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1월 디페스타에 발간한 메이미유 앤솔로지 <.txt>에 참여했던 원고입니다.

*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서 제목을 빌려 왔습니다.

 

 

 

 

 

눈을 뜨자 맨 처음 보인 건 닫힌 우드 블라인드의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햇살이었다.

 

메이는 누운 상태에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크림색 전등갓. 회색 천장. 벽에 붙은 동그란 로우라이팅. 하나하나 짚은 시선이 다시 정면으로 흘렀다. 언제부터 내 방에 원목으로 짜인 블라인드가 있었더라.

 

“여기.”

 

멍한 정신이 답을 찾기 전에 시야 가장자리에 물컵이 불쑥 들어왔다. 그게 현재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려주었다. 카즈야의 집. 그곳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한 카즈야의 방. 아마도 카즈야의 침대 위.

 

맨 등에 닿은 부드러운 침대 시트의 감촉과 은은한 향기가 자신의 추측을 반증해주고 있었다.

 

“머리 아파?”

“만지지 마.”

“그러게 왜 떡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셔서는.”

 

끌끌 혀를 차는 소리가 어마어마한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래도 수분이 절박하게 필요한 참이라, 컵을 낚아채 내용물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도 두통은 가라앉질 않는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매번 왜 그렇게 부어요? 실체 없는 잔소리가 전담 포수의 목소리를 띠고 두개골을 쾅쾅 울렸다. 아니, 근데 종일 웽알댈 그놈이 아니더라도 하룻밤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갈 정도면 진지하게 걱정을 해볼 만한……

 

“그나저나 메이.”

“응?”

“너 늦었어.”

 

메이는 누운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하마터면 옆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놈과 박치기를 할 뻔했지만.

 

“간다. 나중에 봐.”

“그래.”

 

쾅, 소리와 함께 육중한 정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의 하강 버튼을 눌렀다. 매끄러운 전광판의 숫자가 천천히 1층을 향해 내려가는 걸 보며 메이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왜 카즈야 침대에서 일어났지?

 

 

 

 

 

“어? 일찍 왔네요? 오늘은 늦게 올 줄 알았더니.”

 

이 말이 화근이었다.

 

메이는 벗고 있던 운동화를 손에 든 채로 3년 차 후배를 응시했다. 다소 이른 시각이라 안 그래도 조용한 탈의실이 더욱 고요해진 듯한 건 분명 착각이 아닐 것이다.

 

“왜?”

“네?”

“왜 늦게 올 줄 알았어?”

“어. 내가 그런 말을 했어요?”

 

돌연 한 톤 높아진 음성이 돌아온다. 잘못 들었겠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사라지는 후배를 두고, 어떠한 예감이 들이닥쳤다. 이 기묘한 분위기의 정체를 알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모르겠고, 똑똑히 알아들었으면서 모른 척한 것 같으며, 별것 없는 해프닝인데 어쩐지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런 예감.

 

 

 

 

 

아니나 다를까, 이 예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중해 훈련 내내 그런 패턴이 이어졌다. 기억나는 것만 해도 한 손으로 다 꼽지 못한다. 「어? 오늘 나왔네?」 라든가. 「얼굴 좋아 보인다?」 라든가. 「이거 끝나고 바쁘지? 어서 가 봐」라든가.

 

그중에서도 가장 찝찝했던 건 코치에게서였다. 정확히 이렇게 말했었다.

 

안 피곤하냐? 하긴 젊으면 뭘 못해…….

 

쓸데없이 길게 빠지는 말끝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뚜렷한 의미를 내포한 늘어짐인데, 도도대체 무슨 뉘앙스인지도.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한 진실을 술술 털어놓을 만큼 쉬운―물러터진―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어제 잘 들어갔어요?]

 

평소 귀찮기 그지없던 고등학교 후배의 라인을 이다지도 간절히 기다렸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메이는 답장은 제치고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너 잘 연락했다.”

 

머뭇거리는 반대편에서 뭔가 답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끊기만 해봐. 죽는다.”

―네? 어, 저요? 제가요?

 

당황하는 게 폰 너머로도 역력했지만 지금 이놈 사정 저놈 사정 다 봐줄 때가 아니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다들 날 보고 실실거려?”

 

 

 

 

 

동경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거대 도시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장소에서 긴 시간에 걸쳐 철저한 계획과 절묘한 우연성의 배합으로 만들어지는 필연과 기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최상의 조건도, 잔인한 강제로도 이룩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창조와 예술의 신이 통치하고 비옥한 검은 땅의 범람이 수호하는 만년 왕국의 수도. 기아와 전쟁과 노예 제도에 맞선 투쟁의 세대가 자유를 갈망하며 개척한 도시. 열강의 식민 통치 아래 흘린 저항의 피를 딛고 일어나 또 한 번 서반구의 중심으로 자라난 고지. 그리고 대륙의 귀퉁이에 붙박은 섬나라, 흔하디흔한 강어귀에 위치한 작은 어촌이었던 도쿄.

 

이러한 도시의 중심부, 도쿄도 특별구에서도 정중앙에 위치한 분쿄文京区의 정갈하고 담담한 분위기는 특유의 안정감이 있다. 색바랜 담벼락이 나지막한 복층 주택을 감싸고, 좁은 뒷골목의 불규칙한 돌판길 사이로 부드러운 이끼가 무성히 자라는 동네. 오피스 건물로 들어찬 메인 가도는 출근 시간의 인파로 분주한데, 그 뒤로는 흙벽과 나무 기둥으로 지어진 료칸이 조용히 세월을 견디고 있다. 이런 곳을 빠져나와 굳이, 정말로 굳이 유흥가로 득시글거리는 신주쿠新宿区를 찾는 심리를 이해하긴 한다. 양복, 평상복, 여러 차림새가 뒤섞인 유동 인구로 바글바글한 십자로, 신호등의 색이 바뀔 때마다 사람과 차가 번갈아 쏟아져 내리는 혼돈 속의 질서는 틀림없이 경이로운 면이 있다. 하지만 끊임없는 소음, 고작 몇 미터를 걷기 위해 쏟는 에너지, 눈이 가는 곳마다 소화해야 하는 무한대의 정보량은 제아무리 대도시 생활에 익숙해졌더라도 금세 지치기 마련이었다. 2월부터 정신없이 이어졌던 경기와 훈련과 집단생활을 마치고 12월의 꿈같은 비시즌을 앞둔 이때, 고층 빌딩 숲속의 운치 있는 전통찻집을 놔두고 음식과 알코올 냄새가 밴 간판 없는 맥줏집에 처박히는 행위는 원래라면 메이가 깔끔하게 배제했을 선택지이다.

 

그런 면에서 야구란 사회생활이다. 암, 그렇지. 당연하고말고.

 

그리고 메이의 원만한 사회생활에 제일 큰 방해가 되는 가장 위험한 요소가 바로 저기에 있다. 메이는 한 시간 째 조그마한 가게의 구석에 앉아 다른 쪽 구석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중이었다. 후줄근한 운동복 일색인 시커먼 남자들 사이, 독보적으로 말끔한 이목구비를 달고 불공평하게 혼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인물.

 

“역시 그렇지.”

 

메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료―이번 해 들어온 새내기 1루수가 마시던 맥주를 황급히 내려놓았다.

 

“네? 뭐가요?”

“저건 저주야.”

 

메이는 손을 들어 구석진 코너를 가리켰다.

 

“저거.”

“어…… 미유키 씨요?”

 

대답 대신 인상만 찌푸렸다. 자세한 부연 설명을 바라는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간편하게 무시하기로 했다. 가게 전체가 땀내 나는 야구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전경은 여기에서만큼은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경기장 근처라는 위치가 그러했고, 이쪽 업계 종사자들이 즐겨 모이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으며, 이번 연도 시즌이 끝나는 주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저놈이 있는 건 의외다. 집이 가까이 있다곤 하지만 원체 번잡한 곳을 찾아다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만에 보는 거더라. 석 달? 반년? 아니, 아예 저번 스프링캠프 이후로 처음인 것 같기도 하다. ……얼굴 좋네. 원래도 용모가 반듯한 편이긴 한데. 이번 해 실적이 좋아서 그런가 유달리 훤해 뵈기도 하고. 하여간 운동선수라는 놈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기생오라비 뺨치게 생겨서는……

 

“미유키? 미유키 카즈야?”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끊고 끼어든 사람은 맞은편의 코치였다. 미유키 쪽을 쭉 한 번 훑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러게, 끄덕이고 만다. “저쪽 팀도 회식 왔나 보네,” 라는 영양가 없는 감상을 듣고 나서야 옆에 이츠키가―이미 미유키와 한솥밥을 먹은 지 오래인―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감정이라는 걸 알면서 괜히 그 광경이 마땅찮았다.

 

“아무리 이겼다지만 엊그제까지 시합이었는데 벌써 술이라니, 너무 되바라진 거 아닌가? 요? 그렇지? 요?”

“너도 놀러 나왔으면서 웬 시비냐. 그리고 말을 놓든 높이든 하나만 해.”

 

한숨을 푹 쉬며 말하는 게 나무라는 투라, 메이는 불만스러운 태도를 숨기지 않고 자기 앞에 놓인 맥주를 시끄럽게 들이켰다. 팀 개편과 함께 이번 시즌 새로 합류한 투수 코치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선수들을 대하는 수더분한 성격이었다. 가끔 쓸데없이 애 취급을 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안심찮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금처럼.

 

“그나저나 눈도 좋다. 너희 동창이라고 했나?”

“에이, 아니에요.”

 

큰소리로 대답한 건 고등학교 때 2년 후배 투수였던 아카마츠다. 버릇없는 자식. 메이가 도끼눈으로 바라보는 데도 유들유들하게 웃어 받아치는 게, 요즘 들어 부쩍 마음에 들지 않는 낯이었다.

 

“동창도 아니고 같은 팀이었던 적도 없어요. 나루미야 선배가 쫓아다닌 거죠.”

“뭔 개소리야! 아니거든?!”

 

버럭 지른 소리가 이구동성으로 터진 팀원들의 웃음소리에 묻혔다. 저 자식이 미쳤나? 이상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어. 야구는 사회생활이니 따지고 보면 직장 동료들 면전인데…… 메이는 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라 한마디 하려던 때였다.

 

“어. 이쪽으로 오는데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시끄러운 잡음 사이에서 들릴 리 없는 걸음 소리가 저벅저벅 귀를 울린다. 곧이어 등 뒤에서 바늘로 목덜미를 콕콕 쑤시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메이의 손에 땀이 맺혔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걸 참으며 대신 표정을 관리하는 데에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싹 무시한 채 코치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꼬락서니 덕분에 말짱 헛수고가 되었지만.

 

“아. 안녕하세요, 미유키 씨.”

“네. 신세 많이 지고 있습니다.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메이는 코웃음을 터뜨렸다. 자기가 이 팀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신세를 져, 지긴? 둘이 본 적이나 있긴 해? 기가 차서 따지려는데 어깨에 손이 툭 올라온다. 희고 마디가 굵은 손. 몸속 모든 피가 거꾸로 쏠리는 느낌이었다.

 

“아는 얼굴도 있고.”

 

그제야 방글방글한 두 눈이 메이를 향하며 묘하게 간지러운 감각을 남겼다.

 

“합석해도 될까요?”

 

 

 

 

 

“안쪽에 앉으시겠어요?”

 

메이는 끄덕이는 둥 마는 둥 점원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의 볕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카페 안에는 인근 대학교 학생들 서넛 외에 손님이 없었다. 이래서 분쿄가 좋다니까. 메이는 망설임 없이 창가 쪽으로 향했다. 자신을 보고 엉거주춤 일어난 이츠키 맞은편의 의자를 잡아 빼 털썩 앉았다.

 

“불어.”

“뭐, 뭘요?”

 

메이는 폰의 잠금화면을 해제해 이츠키 눈앞에 들이밀었다.

 

[너 어제 일 기억 안 나지?]

 

화면을 읽은 이츠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메이는 그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자그마치 7년을 알고 지낸 후배다. 저게 혼란에 빠진 눈빛인지,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찔리는 데가 있는 건지 웬만하면 시선만 마주치는 거로도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셋 다 아닌 것 같으니 문제지만.

 

“정말로 안 나요?”

“응.”

“전혀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단 1초도 기억이 없어요?”

“갓 뽑아 말린 도화지처럼.”

 

메이가 한 말을 듣고 이츠키가 웃는다. 그럼 그렇지, 그런 부류의 반응인 게 괘씸하지만 지금 잡을 지푸라기는 이놈 하나다. 심연으로 꼴깍 빠지는 와중인데 지푸라기가 시건방지다고 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알았어요. 얘기해드릴 테니까 돈부터 주세요.”

“돈? 무슨 돈?”

 

이츠키가 길고 긴 한숨을 쉬었다.

 

“어디까지 기억해요?”

 

 

 

 

 

“그때는 해외 선수들과 경기할 기회가 드물잖아요. 지역구 바깥으로 나갈 일도 적으니까.”

 

테이블의 대화가 미유키를 중심으로 돌아간 지 오래다. 주위도 바글바글했다. 원래 있던 메이의 팀 외에 미유키와 같이 왔던 그쪽 구단 선수들까지 합세해 가게의 절반이 넘는 인원이 이 좁은 귀퉁이에 몰려 있었다. 처음 슬금슬금 기어 온 건 이츠키였고 그다음으론 저쪽 투수들이었다. 그렇게 하나둘 넘어오더니 아예 두 팀이 자리를 합친 게 약 두 시간 전. 웃기지도 않았다. 다들 미유키를 빙 둘러싸고선, 꼴같잖게 수선스레 웃으면서, 무슨 백설 공주와 서른 난쟁이라도 되는 마냥……

 

그나저나 이놈 언제부터 이렇게 말재간이 좋았어? 메이는 미유키의 이야기에서 여태껏 자신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언짢은 것과 별개로 진심으로 놀라는 중이었다. 이 자식과 함께 한 지 강산이 변하고도 남았는데 이 정도로 말을 길게 하는 건 처음 보았다. 야구 얘기할 때 빼고. 하긴 자신과 나누었던 이야기도 대부분―전부, 라는 단어가 사실 먼저 떠올랐다―야구에 관한 것이니 비교 대상이 아니려나.

 

“그럼 하루 경기하신 건가요?”

“이틀이었어요. 하루에 하나씩 두 번.”

“나루미야 씨와는 배터리였고요?”

“슬프게도 그랬죠.”

 

지금은 고등학교 때 있었던 도쿄 선발팀 시합에 관한 이야기가 주제였다. 이제서야 저 빌어먹을 입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이 나와, 저도 모르게 귀가 쫑긋 섰던 참이다.

 

“참 질긴 인연이네요.”

“그런가요?”

 

그런가요? 그런가요? 옆에서 주억거리던 메이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긴긴 둘의 역사를 썩은 가지 쳐내듯 한 마디로 자른 미유키는 뻔뻔스럽게도 메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점잖게 대화에 임하고 있다. 평소 전화도 안 받는 놈이 바람직한 사회인인 양 구는 게 같잖아서…… 몇 잔째인지 모를 맥주를 불타는 속에 부어 넣는데 턱을 괴고 이쪽을 보던 아카마츠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교차하자 생글생글 미소를 짓고선 입을 연다.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저 자식은 또 어쩌자는 거지.

 

“그때 나루미야 선배 엄청났어요.”

“난 지금도 엄청나.”

“성격이요.”

 

메이는 인상을 팍 구겼다.

 

“그때 이누이 씨였나, 스윙에 맞아서 잠시 빠졌었거든요. 그래서 미유키 씨가 대신 올라왔는데. 나루미야 선배 완전히 신나서는.”

 

하여간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제일 문제다.

 

“이렇게, 미유키 씨 차례에 아웃 먹어서 들어왔거든요? 거기다 대고―”

“너 조용히 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카즈야? 이러는데.”

 

테이블이 뒤집어졌다. 지붕이 날아갈 만큼 큰 웃음소리가 신주쿠 외곽의 작은 술집을 가득 채웠다. 황당해 옆을 보니 미유키마저 어깨를 잘게 떨고 있다. 이게 웃겨? 진짜? 박장대소하는 현재와 과거의 전장의 동지들을 차례로 돌아보며 메이는 암담한 심정이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그때나 지금이나 제멋대로인 건 여전하네요.”

“성격도 좋다, 그걸 받아주고.”

“투순데 받아줘야죠.”

“맞아요. 게다가 나루미야 선배를 안 받아주면 어떤 사달이 날지……”

“이츠키, 네가 안 받아준 적은 있고?”

“없긴 하죠. 그래도 난 사랑 어쩌고 이런 소리는 안 들었어요.”

 

순간 주변이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빠졌다. 사람들의 눈길이 미유키에게서 이츠키로, 마지막으로 구석에 앉은 메이의 현 전담 포수에게로 향했다.

 

“왜요, 왜 날 봐요. 나도 들은 적 없어요.”

 

……재빠르게 꽁무니를 빼는 게, 평소 도루나 저렇게 하면 밉지나 않지.

 

“와, 그럼 미유키 씨 한정인 건가?”

“그런가 봐요.”

“아카마츠가 그랬는데. 나루미야가 무진장 쫓아다녔다고.”

“하하, 그럴 리가요. 약간 귀찮게 굴기는 했지만.”

 

하여간 내 편은 아무 데도 없지. 메이는 온 사방을 둘러싼 적들 사이에서 이제 맛도 느껴지지 않는 술을 콸콸 부었다.

 

“어떻게 했는데요?”

“공 받아달라고 하고. 전화하고. 메일하고. 뜬금없이 자기 학교에 오라고 하고.”

 

사람들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린다. 쫓아다닌 거 맞잖아. 아니긴 뭐가 아냐. 여기저기서 터지는 근거 없는 헛소리들 속에서 유독 코치의 말이 괜스레 귀에 잡혔다.

 

진짜 사랑이네, 라는.

 

메이는 맥주잔을 쾅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래서. 싫었어?”

 

떠들썩했던 주위가 단번에 고요해진다.

 

“싫었냐고. 내가.”

“선배.”

 

자신의 어깨를 잡는 이츠키의 손을 뿌리친 메이가 미유키를 향해 돌아앉았다.

 

“이렇게 된 거 담판을 짓자.”

“메이.”

“그냥 말해. 솔직하게.”

 

그리고 비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나 좋아했지?”

 

 

 

 

 

메이는 너덜너덜해진 냅킨 조각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래서 카즈야는? 뭐라고 했어?”

 

 

 

 

 

“아니.”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초거대 도시의 중심부이지만 대학가와 부촌을 둘러싸고 있어 차분하고 평온한 분쿄의 자그마한 카페 안에서 길고 커다란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왜!!”

“아니, 왜라고 저한테 해봤자…….”

“해봤자, 뭐! 당연히 물어볼 수 있지, 왜냐고!”

 

이츠키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다가오는 종업원에게 최대한 무해함을 가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다른 뜻 없겠죠. 인간적으로 싫다거나 그렇겠어요? 그냥 메이 선배가 좋아하는 쪽으로는 안 좋아한다는,”

“내가 좋아하는 쪽이 뭔데!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

 

대답의 공백이 의미심장하게 길었다.

 

“……알아?”

 

 

 

 

 

“왜?!”

“왜라니. 안 좋으면 안 좋은 거지 이유가 어딨어.”

“아니, 이유고 뭐고! 네 행동이 안 그랬잖아!”

“행동이 어땠는데? 그런 게 무슨 깊은 의미가 있겠어. 그러는 넌 내가 좋아서 연락했냐?”

“그래!”

 

헉. 옆에서 누군지 모를 이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난 너 좋아서 그랬다! 어쩔 건데!”

 

조금만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보았다면 지금 하는 말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깨달았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메이는 제대로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정말로 우스운 건 메이와 미유키를 둘러싼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나서서 말리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게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이성은 이러면 안 된다고 부르짖는데,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 말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너도 좋아하니까 다 받아준 걸 거 아냐! 공 던지면 받아주고, 전화하면 받아주고, 메일 보내면 답장해주고!”

“이나시로엔 안 갔지.”

“……이나시로엔 안 갔지만. 어쨌든! 싫었던 거 아니잖아? 설마 나 혼자서 짝사랑이라도 했다는 거야?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치사하게!”

“메이, 진정하고 내 말 잘 들어.”

“거짓말 작작 해! 싫다는 놈이 해달라는 건 왜 다 해주냐?!”

 

미유키는 눈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해주면 귀찮게 안 하니까.”

 

 

 

 

 

무슨 일 있었는지 이츠키한테 다 들었어 설마 술 취한 사람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나 너 없이도 잘 살고 너 같은 자식한테 원래부터 전혀 관심 없으니까 혹여나 쓸데없는 착각은 안 했으면 좋겠_

 

메이는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보다 빠르게 삭제 버튼을 눌렀다.

 

 

 

 

 

“진정하고 내 말 들어봐요, 선배.”

 

한참 종업원에게 양해를 구하다 자리로 돌아온 이츠키가 그때까지도 절규하는 메이에게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확실히 미유키 씨가 그렇게 말하긴 했어요. 다른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우리 팀이랑 선배 팀 다 모인 장소에서. 게다가 우리는 프런트까지 참석했던 회식이었고.”

“……죽인다.”

“그게, 그러니까요, 그렇게까지 상황 안 좋지 않았어요. 다들 웃으면서 장난처럼 넘겼다고요. 그러고 나서 조금 더 놀다가 파했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했고, 선배를 누가 데려다주느냐로 잠깐 의견이 갈리긴 했지만―”

“누가 데려다줬는데?”

“―미유키 선배가 데려다준다고 했고요. 돈 없다길래 택시비는 제가…… 맞다. 그러고 보니 오천 엔이요.”

“넌 지금 그게 중요하냐?!”

 

이젠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기까지 한다. 화병 나서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머리를 박박 뜯던 메이는 더는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어 두 팔에 얼굴을 묻었다.

 

“돈이 중요하지 그럼 안 중요해요? ……어찌 됐든. 정말로 싫었으면 그랬겠어요? 게다가 눈 떠보니까 미유키 씨 집이었다면서요. 이 정도면 잘 끝난 거 아닐까요?”

“그래. 그리고 난 기억을 하나도 못 하지.”

 

자조적인 메이의 중얼거림을 듣고 이츠키는 픽 실소를 터뜨렸다.

 

“보통은요, 그런 사람을 날강도라고들 하죠.”

 

술 취해 홧김에 양쪽 직장 사람들 다 모인 장소에서 공개 고백을 하고선, 눈을 떴는데 그 사람 침대 위라니. 싸구려 B급 로맨틱 코미디 시놉시스도 이것보단 앞뒤가 맞는다. 곱씹을수록 어이가 없긴 메이에게도 매한가지였다.

 

“내가 왜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야…… 됐어. 됐고. 대답이나 해봐.”

“뭘요?”

“너라면 어쩌겠어?”

“내가 선배라면요? 아니면 미유키 씨라면요?”

“나라면! 나! 당연히 나지! 너랑 카즈야가 어떻게 같아!”

“아, 나도 다른 쪽은 상상하기 싫거든요?!”

 

발끈하는 이츠키는 정말 억울해 보여 뭐라 더 추궁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잘 생각해봐요, 선배. 미유키 씨는 안 취했잖아요? 그러면 다 기억한다는 소리고. 그런데도 얘기를 안 해주는 이유가 뭐겠어요.”

“내가 안달 내는 게 재밌어 보여서.”

“……하긴 그게 90퍼센트이긴 할 텐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요, 그 소동이 있고서도 결국엔 자기 집에 데려간 거잖아요.”

 

나름 차근차근 이치를 따지며 선배를 위로하려는 후배의 각고의 노력이 기특하긴 했으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왜요? 그냥 묻고 확인하고 결판을 내면 되는,”

“이츠키. 눈 떠보니 나랑 카즈야가 같은 침대였던 게 이번이 처음일 것 같아?”

 

 

 

 

 

“안쪽에 앉으시겠어요?”

“싫은데요? 전부 다 보는 자리에 앉을 건데요?”

 

기가 막힌다는 면상의 종업원을 뒤로하고 메이는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널찍했다. 도쿄를 대표하는 오성 호텔 최상층의 스카이라운지는, 잔잔한 푸른색 조명과 레인보우 브릿지 너머로 즐비한 오다이바의 야경을 값비싼 벽지처럼 두르고 있는 무척이나 세련되고 몹시도 속물스러운 공간이었다. 메이의 폰이 여기 위치를 찍은 건 지금으로부터 삼십 분 전. 정확히 말해 이츠키와 헤어지고 나와 차로 돌아가던 중이다. 「근처에 있으면 잠깐 좀 보자」라는, 목적과 의도가 지극히 불투명한 의심쩍은 제안과 함께.

 

이 짤막한 메시지의 발신자―사나다 슌페이―는 현재 전면 유리 바깥으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을 배경으로 삼아 고상하게도 위스키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안에 든 얼음 조각을 달각거리다 메이를 발견하고 든 손에 여유가 넘친다. 메이는 별다른 인사 없이 다가가 앉았다. 여기는 아까 카페보다 손님이 더 많았다. 하나같이 곱게 단장을 하고 붓으로 그린 듯한 미소를 띄운 천편일률적인 양상이라 마치 잘 꾸며진 테마파크에 놀러 온 것 같았다. 이것도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분쿄와도, 신주쿠와도 또 다른.

 

“넌 또 무슨 일이냐.”

“살아있네. 지금쯤 혀 깨물고 요단강 건넜을 줄 알았더니.”

 

메이는 필사적으로 뇌를 굴렸다. 오늘따라 비록 없느니만 못한 기억이라지만 아무리 뒤져도 그 자리에 없던 놈이다. 애초에 있을 건덕지가 없다. 메이의 팀도, 카즈야의 팀도 아니고 더는 야구를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도심 한복판에 살 수 있는 거겠지만. 미나토구港区의 살인적인 집세를 감당하면서 도쿄 타워가 보이는 고급 바를 제집 뒷마당처럼 드나들 수 있는 건, 요새 일본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대형 출판사 패션 잡지 전속 모델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기억 안 나지? 어제 일.”

 

피식 웃는 모양새가 그리 얄미워 보일 수 없다. 보통 때였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떴겠으나 조금 전 이츠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 탓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메이는 종업원이 놓고 간 메뉴판을 집었다. 정체도 국적도 모를 이름의…… 무언가들이 수려한 글씨체로 빼곡히 쓰여 있었다.

 

“뭐 어쨌든, 됐고. 내놔.”

“뭘?”

“구천 엔.”

 

당당하게 펼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든 생각은, 「눈 뜨고 코 베이는 게 이런 기분 아닐까」였다. 심지어 하루에 두 번씩이나.

 

“너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구나?”

“듣긴 했어. 이츠키한테.”

“이츠키?”

 

의아한 얼굴로 눈썹을 흘끔 올리는데, 이츠키가 누군지도 모르겠다는 태도라 희뿌연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신주쿠에서 술 마시다가. 취해서 난리 좀 치고 집에 갔다고.”

“난리……를 치긴 했지. 했는데.”

 

어정쩡하게 줄인 말끝에서 급기야 공포를 느꼈다.

 

“……나 집에 간 거 아니었어?”

 

 

 

 

 

1950년대의 도쿄는 번영과 혼란과 모순의 집합체였다. 패전 직후 폭발적인 인플레이션과 자원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은 승전국인 미국의 지원 하 빠른 산업 발전을 일으키고 있었다. 헛된 영광을 부르짖던 제국이 해체되고 극적인 개편을 토대로 한 국가의 재건 속에서 타국―소위 말하는 서방의 발달한 선진국들―이 다양한 모델로 제시되었다. 모든 도시는 각자의 독특한 외향과 색이 있고, 냄새와 날씨와 소리와 구조가 있다. 그렇지만 이 당시의 도쿄는 하나의 도시라고 하기 힘들었다. 잿빛의 황폐한 들판에 줄지은 나무 막사 옆으로 공공사업의 간판을 건 최신식 철도가 뚫리고, 기적을 모토로 내세운 민족적 자긍심과 유토피아적 메가시티의 이미지에 혹한 젊은이들이 지방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들어 바야흐로 산업화의 바람이 열도에 불어닥치고 있었다. 발전소, 댐, 항구, 고속도로, 매립지 위에 설립된 화학공장, 정유공장, 최신 상수도와 하수처리장…… 사회적 간접 자본을 위시한 투자는 그 규모도 규모였지만, 오래된 도시 모델에 직접적으로 대립해왔던 새로운 세대의 건축가들을 끌어들여 대륙 최동단의 작은 촌락으로 시작했던 항구를 개혁의 슬로건 아래에서 다시 한번 탈피하게 했다. 수단이었던 도시는 어느새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7년―일본은 세계 경제 강국의 반열에 들어선 자국의 부상을 상징하는 기념비를 세우고자 에펠탑을 본뜬 송신 타워를 구상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도쿄 타워. 28억 엔을 들여 1년간 총 4000톤의 강철을 쌓아 333미터의 높이로 올린 이 탑은, 완공했던 당시 세계에서 제일 높은 인공 건축물이었다. 도쿄의 얼굴이고 눈과 귀라고 할 수 있는 곳. 21세기 들어 시내 최고층의 타이틀을 스카이트리에게 물려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수많은 시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이곳. 일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도쿄의 자랑.

 

 

 

 

 

“그래서?”

 

메이는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카즈야.”

 

그리고 한쪽 눈썹을 찌그러뜨린 채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른바 애교였는데, 미유키한테는 통하지 않는 것인지 하아아, 깊고 깊은 탄식만이 돌아온다.

 

“딱 한 번만 올라가자, 응? 그러고 나면 얌전히 갈게. 집이든 어디든.”

 

“그래 봤자야.” 미유키가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짜 안 돼.”

 

“왜? 왜 안 되는데? 싫은 놈이랑은 안 가겠다 이거야?”

“그렇다기보다는.”

“보다는?”

“입장료 없어. 방금 택시비로 다 썼거든.”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하면 포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보다.

 

“괜찮아.”

 

메이는 의기양양하게 핸드폰을 꺼냈다.

 

“근처에 친구 사니까.”

 

 

 

 

 

“친구? 너랑 나?”

“아니. 미유키랑 나.”

 

메이는 히죽거리는 사나다를 향해 피냐콜라다의 파인애플 조각을 집어 던졌다.

 

 

 

 

 

어디까지였더라.

 

그래, 1950년대 도쿄였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당연하겠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나리타 국제 공항 시공. 건설. 건설. 끝없는 건설. 그리고 1980년대 거품경제로 인한 부동산 시장의 붕괴. 이어진 잃어버린 10년.

 

많은 이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이 있다. 무기물로 만들어진 것은 세월이 흘러도 영원할 것이라 쉽게 넘겨짚곤 한다. 하지만 돌은 마모되고 철은 녹슬며, 건물은 유한하고 도시는 변한다. 사람은 죽고 시간은 흐르고 역사는 새로 쓰인다.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겐 공기처럼 당연한 일일지라도, 콘크리트 바닥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눈부시고 신기로울 수밖에 없다. 아는 것, 모르는 것, 직접 겪진 못했지만 그 작용과 여파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모두가 섞여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도쿄였다. 바로 나루미야 메이의 도쿄.

 

메이는 이곳이 좋았다.

 

 

 

 

 

“좋지. 다 좋은데.”

 

사방으로 엇갈린 붉은색 철창과 그 사이로 보이는 시가지의 풍경을 관망하던 메이는 말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이목을 돌렸다.

 

“왜 걸어 올라가는 거냐.”

 

600개의 계단을. 11월 말에. 20년 만에 왔다는 혹한의 날씨를 뚫고.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며 답지 않게 조목조목 따지는 미유키는 적잖이 피로해 보였다. 몸이 고달프기보다는 정신적으로. 이는 모두 몇 초면 끝날 엘리베이터는 순 사기고, 올라가는 걸음마다 진정한 건축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야외 계단이 진정한 로망이라며 고집을 부린 메이 때문일 것이다.

 

“응? 사서 고생하는 억하심정은 대체 뭐냐고.”

 

그리하여 도쿄 타워 정상을 향해 오르는 이곳 토박이가 둘.

 

“굳이 말하면 산 건 나지. 너희들은 그냥 고생만 하는 거고.”

 

아, 이왕 생돈 써서 입장료 내줄 거면 자기도 가야겠다며 가세한 사나다까지 셋.

 

“글쎄다. 저놈은 그다지 고생이라고 느끼지도 않는 것 같은데.”

“맞아. 난 좋아. 완전 재밌어.”

“저것 봐.”

“공기도 상쾌하고. 바람도 시원하고.”

“와, 진상…….”

“차인 건 나거든? 왜 내가 진상이야!”

 

발끈한 메이의 언성이 높아졌다. 툴툴거리는 건 상관없지만 둘이서 막연한 친구 마냥 장단을 맞추는 게 기분 나빠서. 그러고 보니 사나다도 투수였었지. 미유키 저 자식, 하여튼 공 던지는 놈이랑은 어찌나 죽이 잘 맞는지 같은 팀이었던 적도 없고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면서 저렇게나 보란 듯이 찰떡이다.

 

물론 메이와도 같은 팀인 건 아니지만. 자주 만나지도 않고.

 

“차였다고? 누구한테?”

 

메이 내면의 혼잡한 소란을 알 리 없는 사나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 왔다.

 

“설마 미유키?”

“그래, 저놈한테 차였다! 그게 뭐!”

“아니. 별로 어떻다는 건 아니고.”

 

입으론 그렇게 말하면서 눈은 재밌어 죽겠다는 듯 빛을 낸다. 미유키와 둘이서 속닥거리는 것도 같았는데, 무슨 내용인지 알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으나 물어볼 엄두가 나진 않았다. 메이는 철컹철컹 소리가 계단 전체를 울릴 만큼 발을 굴리며 걸었다. 아까 신주쿠에서도 그렇고, 자기에겐 딱딱해 마지않으면서 다른 이들과는 곧잘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러면 넌 널 찬 놈하고 도쿄 타워에 온 거야? 줏대도 없다.”

“그만해, 사나다.”

“됐어. 맞는 말인데, 뭐.”

 

메이는 사나다에게 주의를 주는 미유키를 저지했다. 이런 식으로 이따금 던지는 깜짝 선물 같은 배려에 설레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친절한 미유키보다 짜증 내는 미유키가 더 편했다. 적어도 오늘 같은 상황 속에서는.

 

“하여간 넌 꼭 그런 식이야.”

 

돌연 다리에 힘이 풀린 메이는 차가운 철근 계단 위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거절하면 됐잖아. 왜 잘해줘서.”

“아니, 딱히 잘해준 적 없는데……”

“난 진짜, 그것도 모르고 시니어 때부터 계속…… 바보지, 내가.”

“메이.”

“웃고. 전화 받고. 왜 군말 없이 다 해준 거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운동화 코로 바닥을 깡깡 소리 나게 두드리니 뒤에서 올라오던 커플이 메이를 멀찍이 둘러 지나쳐 간다.

 

“알고 보면 섹스도 그래? 나랑 자는 것도 별거 아닌 거? 카즈야, 사실은 아무라도 상관없지?”

“잠시. 방금 굉장히 불필요한 정보를 들은 것 같은데.”

 

당황한 사나다가 끼어들거나 말았거나, 메이는 미유키의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그때 스프링캠프에서 우연히 만나서 반가워한 것도 나뿐이었어? 지난봄에 조깅하다 마주쳤을 때도? 저번 해 크리스마스도? 아예 소맷자락까지 부여잡고 구차하게 애걸복걸 매달리는데, 설마, 설마 눈물이 나오려는 걸까. 코끝이 급속도로 시큰해지는 이유가 제발 추운 날씨 때문이길……. 정말이지 모든 게 절망스러웠다. 알고 보니 십 년 내내 아무 감정 없었다는 거다. 작년, 재작년, 그 전 해에도. 고등학교 때도. 심지어 중학교 때도. 처음으로 자기만큼 야구를 좋아하는 친구가 생겼다고 믿었던 그때도.

 

“메이.”

“응?”

“그만 돌아가자.”

 

……매정한 자식.

 

“너 취했어. 오늘 최저기온 0도야. 이러다 큰일 나.”

 

그깟 추위보다, 정말 걱정스러워 참을 수 없다는 듯 타이르는 저 말투가 더 진절머리 났다.

 

“오늘 일은 전부 못 들은 거로 할 테니까, 응?”

 

순간 머릿속의 퓨즈가 나간 것 같았다.

 

“웃기지 마!”

 

메이는 벌떡 일어났다.

 

“뭘 못 들어, 못 듣긴! 좋아한다니까? 사람 말이 말 같지도 않냐!”

 

좋아해. 좋아한다고, 젠장! 고래고래 소리치는 메이를 보며 미유키는 진심으로 깜짝 놀란 안색이었다. 그게 화를 더 부추겼다. 못 들은 척 해준다니, 그런 말이 자신에게 어떻게 들릴지 알면서. 하려고만 하면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세심한 놈인데 자신에게만 의도적으로 무심한 것 같아 원망스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어 애꿎은 목소리만 점점 커졌다.

 

“듣고 있어?! 나루미야 메이는 미유키 카즈야를 좋아한다아아!!!”

 

철창을 그러잡고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자, 추위에 갈라진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도쿄의 밤하늘에 널리 울려 퍼진다. 주변에 정적이 깔렸다. 얼마 가지 않아 난간 위로 얼굴이 하나둘 빼꼼 비어져 나오고, 맞은편에서 내려오던 일행이 멈추어 서서 수군거렸다. 사나다는 일찌감치 층계참 코너에 자리를 잡고서 이 난장판을 관람하는 중이었다. 미유키와 눈길이 마주치자 손뼉을 치더니 성의 없는 휘파람이 날아왔다.

 

“뜨겁네.”

 

두 손에 얼굴을 묻는 미유키는 진심으로 피곤해 보였다.

 

 

 

 

 

“왜? 맛없냐?”

 

칵테일을 입에 가져간 자세 그대로 얼음처럼 굳은 메이를 향해 사나다가 물었다.

 

“아니.”

 

메이는 아직 찰랑거리는 잔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나 앞으로 절대로 술 안 마셔.”

 

 

 

 

 

결국 끝까지 올라가고야 만 도쿄 타워 상층부의 전망대는 폐관 무렵의 시간대라 심야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두어 쌍 외엔 인파 없이 한적했다. 겨울이긴 하지만 아직 12월 성수기는 아닌 애매한 시기였으니 당연한 현상이리라. 메이는 손자국이 난 유리창 바깥으로 영롱하게 반짝이는 도심의 빛무리를 응시했다. 한참 먼 것처럼 보여도 이곳을 내려가면 메이의 손 닿을 거리에 펼쳐진 친근한 고향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타지에 온 것 마냥 생소하다. 팔을 뻗으면 언제나 잡을 수 있는 응당 제 것이라 생각했던 전부가, 한없이 냉랭한 색을 띠고 본 적 없는 정경을 그리고 있었다.

 

“메이.”

 

돌아보니 생수병을 내민 미유키가 있다. 메이는 그것을 건네받아 마셨다. 차가운 물이 들어가니 정신이 다소 드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태껏 시끄러운 머릿속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좀 괜찮아?”

 

사실로는 괜찮았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아 발치만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하면 이다음 나올 말은 뻔했으니까. 내려가는 길은 여기까지 도달한 여정에 비해 비교되지 않게 짧을 것이고, 오늘이 끝나면 내일은 어제와 다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걸 알고 있기에 선뜻 먼저 발을 뗄 수 없었다.

 

말이 없는 메이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미유키가 어깨를 짚었다. 춥지는 않아? 조곤조곤 나오는 질문 이후로 부러 듣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로 매몰찬 말을 다정다감하게 내뱉는 사람……. 시야에 오로지 미유키만이 들어왔다. 이 어둡고 우울한 도시에서, 차가운 고철 덩어리와 네온사인의 숲에서, 그 어느 것보다도 다채롭고 싱그러운 색깔로 빛나는 사람.

 

나루미야 메이가 사랑하는 사람.

 

“메이. 듣고 있어?”

 

퍼뜩 정신을 차리니 미유키가 코앞에서 자신을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살피고 있다. 메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작게 한숨을 쉰 미유키는 했던 말을 또박또박 번복했고, 모두 끝나자 방긋 웃어 보였다.

 

“이제 가자.”

“응.”

 

긴 밤을 견딘 도시는 어느덧 푸르른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메이는 눈을 깜박였다.

 

“그게 끝이라고?”

“응.”

 

고개를 기울이니 사나다도 따라 갸웃거린다.

 

“진짜?”

“진짜.”

 

사나다는 메이가 구석으로 밀어놓은 칵테일 잔을 집어 한입에 들이켰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미유키 말 무진장 잘 듣던데? 내가 가자고 할 땐 죽어도 싫다더니 미유키가 뭐라고 한마디 하니까 바로 고분고분해지고.”

 

능숙한 손짓으로 종업원을 부른 사나다가 계산을 치르는 동안, 메이는 들었던 이야기를 찬찬히 되새김질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휘휘 젓길 반복했다. 그러나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분명히 무언가 더,”

“무언가 더, 뭐?”

 

사나다의 표정이 드물게 심각해졌다.

 

“뭐가 있어야 하는데? 전부 다 거짓말이었고, 실은 예전부터 좋아했다고 고백하는 극적인 전개라도 벌어질 줄 알았어?”

“…….”

“그 미유키 카즈야가? 바랄 게 따로 있지.”

 

사나다가 뱉는 말들이 그가 즐겨 찾는 이 오성 호텔의 현대식 조명만큼이나 차가운 색의 비수로 돌아와 메이의 살갗에 박혔다. 메이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모든 것이 앞뒤가 안 맞고 뒤죽박죽이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차였다. 그리고 당장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갈래.”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메이의 면전에 사나다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인정머리가 없어서…… 메이는 자신을 가로막는 손을 쳐냈다.

 

“웃기지 마!”

“나루미야 군. 친구 사이에 계산은 정확해야지.”

“친구 좋아하네! 그리고 왜 구천 엔이야? 두 명은 육천이잖아!”

“당연히 내 것도 합쳤지. 너 아니었으면 나도 거기 갈 일 없거든?”

 

메이는 도쿄 최고 모델의 비싼 낯짝을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돌아가는 길은 평화로웠다. 오늘 내내―어제―쳤던 소동에 비하면 더없이 평온한 귀갓길이었다. 미나토에서 분쿄로 넘어가는 짧은 경로, 차 앞 유리 너머로 보이는 전경은 항상 그렇듯 특별할 게 없었다. 메이는 바뀌는 신호등에 따라 기계적으로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았다. 밀물과 썰물처럼 끊임없이 치고 빠지는 군중의 흐름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좋은 친구가 생긴 것에 기뻤다. 어쩌면 죽이 잘 맞는 동료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즐거웠고, 상대 팀으로 몇 번 경기를 치루고 나선 세기의 배터리가 틀림없다는 확신에 두근거렸다.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빠져들지 않는 것이 선택지 중 하나라는 걸 고려할 수조차 없이 맹신했다. 이건 비단 보내는 시간의 양으로 가늠할 수 없는 동질감이었다. 좋고, 싫고, 그런 간단한 흑백논리만으로 잴 수 없는 끌림이었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단 한 톨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 선수가 되어서도 메이의 이상은 현실화하지 못했다. 그건 첫 겨울,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만난 자리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의도치 않게 미유키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간 후에도 다름없었다. 생각해 보면 어쩌다 그런 전개가 펼쳐졌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미유키가 매우 낙낙했고,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그 후에 가진 술자리에서도 굉장히…… 사분사분했다. 그날은 그다지 마시지도 않았으면서 어딘가에 홀린 것처럼 굴었다. 그걸 미유키가 다 받아준다는 데에 그리도 들떠서는……. 그 후에도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었고, 이는 메이의 예상과 다소 다른 형태의 관계였지만 나름의 발전이라 믿고 지내왔었다.

 

차라리 그때 참았더라면 나았을까.

 

……이제 와서 후회해보았자. 이제 모두 소용없는 일이다. 고백했고 거절당했고 또다시 고백했으나 구질구질하게 끝났다. 이츠키의 말도, 사나다의 말도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좋아하진 않지만 술 취해 비틀거리는 놈을 버려두고 갈 만큼 싫어하진 않고, 추운 겨울밤에 얼어 죽지 않을까 염려할지언정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까지 케어해줄 정은 없다. 미유키 카즈야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좋아해」라는 고백에 「응」이라고 대답할 인물. 「사귀자」란 말에는 「아니」라고 딱 잘라 거절할 사람.

 

메이는 뺨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차의 히터에서 나오는 따스한 바람에 눈가가 간질거렸다.

 

 

 

 

 

“몸은 괜찮아?”

 

집에 도착하니 누군가가 메이를 기다리고 있다. 메이는 맨션 앞에 주차된 차 문을 열고 나오는 이를 얼떨떨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눈매. 나직하고 선명한 발성. 부드러운 다갈색 머리에 멋들어지게 어울리는 커피색 코트가 계절에 맞는 기장으로 떨어진 단정한 차림의 남자.

 

“그……”

“와타나베.”

“그래, 와타나베.”

 

둥글게 휘는 입꼬리에서 태생적으로 타고난 온화한 성품이 한껏 묻어나왔다. 내민 손을 빤히 쳐다만 보다가 황급히 잡고 아래위로 흔들었다.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구면이기는 했다.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사적인 자리에서 마주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대략의 인적 사항도 알고 있다. 미유키와 나이가 같다는 것. 미유키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것. 현재 미유키의 구단 프런트라는 것. 미유키와 꽤 친하다는 것.

 

어찌 됐건 자신의 집에 찾아올 만한 사이는 절대 아니었다.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은 했어.”

“뭘?”

“어제 일.”

 

메이의 표정이 단숨에 구겨졌다.

 

“설마 나 너한테서도 돈 빌렸냐?”

“응? 뭐? 아니, 그런 거 아냐.”

 

황급히 두 손을 저은 와타나베가 방금 내린―아마도 그의 소유인 듯한―차를 가리켰다. “줄 거 있어,” 라며 뒷문을 열더니 두 팔 가득 무언가를 꺼내 든다. 그건 메이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감청색과 흰색 포장지에 겹겹이 싸여, 화려한 은회색의 리본으로 곱게 장식된 붉은 장미.

 

꽃다발?

 

“저기. 마음은 고마운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내 건 아니야.”

 

메이의 의심 서린 눈초리를 받는 와타나베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미소가 사라졌다. 어쩔 수 없이 영문도 모르고 안면 몇 번 마주친 이에게서 꽃다발을 받아 들어야 했다. 포장지 하단에 돌돌 감긴 리본의 모양새나 콧속으로 들어오는 짙은 장미 향이 어딘지 모르게 친숙해, 메이는 한층 더 알쏭달쏭한 심경이 되었다. (물론 메이는 장미꽃이 어떤 향을 내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이건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닌 약간 다른 종류의 기시감이었다.)

 

“그리고 이거.”

 

와타나베는 자초지종을 물을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내밀었다. 반듯하게 접힌 종잇조각.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흰색 감열지에 숫자와 영문이 검은색 잉크로 프린트되어 있는 아무래도 이건…… 영수증.

 

그럼 그렇지. 모든 걸 포기하고 지갑을 꺼내려는데, 와타나베가 접힌 영수증을 펴 메이에게 뒷면을 보여준다. 그 위에는 날린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읽어봐.”

 

 

 

 

 

하하하, 청량한 웃음소리가 맑은 종소리처럼 귓가를 훑었다. 끼이익. 바퀴와 지면이 마찰하는 소리가 나고 찰나 몸이 공기 중에 부유하는 듯 떴다. 잠시간 정적이 이어졌다. 우웅. 낮은 기계음이 울리며 멈췄던 엔진이 다시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메이, 무거워. 오늘 몇 번째 듣는지 모를 투정도 따스하고 쾌적한 차 안에서라면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메이는 반쯤 잠에 취한 채 그리 생각하며 뒤통수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을 만끽했다. 눈앞이 핑핑 돌고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가 아프진 않았으나 구석구석 탁한 안개가 낀 것 마냥 전신이 묵직했다. 그 와중에도 뺨은 따스했다. 그게 미유키의 손 덕분이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닫고 얼굴만 돌려 굳은살 위에 입술을 댔다.

 

―그래서 날 부른 거야? 차비도 없어서?

―미안. 사나다한테 빌릴까 생각도 했는데.

―아니야. 잘했어. 어차피 자고 있지도 않았는걸.

 

도란도란 말소리가 이어졌다. 누구랑 대화를 나누는 중인지 알 수 없으나, 굉장히 막역한 사이라는 건 목소리의 톤과 오가는 내용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게 괜히 심통이 나 베고 있던―아마도 미유키의 허벅지였을―것에 이마를 세차게 문질렀다. 나 좀 봐줘. 대충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어쩌면 진짜로 했을지도 모른다. 메이를 쓰다듬던 손이 더욱 다정하게 뺨을 쓸어내리고 귀를 매만졌으니까.

 

―나베. 직진 말고 왼쪽으로 가줄래?

―응? 나루미야는 분쿄 사는 거 아니었어?

 

딸각. 딸각.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울리는 건 아마도 방향지시등. 누운 자리에서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그냥 신주쿠로 가줘.

 

 

 

 

 

[어디야?]

[집이야?]

[지금 거기로 가는 중이니까 기다ㄹㅕ]

 

메이는 핸드폰을 조수석에 던지고 시동을 켰다.

 

 

 

 

 

메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꿈결 너머 저 세상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했다. 메이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내내 자신을 지탱하던 포근한 살결은 없고, 싸늘하고 미끄러운 가죽만이 와 닿았다. 어딨지? 앓는 소리를 내며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주위를 더듬었다.

 

“메이.”

“으응.”

“이제 거의 다 왔어. 일어나.”

 

어깨를 잡아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이끌려 현실로 돌아오니, 이른 새벽에도 색색으로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의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카즈야 집 근처구나. 그제서야 깨닫고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깜박였다. 이런 식으로 미유키가 메이를 제 발로 집에 끌어들이는 경우는 자주 있지 않다. 빨리 정신 차리고 이 값진 기회를 최대한 즐겨야……

 

“카즈야, 저거!”

 

메이를 일으켜 세우던 미유키가 퍼뜩 놀라며 덩달아 차창 바깥을 본다.

 

“차! 멈춰 봐!”

“갑자기 또 왜 이래. 미친놈처럼.”

 

졸음에 짜증까지 얹힌 목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빨리 세워, 빨리, 재차 다그쳤다. 다행히 운전대를 잡은 와타나베는 미유키와 달리 친절해 군소리 없이 메이가 하자는 대로 차를 멈춰 주었다. 의기양양하게 내린 메이는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 뛰었다. 가로막는 인파를 제치고 뛰어가―실상은 술 냄새를 풍기며 형편없이 비틀거리는 메이를 알아서 피해 가는 양상이었지만―도달한 곳은 꽃집 앞이었다.

 

가게의 너른 쇼윈도를 마주 보고 선 메이가 창유리에 코끝이 닿을 만큼 붙었다. “좀 떨어져 있어. 손대지 말고. 실례야,” 혀를 차며 주의를 주는 미유키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한중간에 진열된 꽃다발을 가리켰다.

 

“이거.”

“이게 왜?”

“카즈야랑 똑같지 않아?”

 

고운 미간에 선이 그어진다. 야밤에 무슨 헛소리냐는 눈길이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조목조목 설명했다.

 

“무지 예쁘잖아. 카즈야처럼.”

“…….”

“파랗고, 빨갛고, 푸릇푸릇하고.”

“……우리 팀 유니폼이랑 너를 헷갈리는 거 아냐?”

 

어느새 다가온 와타나베가 미유키에게 슬쩍 귀띔을 한다. 미유키는 감흥 없는 투로 어깨를 으쓱였다. “술주정 그만 부리고 이리 와. 집에 가자.” 권유를 가장한 명령조의 말과 함께 미유키가 손을 내밀었다. 메이는 그것과 미유키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뭐?”

“역시 이게 있어야겠어.”

 

굳센 결단을 내린 메이가 와타나베를 향해 돌아섰다.

 

“혹시 돈 있어?”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서니 거실 소파에 미유키가 앉아 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평상복 차림. 정돈하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 투박한 안경.

 

오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았던 그대로의 모습이다.

 

“왔냐.”

 

메이는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가 미유키를 껴안았다. 다짜고짜 품에 안았는데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팔이 등 뒤를 감쌌다. 귓가에서 입술을 달싹이다 그대로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할 말이 많아야 하는데 이상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아무것도. 마치 어제저녁을 기점으로 깨끗하게 사라졌던 하룻밤 어치의 기억처럼.

 

“좋아해.”

 

안고 있는 팔에 더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그렇게도 멀었던 몸이 순순히 제게로 딸려왔다.

 

“그래.”

“진짜야. 예전부터 좋아했어. 중학교 때부터.”

“알아. 어제 전부 말했거든.”

“몰라, 난. 말한 기억 없어.”

 

하하, 웃는 얼굴이 이렇게도 예쁠 수 있을까. 넋을 잃고 미유키를 바라보던 메이는 그 눈이 자신의 손으로 향하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게 있었다. 분쿄에서부터 이곳까지 와타나베에게서 받은 꽃다발을 든 채로 왔었다.

 

“그거 마음에 들어?”

“응.”

“네가 샀어. 나 주고 싶다면서.”

 

풍성한 꽃다발을 턱짓으로 가리키는 미유키를 보며 기억에는 없지만 그때 자신이 무슨 심정이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말마따나 미유키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술에 취했든 안 취했든 보자마자 미유키를 떠올렸을 테고, 돈이 있든 없든 샀을 꽃다발이었다.

 

“와타나베 돈으로?”

“와타나베 돈으로.”

 

마주 보며 말하고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고 나서는 키스를 했다. 미유키에게선 언제나처럼 옅은 커피 향이 났다. 오똑한 콧대를 코끝으로 문지르고 고개를 기울여,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아 맞추듯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한 발자국 물러서서 무릎을 꿇었다. 꽃다발을 내밀고 고개를 들어 미유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좋아해, 카즈야.”

 

콩콩 뛰는 심장 소리보다 더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와아아. 카즈야 집이다.”

“애 같긴.”

 

피식 웃으면서도 메이를 지탱하고 내딛는 걸음걸이가 조심스럽기 그지없다. 가슴이 보들보들한 솜사탕을 삼킨 것처럼 잔뜩 부풀었다. 게슴츠레 뜬 시야에 낯익은 미유키의 맨션 로비가 들어왔다. 여기서 대각선으로 쭉 가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11층. 내려서 오른쪽으로 하나, 둘, 셋, 네 번째 집. 복도 맨 끝에 자리한 장식 없는 문.

 

“집에 가면 안아야지.”

 

바닥의 카펫 위를 질질 쓸며 걷는 도중에도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말할 거야. 사랑한다고.”

“어이구.”

“나 진심이야. 아까도 말했잖아. 나루미야 메이는 미유키 카즈야를―”

“―부탁이니까 소리 지르는 건 그만. 우리 쫓겨난다.”

 

메이의 입을 턱 막은 미유키의 손바닥이 한동안 거기에 머물렀다. 헤헤, 우리래. 카즈야가 우리라고 했어. 그 손에 입술을 뭉개 가며 바보같은 말을 웅얼거렸다. 자신의 꼴이 술에 취한 정신머리로도 제법 우습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나, 한번 들뜨기 시작한 마음에 제어를 거는 건 현재로선 불가능했다.

 

“소리 질러서 싫었어? 별로였어? 무릎이라도 꿇었어야 했나.”

“됐어. 이 정도로 충분해.”

 

메이의 헝클어진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정돈한 미유키가 잠시만, 귓속말을 하고 메이의 어깨를 한 팔로 받쳐 뒤로 민다. 등 뒤에 푹신한 침구가 닿고 나서야 침대 위라는 걸 깨달았다. 나 언제 카즈야 방까지 왔지? 시간이 갈수록 기억이 싹둑싹둑 잘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도쿄 타워였던 것 같은데. ……아닌가. 그 후에도 어딘가 갔던 것 같아.

 

“정말? 정말로 충분해?”

“응.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그러는 거 웃기긴 했는데. 나름 감동이었거든.”

 

나도 내가 이런 걸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혼잣말처럼 조아린 미유키의 정갈한 얼굴 옆선에 달빛이 내려와 앉았다. 오롯이 자신만을 향하는 시선이 믿기 어려울 만큼 달콤했다.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부풀어 올랐던 마음이 푹 꺼져 내렸다. 이 상황이 모두 거짓인 것만 같았다. 싫어하는 행동을 골라가면서 했는데, 이렇게 잘해주는 미유키는 과연 현실인 것일까.

 

“어차피 일어나면 또 아무 일 없는 척할 거면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그런 부질없는 바람이 샘솟았다.

 

“……안 그래.”

“됐어. 널 어떻게 믿어?”

“얼씨구. 그러는 넌 내일이면 다 잊는 거 아냐? 전망대에서 내가 한 말 아직 기억해?”

“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 카즈야가 드디어 말해주기로 했는데.”

“잘도. 꽃다발도 나베 차에 두고 내렸으면서 큰소리는.”

 

맞다, 꽃다발……. 메이는 궁시렁거리며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이거 봐. 또 흐지부지 없는 일인 척 굴 거잖아. 매번 말 바꾸고. 거짓말쟁이. 연신 중얼댔으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화가 멈추자 방안에 묵직한 적막이 깔렸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메이는 미유키 냄새가 흠뻑 밴 베개와 침구에 둘러싸여 급속도로 밀려오는 졸음을 반겼다.

 

“글쎄.”

 

흐려져 가는 의식의 끝 무렵, 마지막으로 보인 건 블라인드의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이었다.

 

“이번엔 증거를 남겼으니까.”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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