에 남았다. 삶은 이어졌고 미유키는 학교에 다녔으며 수업이 끝나면 연습을 하고 프로 진출 준비를 했다.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직업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다. 소속 센티넬의 담당 가이드가 공란인 건 절차상 불가능하다며 곤란해하는 담당 행정원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들러리 마냥 메이의 서류에 이름만 올랐다. 미유키 카즈야. 임시 전담 가이드. 미등록 일반인. 아직 졸업하기도 전인데 임시직 딱지부터 붙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 일로 메이와 싸운 적이 있다. 당연하게도.

 

당연한가? 사실 미유키도 확신할 수 없다. 그때를 떠올리면 어느 세세한 부분에서 화가 났던 것인지 저도 자신을 모르겠다. 어쨌든 무척 큰 싸움이었던 건 기억한다. 메이가 머물고 있는 관리국 내의 숙소 앞에서 벌어진 다툼이었다. 미유키는 메이가 사전에 한마디 상의 없이 자신의 등록 여부를 독단적으로 정한 것에 화를 냈다. 메이는 반대로 미유키가 무슨 권리로 자신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인지 이해 못 하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미유키는 어이가 없었다. 그놈의 가이딩으로 몇 년 동안 사람을 진절머리 나게 괴롭혀놓고, 인제 와서 권리를 운운해? 너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겠어, 너 외에는 그 무엇도 만족스럽지 않아, 네가 아니면 안 돼, 했던 말들과 저질렀던 행동들이 눈앞에 선한데 그걸 전부 없었던 일 취급해? 그러고선 혼자 사라지겠다고? 야구, 학교, 모두 팽개치고선? 우리는? 이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어떤 사이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배신감이었을 것이다. 또는 서운함. 실연이라고까지는 안 하겠다. 다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 말 그대로 눈앞이 하얗게 세는 경험을 했다. 미유키는 메이를 두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한밤중의 거리를 전력을 다해 내달렸다.

 

달아오른 귓바퀴를 스치던 늦여름의 습기는 유달리 후덥지근했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부들부들 떨리던 입술은 아무리 씹어도 느낌이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눈가가 뜨거웠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가는 사람이 누구고 남는 사람이 누군지 뻔히 아는데. 누가 무엇을 포기하고, 또 어떤 도박을 걸었는지 명백한데.

 

핸드폰이 울렸다. 열어보니 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메이에게서. 도망가는 게 아냐. 그렇게 시작한 내용은 짧고 담담하고 명료했다.

 

10월 전에 정식 요원이 돼서 돌아갈 거야.

 

그리고 곧바로 도착한 메일이 한 통 더.

 

절대 포기하지 않아.

 

한마디로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

 

마음 깊은 곳부터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미유키는 그곳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그러면 어떻게 될까. 바꿀 수 있을까. 잡을 수 있을까. 메이는 아직 그 자리에 있을까. 도망치듯 뛰어왔던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둑한 밤, 가로등 불빛이 갈라진 콘크리트 위로 잔잔하고 새하얗게 부서지던 새벽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희뿌연 시야 속에서 짧은 메일 두 통을 읽고 또 읽었다. 서성거리는 발길을 한 걸음 내디뎠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하염없이 그 자리를 맴돌며 수많은 가능성과 미래를 그리고, 또 지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했다. 지금 이곳에서 다시 돌아갈지 말지부터 포함해서.

 

결론만 말하자면 미유키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미유키에게 있어 인생의 가장 큰 후회로 남았다.

 

 

 

 

 

“발현시기가 이르진 않았지만 능력이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조기 결과에 따르면 초신체력도 있는 듯합니다. 빠른 스피드와 강한 파워를 무기로 하는 육탄전이 돋보이나 역시 주무기인 특수능력은 염력입니다. 살상력 높은 염동력을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투 요원 중 하나로, 단순한 화력으로만 보면 모든 장병들을 포함 최강, 특히 크고 작은 물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고 거리 및 타점을 조절하는 실력이 뛰어나 대량살상이나 공간 전투를 위시한 특수 전술뿐 아니라 작은 타깃을 상대로 하는 전략적 군사 공작에도 바로 투입 가능합니다.”

 

어두운 회의실 조명 속에서 유독 밝게 빛나는 자료 화면은 미유키가 이해할 수 없는 수치와 도표투성이였다. 그 방에 있는 모두가—스물 남짓 되는—집중해서 경청하고 있었다. 메이는 쫓겨난 지 오래다. 시작하자마자 나온 간단한 질문 몇 개에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비협조적으로 대답해, 담당원의 권한 하에 이 자리에 있기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아무 도움 되지 않는 놈이 문을 박차고 나가고 어언 한 시간 째. 미유키는 이 미팅에 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대체 저 들쭉날쭉한 선의 어디가 진정한 메이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실전 테스트를 포함한 의무 사전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하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현재 지정된 가이드가 센터에 등록되지 않은 일반인입니다. 그마저도 제대로 정신 감응이 이루어지지 않아 현장 지휘와 보조 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파장 동기화 시도는 있었고요?”

“네. 정식 등록 전에 한 번 있었다고 합니다.”

“등록 전에?”

 

분명한 의문의 감정을 실은 목소리는 미유키의 맞은편에 앉은 이에게서였다. 느낌상 의사인 듯했는데, 그의 시선이 곧장 자신을 향하는 걸 보고 미유키는 앉은 자리에서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동기화 시도 직후 극심한 불안증을 보여 이송되어 왔었습니다. 호흡 곤란, 흉부 통증, 심박수 증가, 어지럼증 등의 증상이 있었고 환각 증세도 보였습니다. 다행히 단기성이라 며칠 후 안정되었지만 그 이후로 추가 시도를 계속 거부하고 있습니다. 관리국에서도 성공 확률에 비해 위험도가 너무 높다고 판단해 딱히 권유하지 않고 있고요.”

“누가요?”

“네?”

“누가 불안 증세를 보였죠?”

“아. 피험자 쪽입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당시 연구원 한 명이 했던 말이 있었다. 각인 시도 후, 가이드가 아닌 센티넬이 이 정도로 불안 증세를 보이는 건 드문 일이라며, 상세한 경위를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그때에는 메이가 좀 독특한 경우구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지금 반응을 보니 단순한 특이 케이스만은 아닌 듯했다.

 

어찌 됐건 이쪽 입장에서 유리한 정보가 아니긴 하지. 미유키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펜의 끄트머리를 잘근거렸다.

 

“그러면 현재 안정화 절차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매번 다릅니다. 테스트마다 능력 편차와 위험성 평가가 들쭉날쭉한 가장 큰 이유가 사실 이건데요. 그래서 현장 투입이 시기상 이른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긴 합니다. 다행히 당사자가 오랫동안 보조 기기를 사용해와서 그쪽에 거부감이 별로 없고…… 또 구두로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현재 가이드와 훨씬 이전부터 비접촉을 통해 파장을 안정시켜왔다고 합니다.”

“훨씬 이전부터?”

“네.”

“전투병과 보조병이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말씀입니까?”

“굳이 말하자면 둘 다 군인은 아니고요. 미성년자라.”

 

회의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문제를 제기한 이의 눈길이 미유키에게서 발표자에게로, 다시 미유키에게로 향했다.

 

“국제지구 아동권리협약에 따라 미성년자를 현장에 투입하는 건 어떤 상황에서든 금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물론 내 역할은 감사가 아니고 의학적 자문일 뿐이니 제가 나설 곳은 아니라고 해도.”

“메이가 원했어요.”

 

미유키에게 방 전체의 시선이 쏠렸다.

 

“본인이 고집해서요. 어떻게든 첫 배치를 드래프트가 있는 10월 전에 끝내고 싶다고요.”

“미유키 카즈야 씨?”

“아, 네.”

 

표정 없는 얼굴이지만 그 뒤로 걱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다. 미유키는 저도 모르게 등을 꼿꼿이 펴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하야시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내 일은 새로 요원이 될 이들의 최종 승급 심사인 현장 투입이 언제쯤 이루어져야 적절한지 자문을 해주는 거예요.”

“네.”

 

쉬운 단어로 친절하게 나온 소개는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쉽게 긴장을 풀지 못했다. 메이의 미래는 결국 이 회의실에 있는 몇몇 이들에게 달려 있었다. 언제 첫 임무가 있을지, 얼마 정도의 자유가 주어지는지, 다시 사회로 나갈 수 있는지, 전부 다. 미유키는 무릎 위에 둔 두 손을 있는 힘껏 주먹 쥐었다. 회의실 바깥에 있는 메이의 초조함이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귀 언저리에서 공명하고 있었다.

 

“동기화 시도가 있었다고 했죠. 보통 각인이라고들 하는.”

 

미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어떤 시도였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메이는 입술 안쪽을 씹었다.

 

육중한 문은 방음이 전혀 안 되는 무용지물이었다. 딱히 싸구려 재료를 썼다기보다는, 빌어먹을 이 능력 때문에. 각인에 관한 이야기가 불가피하게 나올 것은 진즉 예상했었다. 어차피 평생 따라다닐 일이다. 각인. 각인. 다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듣게 되는 이 단어가 지긋지긋할 뿐이었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몇 달 전이었다. 그러니까 메이가 아직 학교에 있던 시절. 그가 하는 대부분이 그러하듯 홧김에 저지른 행위였다. 드문드문 산재하는 강렬한 몇 부분 외에 자세한 기억은 매우 희미하다. 어떤 경로로 거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무슨 각오와 마음으로 임했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또 상대가 움직였는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겨우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그러했다.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단순히 잊고 싶은 과거라면 잊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흐릿한 그 날의 일 중 그나마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미유키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뭐? 아냐.

–하지만 그때 분명.

–정말 아니야. 내가 하고 싶다고 조른 거였잖아.

 

아주 나중에, 그때 있었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때 미유키가 한 말이다. 그래서 단 하나 가진 그 기억마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하다. 원하는 것이든 원하지 않는 것이든, 가장 쓸모없고 하등 도움 되지 않는 것만을 뇌의 한 부분으로 남겨 평생 반복해 재생하게 만든다.

 

미유키의 기숙사 방이었다 기억한다. 더웠고 눅눅했다. 중간에 그 얘기를 하고 나서야 에어컨을 켰었다. 그전까지 미유키는 방의 온도를 감지할 정신도 없었던 것 같다. 안 더웠어? 물으니 원래 이렇게 더워야 하는 줄 알았지, 라는 대답이 돌아왔었다. 동그란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식어가는 걸 손바닥을 통해 느꼈었다.

 

메이는 아직도 그때의 생각을 하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목청에서 피를 토할 때까지 소리 지르고 싶었다.

 

정말로 각인이 되면 웃기겠다, 그치.

 

그 말을 미유키가 했었던가? 아니면 자신이? 이 말을 하고 미유키는 웃었던가? 아니, 애당초 시도하는 동안 한 번이라도 웃는 얼굴을 보았었나?

 

날 사랑해?

 

그렇게 물었던 건 누구였더라?

 

 

 

 

 

지겹게도 길게 이어지던 위원회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났다. 회의라기보다는 질답에 가까웠고, 그조차 쌍방으로 오가는 게 아니었으니 일방적인 신문 조사에 불과했다. 메이는 어느새 자기 방에 돌아가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미유키는 손을 뻗어 연한 금색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특출나게 다른 것도, 놀랄 점도 없었다. 딱 그 정도의 길이와 굵기를 가진 머리카락에서 느껴질 부드러움. 손가락 끝마디에 닿은 살아있는 이의 따스한 체온.

 

“끝났어?”

 

그리고 아무 대단할 것 없는, 평범한 소년의 목소리.

 

“응.”

 

오래 걸렸네, 중얼거리는 저음이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방 안에 깔렸다. 미유키는 자리에 선 채로 메이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손가락 끝에 감기는 가닥이 얼핏 땀에 젖은 것도 같았다.

 

“어떻게 됐는지 안 물어보냐?”

 

메이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오늘 안에 결정 안 날 텐데, 뭐.”

“…….”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할 거라니까.”

 

단호한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미유키는 메이가 지금 적잖이 불안하다는 걸 감지했다. 이런 것도 알 수 있구나, 새삼 신기한 기분이었다. 세상은 바뀐 것 하나 없는데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르게 다가왔다. 그건 눈앞의 소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이 불안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가이드 없이 혼자서?”

“난 원래 혼자서도 잘해.”

“전담 없이는 위험하대.”

“그래서 어쩌라고.”

“메이.”

“내가 싫으면 끝이야.”

 

말투는 고집스러워도 손안에 들어온 머리는 미유키의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이끌렸다. 도대체 이놈의 어디를 보며 대량살상, 특수 전술, 그딴 걸 떠올릴 수 있는 건지 제 귀로 듣고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 진심은 그랬다. 현재의 모든 게 없었던 그때로 그저 돌아가고 싶었다. 연습 후 흙 묻은 유니폼 차림 그대로 뉘엿뉘엿 지는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누워 하릴없이 옥신각신 말을 주고받던 그때로. 눈을 닫고 귀를 막으면 없었던 일이 되지 않을까, 한심스러운 희망은 진작에 버렸다. 오로지 남은 건 눈앞의 소년뿐이었다. 상처받고 틀어졌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단 하나.

 

“혹시,” 미유키는 말을 골랐다. “아직도 필요해?”

 

의도치 않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메이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무슨…… 뭘 말하는 거야?”

 

천천히 얼굴이 이쪽을 향하고 커다란 두 눈이 미유키를 똑바로 바라본다.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망치는 건 그 여름밤의 어리석었던 자신으로 족했다.

 

“한 번만.”

 

미유키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손을 내려 메이의 팔을 잡았다.

 

“한 번만 더 시도해보자.”

 

 

 

 

 

생각해 보면, 미유키는 메이에게 한 번도 괜찮냐고 물은 적이 없다. 그럴 기회가 있던 것도 아니었거니와 그런 걸 물을 정도로 메이가 약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눈앞에서 쓰러지는 걸 목격한 건 그때가 처음—그전까지도 머리가 아프다며 징징대는 것만 들었지, 실제로 고통에 차 몸부림치는 건 보지 못했었다. 미유키가 이때까지 보아왔던 「그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무척 약했다. 능력자라는 꼬리표가 무색하게 하나같이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이었었다.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센티넬은 가이드 앞에서 유달리 연약한 모습을 보이게 설계되어 있으니까요.

 

위원회 미팅에서 자신을 하야시라고 소개했던 전문의가, 미유키의 투정 어린 푸념을 듣고 웃으며 한 말이었다.

 

–의사가 필연적으로 아픈 사람만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센티넬이 의도적으로 가이드에게 약함을 드러내는 건 꾸준히 관찰되어온 현상이에요. 본능적으로 나오는 행동 패턴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한데…… 센티넬은 가이딩 없이는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존재니까요. 공생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의존에 가깝고, 한마디로 말해 자기방어의 연장선인 거죠.

 

어설프게나마 각인을 시도해보았던 그 밤에 대해 두서없고 장황한 미유키의 설명을 차분하게 경청하던 그 사람은, 미팅이 끝나고 회의실을 나가는 미유키를 불러 세웠다. 개인적으로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그에게서 아주 잠깐, 헛기침을 하며 열 살의 아이에게 소식을 전하던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기에 미유키는 메이가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 자리에서 장장 두 시간에 달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미유키와 메이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대화를 나누는 중간에도 몇 번이고 도움이 필요하면 꼭 연락하라며 신신당부했었다.

 

–그래서인지 센티넬은 만에 하나 가이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능력」을 쓰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어요. 가이드가 근처에 있고 그걸 인지하고 있을 때, 폭주의 빈도가 현저히 낮아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가이딩 때문만이 아니에요. 본인이 억제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미유키는 메이가 능력을 쓰는 걸 본 적이 없다.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가는 것처럼으로도 나눈 적 없었다. 이 주제에 한해 메이는 극히 조심스러웠다. 확실히 어떤 능력인지, 언제 발현했는지, 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하길래 다들 난리인 건지, 모두 주변에서 알음알음 들어서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제가 걱정하는 건 그런 동기화……각인의 유무가 아닙니다. 관리국은 이것에만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지만, 수치나 비율 같은 건 알고 보면 상당수 임의로 정한 것이거든요. 실질적으로는 큰 의미 없는 숫자인 거죠.

 

발치만 보며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미유키가 시선을 들었다.

 

–그럼 각인을 하는 게 아무 소용 없다는 뜻인가요?

 

각인은 효율적인 가이딩과 원활한 관계 유지를 위해 필수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처음 관리국에 방문했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던 지침이었다. 날뛰는 수치, 불안정한 심리 상태, 갑작스러운 제어능력 상실 등, 모두 그 「각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나타나는 현상이고, 페어가 없는 지금은 여러모로 막막하겠지만 미래에 전담으로 센티넬을 맡게 되어 성공적으로 동기화를 마치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라고 수도 없이 들었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동기화의 성공과 실패 여부가 흑백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에요. 우선 개개인의 편차치가 크고, 무엇 하나 정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경우의 수가 관찰되거든요. 저희는 이런 표현을 써요. 열 명의 가이드와 열 명의 센티넬이 있다면 백 개의 다른 각인이 존재한다.

–그럼 성공했을 수도 있다는 건가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닙니다.

 

미유키는 인상을 썼다. 명확한 답이 없다는 건 이해했으나 여전히 알쏭달쏭한 말뿐인 게 탐탁지 않았다. 그런 미유키를 보면서 남자는 너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게 자신에겐 없는 어른의 여유인 것만 같아 미유키는 더 불만스러웠다.

 

–본인은 어때요?

–네?

–각인이 된 것 같나요?

–아까 아니라고.

–아니. 그거 말고. 본인의 의견이요.

 

미유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요.

–왜요?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때 일은 잘 떠오르지 않아요. 다만 메이가……

–네.

–여러 번 말했던 기억이 있어요. 싫다고.

 

그래, 분명히 그랬었다. 이제 됐으니 그만하자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거 재밌네요. 왜냐하면 나루미야 씨는 전혀 다른 말을 했거든요.

–네?

–그때 각인이 되지 않은 건 미유키 씨가 마음을 열지 않아서고, 아무리 자기가 노력을 해봐도 소용없었다고.

 

미유키는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때의 상황을 탐탁치 않아 했던 쪽이 누군지는 구태여 따지지 않아도 자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누가 시작했든 자신은 메이를…….

 

–각인이란 뭐라고 생각해요?

–파장이 맞는 거요.

–파장이 맞는 건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바로 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상대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진다.

 

–다르게 말해볼까요. 미유키 씨는 야구를 한다고 했죠.

–네.

–포지션이 어떻게 되시죠?

–포수입니다.

–좋네요. 자, 지금은 아주 중요한 경기 중이에요. 시즌 마지막 시합이라 칠까요. 승부는 미유키 씨와 나루미야 씨, 둘의 호흡이 얼마나 맞느냐에 달렸어요. 그런데 의견이 정반대로 갈렸습니다. 무엇을 하실 건가요?

 

아까와는 달리 단번에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글쎄요. 현재 카운트가 어떻게 되죠?

–풀카운트. 투아웃, 풀베이스, 박스엔 클린업. 상대는 나루미야 씨의 변화구를 친 적 있는 배터예요.

 

메이의 변화구를 그리 쉽게 치는 배터는 없을 텐데요. 대뜸 떠오른 생각이었으나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진정시키려고 하겠죠.

–어떻게?

–타임을 부르고 마운드로 가서 얘기를 하거나, 그런 식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실 건데요?

–그거야 당연히.

 

쉬이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같은 팀에서 배터리를 짰던 건 고등학교 때 단 한 번—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는 손바닥 위를 보듯이 안다. 모를 리 없다. 땀이 흐르지 않아도 모자를 벗어 이마를 신경질적으로 훔치는 손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폐를 쳐올리듯 토하는 짤막한 숨 뒤로 어떤 말을 숨기고 있는지. 수없이 상상했었다. 괜스레 마운드를 걷어차는 발짓을 장난스럽게 저지하고, 핏기없이 새하얘질 만큼 꽉 쥔 주먹을 살살 어루만지는 자신을. 하지만 현실에서 자신의 역할은 없다. 홈플레이트에 앉은 건 미유키가 아니고, 전담을 자칭하지만 가이딩을 해주지도 않는다. 내가 메이의 포수였다면, 그렇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리 생각하고선 실소가 흘렀다. 이제 와서 하기엔 염치없는 상념이었다.

 

–메이는 하이스트레스 상황에서 더욱 강해지는 타입이에요.

 

입을 열며 눈앞에 그때의 마운드를 그린다.

 

–제가 얘기하러 갈 때쯤이면 벌써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해 본 다음이겠죠. 센스가 좋고 승부를 즐기고 무엇보다 이론을 뒷받침해줄 기술을 가진 투수입니다. 뭐가 최선의 방법인지 모를 리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한다는 건, 정답을 부정하고 싶을 만큼 감정적인 상태라는 거겠죠. ……지금처럼요.

 

세상 모두가 적이라 한들 즐길 성격이었지, 그것에 영향을 받아 패닉에 빠질 성격이 아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한곳을 바라보는 둘 사이에 의견이 갈릴 일은 없었다. 메이가 정당한 콜에 고개를 저을 이유는 단 하나—미유키 본인 때문일 터다. 개인적인 의견의 차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압박, 그런 것이 아니었다. 거부당하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우선 화를 풀고, 진정하라고 할 것 같습니다.

–…….

–의외로 냉정한 성격이니까요. 차근차근 설명하면 들을 거예요. 그래도 안 되면 가벼운 장난을 치거나, 부드럽게 설득하면 될 거고요. 어떻게든 상기시키는 거죠. 우린 한 배터리고, 나는 같은 편이라는 걸.

–지금 말씀하신 모든 게 각인을 시도할 때 있었나요?

 

미유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각인이고 뭐고 다 떠나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닿기 위해서 필요한 건 뭐죠?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야. 집에나 가.”

 

얼이 빠져 있던 표정에 감정이 실렸다. 메이는 미유키의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설마 이제 와서 동정이라도 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잖아!”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아차 싶어 사과했다. 동정이라니. 한 번도 그리 생각해본 적 없다. 귀찮다고 여긴 적도 없다. 단지 곤란했었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면서, 어떤 생각으로 내민 손을 마주 잡았는지 모르면서 서슴없이 저한테 다가오는 메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곤란한 것, 그게 다였다. 그저 서툴렀을 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침착한 목소리로 설득하며 한 걸음 다가갔다.

 

“분명 이게 다가 아닐 거야. 우리가 그때 하지 못한 게 틀림없이 있을 거야.”

“웃기지 마!”

 

텅 빈 방이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 미유키의 말을 되풀이하는 메이의 얼굴이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네가 한 번이라도 내게 손 내민 적 있어? 나한테 먼저 다가온 적은? 먼저 연락한 적은?”

 

절규에 가까워지는 추궁을 들으며, 미유키의 몸속 어딘가에서부터 생소한 감각이 일었다. 손끝을 따라 콩닥콩닥 맥이 뛰고 솜털이 바짝 곤두서는 전율. 피부 안을 뚫고 들어오는 긴장. 두근거림. 흥분. 드디어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어쩌면 유일하고 특별한 단 하나가 될 수 있다. 기다려 마지않던 순간은 끔찍한 죄책감을 덧쓴 지독한 기쁨으로 찾아왔다.

 

“내가 잡아끌어야 겨우겨우 움직였으면서. 손 내밀어도 재촉해야 잡았으면서. 만질 때마다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동시에 알았다.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는 절대 성공하지 않을 걸 알았다. 그렇게 메이를 한계로 몰아간 벌은 결국 자신이 아닌 메이에게 떨어졌다. 그건 평생 남을 후회이자, 미유키가 온전히 져야 할 마음의 짐이었다. 내민 손을 잡고 다가오는 몸을 보듬었으면서 그 이상은 없을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그러면서 여기 어디에 우리가 있었다는 거야? 넌 언제나 그런 식이었잖아? 나 따위 죽든 말든 피하느라 바쁘기만 했잖아?”

“그건.”

“그래서 꺼져줬더니. 제대로 눈앞에서 사라져 줬더니, 이제 와서 우리가 그때 하지 못한 게 있을 거라고? 그 말 참 웃기네. 내 기억에 우린 못할 것까지 다 해봤거든. 싫다는 놈 붙잡으면서까지. 아니면 뭐, 이것도 기억 안 난다고 하려고?”

“아니.”

 

미유키는 다시 한번 메이의 손을 잡았다.

 

“전부 다 기억해.”

 

 

 

 

 

–물론 접촉을 통한 가이딩을 고집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의 크기가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섰을 때, 그걸 실체화하는 건 정신적인 영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구체적인 능력을 정신만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극도의 집중력으로 끌어온 깨끗한 파장이 필요한 거죠. 커다란 호수가 있다고 칩시다. 거기에 돌을 던지면 어떻게 되죠? 아주 조금의 잡음으로도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는 교란은 부득이하게 파급 효과를 불러오고, 이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힘을 쓰는 고도의 특수 능력자에게 있어 자칫하면 목숨을 위협하는 현상이 되는 거예요.

 

기억 속에서 메이는 많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미유키와는 정반대였다. 이 세상의 모든 소리는 미유키가, 그리고 둘이 몸을 맡겼던 기숙사 방의 낡은 나무 침대가 내는 듯했었다. 메이의 엄지 밑부분에는 딱딱한 굳은살이 잡혀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게 제법 투수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 손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메이의 손이 조금이라도 미유키에게서 떠날라치면 급하게 낚아채 붙들었었다.

 

–나루미야 씨는 호수와도 같아요. 그곳에 허락된 건 당신 하나입니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요. 오로지 그 한 명만으로 누군가의 마음은 잔잔한 수면일 수도 있고,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대양일 수도 있고, 몇천, 몇만의 인명피해를 내는 거대한 해일일 수도 있어요. 거기서부터 각인은 시작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몹시 더운 밤이었다. 초반에는 닿는 피부 사이를 맴도는 열기가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전해지는 것인지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고, 나중에 가서는 의미가 없었다. 각인이라는 건 사실은 통째로 먹히는 행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한 몸이 된다, 이따위는 에둘러 감상적으로만 묘사한 표현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피부를 파고드는 전율이 전신에 퍼져 몸속의 모든 구성물을 차곡차곡 재조립하는 경험은, 강제라기엔 폭력성이 없었고 자의라기엔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각인이 성공한 것이냐, 그걸 물어보셨죠? 간단하게 말해 각인은 되었습니다. 손을 잡는 걸로 이 정도의 안정 수치를 보이는데 안 되었을 리가 없어요. 다만 필요도를 훨씬 웃도는 대량의 동기화가 이루어졌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는 제삼자인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제대로 수순을 밟지 않고 단시간에 과한 규모의 교감이 있었거나, 당시 참가자 중 한쪽이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거나…… 또는 두 분이 처음부터 굉장히 잘 맞기 때문일 수 있어요. 물론 이 셋 모두일 수도 있고요. 이 이상으로는 뭐라 말씀드릴 게 없군요. 동기화는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효율적인 가이딩은 어렵게 된 거죠.

 

변명 같지만 이걸 원한 적은 없다. 구하는 것도, 망치는 것도 온전히 한 사람에게 달린 상황을 바란 건 아니다. 당연히 실패할 거로 믿고 응한 요구였다. 그걸 확신했던 이유는, 메이가 원하는 관계는 한쪽의 감정만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일방적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메이의 마음이 저와 같을 거라고 단 한 번도, 꿈에서라도 상상한 적 없다.

 

 

 

 

 

“……실패할걸.”

“안 해.”

 

미유키는 메이의 귓바퀴에 뺨을 누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어느새 품 안에 쏙 들어온 메이는 한참 누워 있었던 건지 몸이 따끈따끈했다. 그 등을 손바닥으로 살살 어루만졌다. 혹시라도 또 밀쳐낼까 싶어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다독였다.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예감.”

 

작지 않은 투수의 어깨는 두 팔로 한 아름 둘러도 빠듯할 만큼 단단했으나, 그런데도 한없이 작은 것만 같았다. 필사적으로 미유키의 옷깃을 그러쥔 메이의 몸은 잘게 떨렸고 겁을 먹은 동물처럼 잔뜩 긴장해 있었다. 미유키는 문득 그 밤을 떠올렸다. 그때도 자신을 잡은 손이 이렇게 저항 없이 떨렸었다. 몰랐던 것이 아니라, 단지 미유키가 모른 척했을 뿐이다.

 

“틀릴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럼 또 시도하지, 뭐.”

“그래도 안 되면? 또 실패하면?”

“계속해보자. 될 때까지.”

 

카즈야, 물러졌어. 중얼거리는 메이를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꼭 붙은 얼굴이 가슴팍에 뭉개져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 되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세게 부둥켜안았다.

 

“걱정하지 마. 될 거야.”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누구를 향하는지 알 수 없을 안도를 연신 토해냈다.

 

“언젠가는 꼭 돼. 알았지? 평생 이렇게 살지 않아.”

“어떻게 알아.”

“믿으니까.”

 

세상을 구할 숭고한 희생정신은 없다. 바라는 것도, 잃을 것도, 무서운 것도 많은 한낱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었다. 이 소년 하나만은, 꼭.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러니까 이번에는,” 뜨거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도 나를 믿어야 해.”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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