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1월 새막님 메이미유 교환식에 냈던 회지입니다.

 

 

 

 

 

[……(중략)……하지만 말이야, 사랑에는 진실로 후회뿐일까? 연인의 키스로 영혼을 날고, 그 입술에 천국이 있고, 다른 모든 것은 찌꺼기이기에 한평생 몸담은 비텐베르크 전체를 폐허로 만들어도 후회 없을 거라던 맹세는 과연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놓친 타락자의 갈 곳 없는 몸부림뿐이었을까? 헛된 쾌락을 누린 자에게 천국의 축복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사랑은 단지 일시적인 물질적 풍요의 향락과 같은 것이라면, 이는 무한을 향해 고군분투했던 낭만주의자에게는 과분하기만 한 정의였겠지. 그리고 그건 너무나도 슬픈 일이야. 나라면, 만약 나에게 영생과 사랑의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골랐을 거야. 엄습하는 악령의 그림자와 죽음의 공포 속에서 평생 절규할 운명이더라도 밀랍의 날개를 택했을 거야……]

 

 

 

미유키는 인상을 찌푸리며 종이를 재차 들여다보았다.

 

손에 든 뭉치는 제법 두터웠다. 옅은 푸른색의 빗금을 따라 앞뒤로 빼곡한 글씨는 단정하다곤 할 수 없으나 손가락에 느껴지는 옅은 오돌거림을 통해 글쓴이가 쏟은 열정의 깊이를 직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꼼꼼하게 찍은 쉼표와 주해. 시간을 두고 한참 생각한 듯 종종 달라지는 펜 선. 간혹, 그러나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몇 번이고 지웠다 다시 쓴 것만 같은 자국.

 

한 마디, 한 마디 훑고 내려간 미유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지막 장 뒤 페이지의 맨 밑줄로 갔다. 「成宮 鳴」. 힘있게 또박또박 쓰인 세 글자는 기나긴 글월을 마무리 짓는 마침표라도 되는 마냥 정갈하고 단호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1.

 

시작은 이러하다.

 

때는 막바지에 달한 점심시간. 양옆으로 죽 늘어선 사물함 사이로 11월의 게으른 볕이 비스듬하게 내리쬐는 이른 오후. 잠시의 자유를 만끽하느라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이들로 한산한 교사 한 귀퉁이, 그날 아침 뚝 떨어진 기온 덕분에 무언가 적당히 걸칠 옷가지가 있을까 싶어 찾은 개인 수납공간 안에는 낯선 내용물이 끼어 있었다.

 

편지.

 

이걸 편지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우선 봉투가 없었다. 봉투가 없으니 수신자의 주소를 쓸 곳도 당연히 없었고. 그리고 목적지인 주소가 없으니 그곳까지 도달하는 수단방식—예를 들면 우표라거나—도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직접 넣어놓았다는 뜻이고, 당장 어제 오후에만 해도 이 비좁은 철제 상자 안에는 익숙한 자신의 책들과 여벌 점퍼뿐이었으니 땅에서 솟아난 게 아니라면 한밤중에 벌어진 거사다. 게다가 구석진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동관 한중간의 계단을 올라가 복도를 가로질러야 하는데, 설령 문이 잠겨 있지 않다 해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나? 당직 근무 중인 선생님의 눈을 피해 가면서? 하지만 이 「어떻게」를 파헤쳐 나가던 일련의 생각의 흐름은 이다음 순서로 떠오른 의문점 앞에서 한낱 쓸모없는 첨부 사항으로 변했다. 왜. 무슨 이유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걸 하필이면. 대체 뭘 원해서.

 

물론 미유키도 안다. 편지를 정의하는 건 이러한 사무적인 요소가 아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틀에 박힌 글의 정의를 거부하며 세상과 역사를 바꿔왔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논리적 스토리텔링의 기본 구조인 기승전결? 없다. 담화적 서사를 위한 통일성이나 응집성? 역시 없다. 서론, 본론, 결론은? 있을 리 없다. 최소한의 맥락과 전개?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그러니 존재하는 건 향할 곳을 잃은 장문의 독백뿐이다. 아니, 글이 나타내는 바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불분명하니 이건 독백마저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까만 것은 글자요, 하얀 것은 종이일 뿐. 종으로 한 번, 횡으로 한 번 접힌 일곱 장의 직사각형. 실수로라도 놓칠 수 없는 발화자의 정체만이 똑똑히 적힌 채.

 

 

 

 

 

“그건 그거지.”

 

쿠라모치는 손에 든 주스 팩을 시끄럽게 빨아들이며 말했다.

 

“러브레터.”

 

미유키는 눈앞의 구깃구깃한 종이 뭉치만큼이나 미간을 접으며 답했다.

 

“장난이지?”

 

쿠라모치의 표정이 만만찮게 험악해졌다.

 

“내가 너한테 장난치는 거 봤냐.”

“그럼. 쓸데없는 소리도 자주 하고.”

“그러면서 이런 일에는 꼭 나한테 먼저 오더라.”

“내가 언제? 그냥 여기가 내 자리인 거거든?”

 

몇 개월째 자신의 것이었던 책상—불행하게도 쿠라모치의 뒷자리이기도 한—을 두드리며 항의하는데, 오른쪽 허리춤에 둔탁한 통증이 파고든다. 미유키는 반사적으로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팔뚝으로 짚었다. 거의 동시에 쿠라모치의 손이 다가와 어깨를 받치려 한다. 미유키는 팔을 들어 그 손길을 제지했다.

 

“됐어. 별거 아냐.”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쿠라모치를 향해 다소 날 선 대답이 나왔다. 잠시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정말 괜찮아,”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하자 경직된 쿠라모치의 어깨에 긴장이 풀리는 게 보인다. 여차하면 둘러업고 병원이라도 갈 것처럼 살피는 시선은 못 본 척 무시하기로 했다. 사람을 유리 세공품처럼 대하는 동료들의 취급에는 진작에 신물이 나 있었다.

 

“애초에 그런 걸 보낼 이유가 뭐가 있다고.”

“너야말로 장난해? 러브레터를 보내는 이유가 뭐겠냐? 당연히,”

“당연히?”

 

뭐라 말하려던 쿠라모치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어깨 너머 교실 뒤편 어딘가를 맴도는 시선에 의문이 서려가는 걸 보며, 미유키는 조심스럽게 상체를 펴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거봐.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러했다. 자고로 러브레터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여러 뜻과 목적이 있겠으나 넓게 보았을 때 결국 소통의 도구다. 사와무라가 신줏단지처럼 방구석에 모셔 놓은 순정만화를 굳이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나타내는 건 뻔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 그리고 이 「알아달라」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자신의 희망 사항을 다른 사람에게 투영하는 것과도 같았다. 내 진심을 깨달아라, 그리고 무언가를 해달라.

 

“봐주고 봐줘서 그……거라 치자.”

“러브레터.”

“그래, 그거. 그러면 취지가 있을 거 아니냐. 보통은 의사 전달이고,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든 답을 바라는 거고. 하지만 여기엔 지금 아무런 바라는 바도 쓰여있지 않아. 그러니까 결국 이건 그런…… 그게 아니라는 거지.”

“네 자식은 러브레터라고 말하면 죽는 병에라도 걸렸냐.”

 

한숨을 푹 쉰 쿠라모치가 빈 주스 팩을 구겨 교탁 옆의 쓰레기통 안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무성의한 태도로 미유키 앞에 놓인 종이 다발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꼭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그런 말이 있어야 고백인 건가? 그냥 마음을 전하고 싶었나 보지.”

“…….”

“그리고 이거, 제법 정성 들여 쓴 거 같지 않냐. 일곱 장 앞뒤로 다 채우려면 시간도 오래 걸렸을 텐데 글자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고.”

“…….”

“여기 이거 봐라. 지우고 다시 썼네. 여기는 다시 쓴 걸 지우고 또다시 썼고. 내용이야 조금 복잡하지만 한마디로 말해 그거잖아. 나 너 좋다. 무지 좋다. 아니면 뭐, 이것까지 아니라고 할 셈이야?”

“……그건.”

“대답 제대로 못 하는 거 보니까 결국 그거네.”

 

책상 위에 흐트러진 종이를 검지로 내리누르는 쿠라모치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진중하기 그지없었다.

 

“넌 그냥, 이걸 부정하고 싶은 거잖아.”

 

 

 

 

 

그날 밤, 미유키는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목욕을 마치고 나와 떠들썩한 식당을 지나쳐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갇혔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 종이의 정체와 의미에 대해.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경위와 존재 이유에 대해. 영국의 시인과 독일의 신학박사에 대해. 낭만과 지성에 대해. 자신의 본심과 타인의 진심에 대해.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원체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하는 성정이 아니다. 그럴 여유가 있을 정도로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고, 가능할 만큼 폭넓은 인맥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미유키에게 있어 인간관계는 애초에 그 종류가 매우 한정적이었다. 선의를 전제로 한 경쟁, 동일한 목표를 위한 협력, 그리고 약간의 호의를 담은 이해—그 외에는 없었다. 아, 그리고 메이.

 

미유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승 후보의 추계 대회 중도 탈락이라는 충격의 대사건이 있고 이제 겨우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얼굴에 담고 경기장을 나서던 뒷모습. 그 이후로 메이에게서는 단 한 번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미유키가 우여곡절 끝에 힘겹게 승리를 따냈을 때도, 직후 옆구리를 부여잡고 병원에 끌려갔을 때도. 살아는 있냐, 우승 축하한다, 다음엔 절대 안 진다, 빈말로라도 이런 문자 한 통 없었던 이유는 이해하고도 남으니 딱히 서운함이나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무척 신경 쓰이기는 해서, 간간이 경기 비디오를 통해 메이의 모습을 접하거나 소식을 들을 때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던 요즘이었다.

 

잊어먹을 때만 되면 꼬박꼬박 울리던 핸드폰이 그렇게 길고 긴 침묵에 빠진 지 32일째. 메이의 이름이 적힌 편지가 구교사의 낡은 사물함 구석에 마법처럼 나타났다. 게다가 그 내용은 내리 다섯 번을 읽고도 시력을 의심해야 할 수준이었다. 영생? 사랑? 무슨 사랑?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어질 만큼 난해한 편지는 미유키가 뜻만 알았지 생전 써보지 못한 단어로 그득했고, 시작부터 끝까지 지나치게 감상적이어서 보는 내내 얼마나 구겨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건 자신의 머리보다 한참 큰 야구모자를 눌러 쓰고, 경기 후 흙먼지 묻은 손을 내밀며 큰소리로 이름을 묻던 소년에게도 마찬가지이리라 믿었던 것들이었다.

 

미유키는 기억 속의 작은 메이를 떠올리다 저도 모르게 피운 입가의 미소를 황급히 지웠다.

 

메이는…… 기묘한 존재였다. 같은 팀도, 하물며 같은 학교에 다닌 적도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유키가 가진 가장 오랜 인연 중 하나였다. 그놈이야 저희가 세기에 다시 없을 라이벌이라고 믿는 것 같았지만—아마 처음 만났을 때 미유키가 의도적으로 던진 도발성 한 마디 때문이 아니었을까—정작 얼굴을 보면 경쟁과 전혀 관련 없는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미유키도 메이가 싫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좋은 것도 아닌 것이, 이러한 점에서 확신을 품기에 미유키에게 준비된 감정의 데이터베이스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같이 야구 이야기를 할 때 즐겁고, 경기를 할 때는 더더욱 즐거우며, 그게 같은 배터리로서라면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야구가 빠진다면? 상상도 할 수 없다. 애초에 야구가 없는 인생은 미유키에게 성립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그리고 메이란 인물은 이 정점에 있었다. 야구라는 공통분모가 아니었다면 미유키의 삶에 들어오지 않았을 인연.

 

그러니 어쩔 수 없잖아, 미유키는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 앞에 펼쳐진 이 장황한 글의 어디에도 야구 이야기는 없었다. 마치 메이를 가져와, 메이다운 것을 전부 솎아내고 이름 석 자만을 덩그러니 남겨 놓은 느낌이었다. 말투, 관점, 분위기, 평소 하는 대화의 주제와 생각, 모든 것이 그가 아는 소년과 딴판이라 반듯하게 접힌 눈앞의 종이 다발이 마치 차원을 넘어온 괴물인 것만 같았다. 이걸 그가 아는 메이와 연관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거리낌 없고, 직설적이고, 매사에 고집스럽지만 그걸 현실 가능케 만드는 자신감. 돌고 돌다 못해 16세기 독일까지 갔다 오는 러브레터에서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이건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야, 쿠라모치. 받아들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거라고.

 

결국 머뭇거리는 손이 주머니 안의 핸드폰을 찾아 번호를 눌렀다.

 

–카즈야?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는 미유키의 예상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왜 말이 없어? 카즈야 맞지?

“어. 그래.”

 

메이였다. 아니, 메이에게 전화를 걸었으니 메이가 받는 게 당연하다만. 그저 메이가 너무나도 보통의 메이라는 점이 놀라워서. 사실은 자신이 놀랐다는 사실이 더 놀라워 미유키는 핸드폰을 귀에 누른 채 말문을 잃고 눈만 깜박였다. 아마도 메이는 그 정적이 짜증 났나 보다. 다소 뾰족한 추궁이 되돌아왔으니까.

 

–무슨 일이야? 네가 전화를 다 하고.

 

퉁명스러운 질문은 어지럽던 미유키의 머리를 깨끗하게 비워버렸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미유키는 그제야 자신이 무턱대고 행동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 전화가 잘못 고른 선택지였다는 것도. 대체 무엇이 궁금했던 걸까. 뭘 물어보고, 또 무슨 대답을 듣고 싶었을까. 혹시 상대가 먼저 편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바랐던 걸까? 어색하게 반응하거나, 또는 부끄러워하길 기대했었나? 그랬다면 몹시도 비겁한 행동이었다. 편지의 진위를 직접 물을 마음도 없으면서 상대를 떠보려 했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치졸한 한 수였다.

 

미유키는 전화 너머로 얼굴이 보일 리 없는데도 달아오른 두 뺨을 팔에 묻었다.

 

–정말 괜찮아?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걱정이 한껏 묻어 있다. 미유키는 책상 위에 엎드린 채 고개만 틀어 대답했다.

 

“응. 별일 아니고. 잘 지내나 싶어서.”

–당연히 잘 지내지. 내가 언제 못 지낸 적 있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단 한 초의 망설임도 없이 들려온 대답이 평소와 한치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이가 메이처럼 행동하는 것에 안도를 느끼다니. 다만 이 감정의 흐름이 주는 모순을 깊게 고찰하고 싶지는 않아, 미유키는 부러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래? 저번 주 경기 갈팡질팡하던데.”

–안 했어! 초반에 전력 파악하느라 그랬지만 어쨌든 이겼잖아!

“까닥했다가 예선 탈락할 뻔한 거지. 너희 포수도 고생이다.”

–어디 가서 뒤처질 놈 아니니까 넌 너희 투수들이나 걱정하지?

 

오가는 대화는 금세 원래의 템포를 찾았다. 얘기를 하다 보니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침대로 향했다. 털썩 누워 눈을 감으니 눈꺼풀 뒤로 오늘 낮 내내 그를 괴롭혔던 글자의 무리가 일렁거린다. 미유키는 그것을 잊고 싶었다. 그래서 차가운 전화 너머로 전해지는 옅은 숨소리에 한층 더 집중했다.

 

“걔네 나 없어도 잘해. 알잖아.”

–서운하냐?

“설마. 기특한 거지.”

–한 학년 차이면서 애늙은이 같기는…….

“하하. 실례야.”

–너는 그런 말 할 자격 없거든?

 

그로부터 몇 분간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야구, 경기, 요새 전적, 연습량, 훈련법 등등, 뻔한 소재가 소진되고 나서는 성적, 시험, 날씨, 그런 평범한 고등학생이 으레 나눌 법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메이는 주로 질문을 던졌고 미유키는 주로 답을 했다. 그러면 미유키의 답에 따라 메이가 풍부한 감정을 담아 반응을 보였다. 그 후에는 미유키의 가벼운 놀림. 또 메이의 반응. 웃음. 처음부터 다시.

 

그래, 이게 메이다. 쉽게 욱하고, 하는 말마다 이기적이기 이를 데 없고, 그러면서 자신감을 잃지 않고, 절대 남을 깔보지 않는. 메이는 언제나 원하는 것이 분명했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외길을 걸었으며, 그 외에는 무의미한 곁가지일 뿐이었다. 편지의 화자와는 다르다.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둘 사이에 있는 건 시작부터 지금까지 야구,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건 이 관계가 유지되는 의의와 목적이고,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이 만든 견고한 세상의 껍질이었다. 어린이티를 채 벗지 못한 꼬마 둘이 미숙하고 성긴 손으로 빚어낸 그들만의 작은 세계.

 

미유키는 눈을 떴다. 방에는 이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2층 침대의 빗살과 어렴풋한 전등갓의 실루엣, 문과 바닥의 틈새로 들어오는 기다란 빛줄기만이 눈으로 분간할 수 있는 전부였다. 종이도, 이름도, 의미 모를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편안했다. 익숙했다. 안락하고 만족스러웠다.

 

–전화하니까 좋네. 잘자.

 

꿈결처럼 들려온 메이의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2.

 

[……아크라가스의 고결한 보물이며 고전 시의 마지막 수호자라 불리는 엠페도클레스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네 가지 원소를 섞어 만든 고정적이고 일관된 원리라 주장했어. 이는 흙을 구워 돌을 쌓아 거룩한 신의 터전을 만드는 행위와 흡사한데, 이 요소들을 얽는 힘—마치 벽돌 사이에 바르는 석회와 같은—이 바로 사랑의 필로테스와 불화의 네이코스야. 이 둘은 달이 차고 이지러지는 것처럼 끊임없이 원의 중심점을 맴돌고, 따라서 완전무결하고 영속 불변해야 할 세계가 항시 바뀌고 있다 믿었던 거야. 완벽한 정량의 우주와 그걸 움직이는 사랑의 변칙. 굉장히 낭만적이지 않아? 나는 이게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순정을 낭송하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에 눈물을 흘렸던 중세 프랑스의 방랑 시인들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생각해. 이들이 읊조린 노래는 당시 무료한 궁정 귀족들의 한낱 유흥거리만으로 치부되었지만, 트루바두르는 트루베르가 되고 대륙의 소매를 건너 펜을 든 요먼이 되고, 마침내 말로우와 에이번의 음유시인이 되어 영원히 역사에 남게 되었어. 비로소 사랑은 불멸의 진리가 된 거야. 그들은 알았을까? 자신을 폄훼하는 수많은 적을 이겨내고 거룩한 서약을 맹세하는 것이 곧 우주의 법칙을 숭배하는 성가였다는 것을? 하늘을 향해 매일 밤 아스트롤라베를 들었던 천문학자와 다름없는 숭고한 여정이었다는 것을? 사랑을 속삭이는 입술은 오직 진실을 위한 순례였다는 것을? 나에게 있어 이건 마치,]

 

 

 

“이게 뭐예요?”

 

미유키는 저와 종이 사이에 불쑥 들어온 얼굴을 옆으로 밀어냈다.

 

“왔으면 왔다고 티를 내야 할 거 아니냐.”

“이름 불렀다고요. 저어기, 저쪽에서부터.”

 

쭉 뻗은 팔이 과장된 몸짓으로 운동장 반대편을 가리키지 않았다 해도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미유키는 의미 없을 말다툼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들고 있던 종이 다발을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는 손길에 후배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사와무라.”

“넵.”

“그……,”

 

운을 떼었으나 말을 마치지는 않았다. “아니다,” 제법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다 생각했는데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제 앞으로 달려와 고개를 들이민다. 미유키의 분위기가 평소와 사뭇 다르다는 걸 감지한 눈동자가 필요 이상으로 반짝거렸다.

 

“답지 않게 왜 말을 끊어요? 할 말 있으면 해요. 괜히 사람 궁금하게 하지 말고.”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오늘도 종일 날카롭던데요.”

“내가?”

“네. 그러니까 방금 한 소리 들은 거잖아요.”

“……진짜냐.”

 

여기서 말하는 ‘한 소리’는 감독님도, 코치님도, 하물며 매니저도 아닌 후배 투수에게서였다. 이놈 말고 다른 놈. 평소에는 세상만사 자기 알 바 아니라는 듯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도 귀찮아하면서, 이런 데에서만 묘하게 까탈스러운 그놈. 공 한 번 놓쳤다고 설마 아직도 많이 아픈 거냐 따져 묻는데, 답지 않게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팀원 전부의 주의를 단숨에 끌었던 것이다. 결국 체육관을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걸어 나오며 등에 꽂혔던 다수의 시선이 아직껏 명치께에 머무르는 듯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뭐해. 연습 안 해?”

“하여간,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요? 사람이 걱정돼서 뛰어왔구만…….”

 

흐려지는 말끝에서 묻어나오는 염려를 놓치기란 힘들었다. 미유키는 다소 신경질적인 손동작으로 욱신거리는 뒤통수를 문질렀다.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제일 예상치 못한 이의 입에서 나오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었다. 그리고 이 눈치 없는 놈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일면식 없는 사람도 알 수 있을 만큼 티 내고 다녔다는 뜻이다. 그러니 후루야도 그렇게 말했던 거겠지. 이제는 과한 염려라고 느낄 뿐이지만.

 

“그거 때문이죠? 편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미유키의 고개가 사와무라 쪽으로 홱 돌았다.

 

“누가!”

“쿠라모치 선배요.”

“그 자식이!”

“그렇지만 뭐, 미유키한테 무슨 일 있냐고 먼저 물어본 건 나였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내가 봤거든요. 사물함에서.”

 

쓸데없는 소리만 한가득 지껄이던 악우를 찾아가 한바탕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당황스러움으로 가득했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고 대신 경악에 찬 표정이 들어앉았다.

 

“……뭐?”

 

 

 

 

 

사와무라의 두서없고 어수선한 설명을 종합해보자면—정말이지, 이 자식의 언어 능력은 앵무새가 비웃고도 남을 정도다—정황은 다음과 같다.

 

아직 해도 제대로 뜨지 않은 이른 아침, 올바른 투수의 책임과 역할에 고뇌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던 미래의 에이스는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으며 심신의 단련을 위해 러닝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운동장에 누군가가 있었고, 그 누군가는 사와무라가 알고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각, 그 자리에 있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라 이름을 외치며 전력 질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치열한 사투가 한참 이어지고 나서야 사와무라는 그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게 목숨을 건 라이벌 학교의 에이스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몇 년간 수많은 서적을 읽으며 갈고닦아왔던 실력을 활용해 영국의 명탐정이 울고 갈 만치 날카로운 추궁을 했다.

 

그리고 들은 게 편지의 존재. 미유키에게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선 돌아서는 그는,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나 나오는 세기의 적수와도 같은 모습으로,

 

 

 

 

 

“……목숨은 왜 걸어?”

 

사와무라는 설명을 멈추고 보란 듯이 두 주먹을 쥐었다.

 

“이기지 않으면 죽음뿐! 배수진을 친 자세로 임하는 게 바로 에이스의 마음가짐 아니겠습니까!”

“너 배수진이 뭔지는 아냐.”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의 후배를 무시하고 미유키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기지 않으면 지는 거지 죽긴 왜 죽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미유키는 공만 잘 받지 낭만이 없다니까요, 낭만이.”

“죽는 게 낭만이야? 난 살아서 공 받으련다.”

“아, 진짜. 애써 전해줬는데 고맙다는 말도 없습니까? 그래서, 연락은 해봤고요?”

 

하지만 미유키는 도무지 사와무라에게 고마워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굳이 뭔가를 표현해야 한다면 질책이 가장 적합할 테다. 메이와 언제부터 그리 잘 아는 사이였다고 얼굴 마주치니 따라가고, 평소에 뭐 그렇게 말 잘 듣는 놈이라고 시키는 대로 냉큼 하는 것인지.

 

그러고 보니.

 

“그래. 그거 좀 이상하다.”

 

미유키는 주춤 뒤로 물러서는 사와무라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메이가 전해달라고 한 거면 그냥 나한테 건네주면 되지 뭐하러 사물함에 넣었냐.”

“질문이 뭐 그래요. 보통 그렇게들 하잖아요?”

 

생각해 보면 수상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미유키는 공교롭게도 메이에 관해 제법 잘 아는 편이다. 자의가 반, 타의가 반이었으나 구차한 변명을 해보자면 나루미야 메이란 사람과 연이 닿은 이상 그를 조금만 아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가끔 그놈의 야구 실력을 파헤쳐 내려가면 결국 극단적인 자아 표출을 위한 욕구 중 한 갈래가 아닐까 생각될 만큼.

 

그런 놈이 사전 언질 없이 몰래 미유키의 생활 반경 안에 들어온다고? 주중에, 새벽 연습을 빠지면서까지? 그러고서는 앞뒤 설명 없이 무턱대고 이런 내용의 편지를 맡기고 사라진다? 남에게—그것도 시합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을 빼면 전혀 면식 없는 사와무라에게 부탁까지 해가면서?

 

아니. 미유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간청과는 거리가 먼 놈이 하나, 고분고분함과는 더욱더 거리가 먼 놈이 또 하나다. 이걸 전해달라고 메이가 먼저 얘기를 꺼냈을 리도, 받고선 알았다며 사와무라가 흔쾌히 승낙했을 리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갈수록 안절부절못하는 눈앞의 모습을 보니 뒤가 켕기는 것만은 확실했다. 미유키는 어느새 도망갈 곳 없이 벽과 자신 사이에 갇힌 사와무라를 의기양양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보통 뭘 어떻게들 하는데?”

“…….”

“응? 거짓말은 아무나 하는 줄 알아?”

“…….”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걸, 사와무라. 대답에 따라 단순히 공을 받아주고 말고 정도의 사안이 아니라는 것, 너도 알고 있지?”

“……그게.”

 

그리고 띄엄띄엄, 하지만 점점 큰 열성을 담아 나온 설명은 미유키의 청각을 의심하게 했다.

 

그러니까, 메이가 찾아온 건 사실이란다. 다만 새벽이 아니라 야심한 밤중이었고, 장소도 운동장이 아닌 교문 앞이었다고 한다 (그 시각에 거기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추궁하는 건 나중의 과제로 넘기기로 하자). 그마저도 사와무라의 일방적인 훔쳐보기였다는 것이다. 수상쩍은 인영이 몇십 분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 곳만 뚫어지라 노려보는데, 미동도 없이 그렇게 쳐다보기만 하다 돌아서서 사라지는 걸 보고 영 미심쩍어 그 자리에 가보았고, 거기에서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발견한 것이라고.

 

“바닥? 그러니까, 사물함 앞에?”

“네.”

“구겨져 있었어?”

“아니요. 이렇게, 세로로 접혀서 반듯이 놓여 있었는데.”

“사와무라.”

 

넵! 우렁차게 대답하는 후배는 조금 전과 다르게 매우 협조적인 태도였다.

 

“봤냐.”

“…….”

“읽었냐고.”

 

커다란 눈동자가 왼쪽으로 한번, 다시 오른쪽으로 한번, 그러더니 중심을 잃기라도 한 듯 이리저리 떨린다. 미유키는 주머니에 구겨 넣었던 종이를 꺼내 사와무라의 면전에서 흔들어 보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는 해줄게.”

“하지만! 정말로 미유키 건 줄 몰랐단 말입니다!”

 

어련하시겠냐. 국어사전을 통째로 베낀 듯 있는 말 없는 말 이러쿵저러쿵 지껄여 놓았으면서, 글쓴이의 정체는 마지막에 한 번 나오는 것이 다였다. 시작부터 뒤 페이지를 볼 리는 없으니, 그걸 찾아냈다는 건 꽤나 정독을 했다는 뜻이다.

 

“너 진짜…….”

“잠시! 잠깐! 용서해준다면서요!”

 

다급하게 두 팔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하는 후배를 보니 화를 내지도 못하겠다. 애초에 이놈을 두고 제대로 화낸 적이 있기라도 했었나. 미유키는 한발 물러서서 손을 저었다. 거짓말이고 뭐고, 이 장황한 열한 장 분량의 글을—그렇다, 두 번째 편지는 자그마치 네 장이 늘어서 왔다—한밤중에 읽으며 골머리를 썩였을 단세포를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굳이 왜 넣어 놓았는데?”

“누가 지나가다 밟으면 어떡해요. 미유키가 언제 볼지도 모르는데.”

 

한층 누그러진 말투라는 걸 깨닫고선 사와무라의 얼굴이 활짝 피어올랐다. 얄밉게 이럴 땐 눈치 빠르지…… 끌끌 혀를 차며 돌아서는 미유키의 뒤에서 사와무라는 완전히 원기를 회복한 것 같았다.

 

“하여튼 그 자식도 하필이면 왜 사물함이야.”

“말하자면 허를 찌르는 거죠.”

“얼씨구.”

“가장 예상하지 못한 자신의 공간에!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나타난 초대!”

“잘 논다…….”

“일생을 건 진검승부! 이를테면 장갑을 던지는 것처럼! 상대의 가장 약한 부분을!”

“뭐?”

 

빙글 돌아서다가 하마터면 정면으로 부딪칠 뻔했다. 급하게 뒤로 물러서는 사와무라를 개의치 않고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추궁을 했다.

 

“너 이게 뭐라고 생각하는데?”

“네? 뭐긴요.”

 

어깨를 쭉 편 사와무라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조용한 기숙사 복도를 따라 울려 퍼졌다.

 

“도전장이잖아요.”

 

이나시로 에이스가. 세이도 주장한테. 대략 먼 하늘을 향해 한 번, 그리고 자신의 가슴팍 위에서 한 번 까닥거리는 손가락이 그렇게 한심해 보인 적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어떻게 하긴. 감독님까지 옆에서 보고 있는데 쉬어야지. 어쩔 수 없잖아.”

 

푸하하, 커다랗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전해졌다.

 

–임자 만났네. 솔직히 처음이지 않아? 투수가 너한테 대놓고 뭐라고 하는 건.

 

미유키는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이 아닌 이놈에게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투수라는 사실을 가장 자주 상기시키는 게 대관절 누구라고 생각하는 건지.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의 대부분이 명령조라는 건 자각 못 하는 건지.

 

웃을 때마다 검푸른 밤하늘 위로 하얀 입김이 퍼져 시야를 가렸다 흩어졌다. 미유키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폐 안에 한가득 차오르는 공기는 잔디에 방울방울 내려앉은 밤이슬만큼이나 청량하고 서늘했다. 날씨가 눈에 띄게 추워지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이마를 타고 땀이 주룩주룩 흐르던 늦여름 장마철의 열기도, 어스름한 저녁쯤에나 불어오던 서늘한 가을바람도 없고 이제 조깅할 때마저 옷을 겹겹이 챙겨 입어야 하는 계절이었다. 세월은 무척이나 빠르게 흘렀다. 이렇게 폰을 귀에 대고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할 때면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만 같은데 말이다.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늘 느끼는 건데 넌 애들한테 너무 물러.

“하하. 그런가?”

–걔네가 뭘 하든 맨날 하하거리기나 하고. 그러니까 다들 만만하게 보잖아.

“안 그래. 그리고 그렇다 해도 난 딱히 상관없는데.”

–나한텐 있어.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미유키는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서 어두운 전경 너머로 깜박이는 불빛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발밑에서 푸스럭거리는 잔디가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듯했다. 쿵, 쿵, 가슴을 두드리는 울림이 먹먹할 정도로 고막을 채웠다.

 

–카즈야?

“아. 응.”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황급히 현실로 돌아왔다. 흘러내린 핸드폰을 고쳐 쥐며 서늘한 감각이 번지는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식은땀이 흥건했다. 미유키는 헛기침을 하며 어깨에 걸치고만 있던 점퍼를 주섬주섬 입었다. 소매에 꿰어 넣는 팔이 서투르게 미끄러지는 건 단지 추위 때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바깥이야?

“응.”

–어디?

 

잠시, 아주 잠시지만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기숙사 뒤. 알아서 뭐 하게. 오게?”

 

순전히 오기로 던진 질문이었다. 다분한 장난과 약간의 고의를 섞어서.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을 당황하게 했던 데에 대한 소심한 복수. 하지만 거기에 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미유키는 느닷없이 묵직하게 깔린 정적 속에서 숨까지 죽였다.

 

–갈까?

 

그때 들었던 목소리는 단연코 미유키가 생전 처음 듣는 이의 것이라 맹세할 수 있다. 적어도 그가 아는 메이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것. 미유키는 급히 옆에 내려놓았던 배트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부러 부산스러운 태도로 배팅 장갑의 벨크로를 떼어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늦었다. 들어가 볼게.”

–카즈야.

“내일은 할 거면 좀 일찍 전화해. 아니면 아예 새벽 연습 전에 하든가.”

 

추우니까.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구차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대신에 안녕, 뭐 이런 수준의 무미건조한 인사를 던지고 대충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에 빠지기까지 몇 번이고 그 질문을 던진 걸 후회하게 되었다.

 

 

 

 

 

3.

 

[……어제는 해가 뜨지 않는 날이었어. 그래서 하루가 아주 길었는데, 이런 날이면 어렴풋하게만 이해하던 시간의 상대성을 피부로 느끼게 돼.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지식 추구를 향한 전지구적 노력으로 인류가 옛 시대의 신념에서 해방된 지 삼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 밀레투스의 수학자는 다가오는 일식을 예고함으로 여섯 해 동안 이어졌던 전쟁에 종전부를 찍었고, 18세기를 구현한 계몽사상의 논증법을 통해 역사는 전승이 아닌 사학으로 부활했으며, 만년필과 관측기구의 혁명은 태양을 마침내 불멸의 저주에서 끊을 수 있었어. 과학자들이 예고하고, 시인들이 절망하고, 인류가 두려워하는 태양의 최후는 오십억 년 후에 올 수소의 부재가 아닌 섬머셋셔의 가난한 법조인의 아들이 주장했던 인식론의 변화로 이루어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낭만의 종말은 아니거든. 아이들은 아직도 플로렌스의 수식을 따라 성탄절의 전날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지 못해. 태양은 여전히 노예제도의 헛된 허상에 빠진 농장주가 자신의 진정한 기원지를 깨닫는 순간 부르짖을 신의 이름이 되고, 서양 철학의 아버지가 선언했듯 옳음의 이데아로 변이해 포박당한 죄수들에게 진리를 일깨워줄 기회가 되어. 이는 이글거리는 사막 해의 아래에서 태어나 흰 파도 거품과 뜨거운 모래를 밟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레지스탕스 작가에게도 같아서, 시지프의 고통은 단지 거짓일 뿐이고 인간은 신 없이 신성함을 열망할 자격이 있는 강인한 존재라 증명해 보였어. 난 이걸 세속의 발칙한 반란이라 일컫고 싶어. 더 높은 개체를 투영하지 않고도 일출을 향해 진정으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독립적 존재로 승화한 거야.]

 

 

 

미유키의 아침을 시작하는 건 언제나 같았다.

 

어두운 시야. 서서히 깨어나는 오감. 안대를 벗기도 전에 들려오는 룸메이트의 낮은 부스럭거림. 오래된 나무의 눅눅한 향내와 창문이 열리고 닫히는 울림. 문을 열면 코로 들어오는 알싸한 새벽 공기. 잔잔한 웅성거림. 발걸음.

 

모두 미유키가 끔찍이 사랑하는 것들이었다.

 

익숙한 일상은 가족이자 동료였다. 학교이지만 집이며, 동시에 일생의 모든 것을 건 장소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미유키의 아침은 핸드폰의 진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잠에 취한 눈 위로 들이닥치는 인위적인 푸른 빛으로. 그건 예고 없는 침입이었다. 계속되는 우연이었고 허락하지 않은 선물이었다. 반면에 약속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날아와 창가에 뿌리를 내린 꽃씨와 같았다. 눈을 뜨기도 전에 머리맡을 더듬는 손길은 어쩔 수 없는 반사작용이라 애써 변명해보지만, 실로는 미유키 자신마저도 믿지 않았다.

 

액정 화면 위, 이제는 젖은 흙빛과 낡은 가죽의 냄새만큼이나 익숙한 번호. 그걸 훑는 시선에는 인정하기 싫지만 가득한 기대. 자연스럽게 귀로 가져가는 손길은 아무리 부정하고 싶더라도 완벽한 패배. 가슴께를 가득 채우는 건 두근거리는 마음.

 

 

 

[너는? 너에게 있어 해가 뜨지 않는다는 건 무슨 의미야?]

 

 

 

그렇게 간단했던 문제는 더 이상 간단하지 않게 되었다.

 

 

 

 

 

“그게 뭐냐.”

 

미유키는 머리를 싸매고 내려다보던 종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스스럼없는 손이 다가와 맨 위에 놓인 한 장을 가져간다. 윗줄부터 아랫줄까지 한 치의 틈을 남기지 않고 빼곡히 적힌 글을 읽어내려가는 쿠라모치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이 사라졌다.

 

“……숙제?”

“숙제겠냐.”

 

쥐어짜 내듯 답하자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에 깨달음이 서리고, 다시 질린 얼굴로 변한다.

 

“아직도야? 너네도 참 징그럽게 꾸준하다.”

 

일방적으로 수신인이 되어야 하는 입장에서 「너네」라는 집단이 성립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꾸준하다는 건 인정한다. 징그럽다는 것도 인정. 미유키는 숨을 크게 내쉬며 종이를 아무렇게나 옆으로 밀어놓았다.

 

메이에게서 처음 편지를 받고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까지 미유키의 손에 들어온 서신은 총 일곱. 따로 규칙이 있는 것 같지는 않으나 대략 나흘에 한 번꼴로 받은 것이 된다. 두어 번 오고 말 줄 알았더니, 예상을 뒤엎고 꾸준히 이어진 덕분에 미유키는 한 달에 한 번 들를까 말까 했었던 동관 구석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기웃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사와무라가 말한 ‘한밤중’이 대강 어느 시각 즈음인지도 파악하게 되었는데, 이걸 깨닫고선 기함을 토했었다.

 

새벽 두 시.

 

일부러 깨어있으려던 건 아니다. 원체 잠귀가 밝은 체질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날따라 이것저것 일이 많아 방에 늦게 돌아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생각이 쏟아져 쉽게 잠들지 못했었다. 천장만 멀뚱히 바라보다 산책이나 하지 싶어 밖으로 나갔는데, 왜 발길이 학교로 자연스럽게 향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고요했던 밤이었다. 며칠째 휘몰아치던 한파가 가라앉아 한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였다. 바람도 구름도 없어 휘영청 뜬 달은 보름을 며칠 앞두고 유달리 새하얀 빛을 교정에 뿌리고 있었다. 흡사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했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운동장에 한 발짝 들어섰을 때, 동관의 문을 나서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날 당직을 서는 선생님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바지런히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쪽을 향해 다가오던 인영이 이쪽을 보고 우뚝 멈추어 섰을 때, 미유키는 엄습하는 우연과 같은 무엇을 느꼈다. 어느새 발길을 돌려 멀리 사라져 가는 인물을 쫓는 건 포기하고, 서둘러 사물함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목격했다. 사물함 안의 점퍼 위에 반듯하게 놓인, 아직 체온이 닿아 따스한 편지를.

 

별도 뜨지 않은 새벽에 지하철이 다닐 리 없으니 뛰거나 자전거를 탔을 터였다. 이게 제정신으로 벌인 일인 건가? 그것도 한창 자라나는 나이의 운동선수가 귀중한 밤잠을 포기하면서? 미유키는 지금이라도 당장 바깥으로 뛰쳐나가 따라가 볼까 고민했다. 잡아서 잔소리라도 하게.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 건 불현듯 떠오른 가설 때문이었다. 만약 이 편지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면. 만에 하나 의도를 잘못 파악한 것이라면. 아니, 애초에 메이가 쓴 글이 아니라면. 어딘가 오해가 있었다면.

 

장난이라면.

 

“장난은 무슨…… 또 이상한 생각하지.”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미유키는 쿠라모치를 원망 실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생각을 소리 내 말했다는 게 민망해서는 아니다. 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 고백이니 뭐니, 이상한 바람을 불어넣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이놈이었으니까. 물론 이 안에 사랑 타령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말 이게 다인 걸까? 보통 탁 터놓고 「좋아한다」 한 마디 정도는 써놓지 않나. 아무리 산만하기 그지없는 작문 실력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갈겨놓을 수 있냐 말이다. 이래서야 사와무라의 말대로 도전장이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뭐? 도전장?”

 

이번에는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멀어진 정신을 붙잡았다. “그놈도 참 불쌍하다,” “어떻게 너 같은 놈한테 걸려서,” “취향도 별론데 팔자도 험해,” 누구 욕을 하는 건지 모를 쿠라모치는 말과 말 사이로 숨이 넘어갈 듯한 웃음을 토하고 있었다.

 

“그래, 어떻게 보면 도전장일 수도 있겠네.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쓴 건 매한가지일 테니.”

“이건 내가 아니라 사와무라가,”

“사와무라가 뭐? 그놈이야 어차피 이상한 말만 했을 거 아니냐.”

“그게 무슨 뜻이야?”

 

미유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만 묻자.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원하는 게 중요해? 난 지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는 입장이거든?”

“그러면, 넌 이 편지가 멈추길 원해?”

 

이번에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쿠라모치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용히 노려보기만 하는 미유키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만약 멈추길 바랐다면 하지 말라고 진작 말했겠지. 하지만 넌 한 달 동안 그러지 않았어. 마찬가지로 나루미야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고 싶은 거면 본인에게 바로 물어봤을 거야. 그러나 역시 그러지 않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아예 아무 관심도 없었던 거면 간단히 편지를 구겨 버렸겠지. 이렇게 고민거리라며 나한테 털어놓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이것도 아니잖아.”

 

이게 영화였다면 필시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스릴러였을 테다. 영문 모를 편지를 받는 주인공. 보내는 이는 중학교 때부터 왕래해왔던 친구. 갖은 미사여구와 시적 비유와 문헌 참조를 넣었으면서 정작 이야기를 나눌 때는 평소와 전혀 변함없는 태도. 사실 이것은 어떠한 커다란 각본의 하나이고, 자신은 이곳에 던져진 불쌍한 영혼이 아닐까, 의문이 계속 드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넌 계속 나루미야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하는데, 나한테는 네가 뭘 원하는지가 더 모호해.”

 

왜 비난을 받고 있다는 기분이 든 건지 모른다. 분명 그러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지만 억울해 죽을 심경이었다. 미유키는 고개를 돌려 창 바깥을 내다보았다. 기말고사가 가까워 대체로 한산한 운동장에는 점심시간을 빌어 풋풋한 연애 라이프를 즐기는 커플이 두엇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영문 모를 울화가 더욱더 치밀었다.

 

“쿠라모치.”

 

비장한 투로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 전체에 배신을 당한 것만 같은 심정이 되었다.

 

“네가 물론…… 그렇게 말한다 해도 난 할 말이 없어. 그렇지만 못 믿는 걸 어떡해. 장문의 글이지만 뭐 하나 이거다 정의해주는 건 없고, 의미를 예측할 수 있을 만큼 명백한 단서를 주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이걸 메이가 썼다는 게 믿기지도 않아. 평소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 성격 아닌 거, 너도 알잖아. 나는 모르겠어. 모두 다 이상해. 적어도 내가 아는 메이는,”

“나루미야는?”

“…….”

“달라?”

 

미유키는 이 대화가 흘러가는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적지가 어딘지 뻔히 알면서도 유도하는 곳으로 끌려가는 토끼몰이에 던져진 느낌. 그건 아마 쿠라모치의 질문에 대한 답을 미유키 본인마저 자각하는 시점에서 너무도 당연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종착지가 하나뿐인 결말. 다만 이건 업보이기도 했는데, 알면서도 피해온 것들은 더욱 벼린 칼날이 되어 필연적으로 도망자의 앞에 벼락처럼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제 무덤을 판 것이다.

 

“너. 그놈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직접 물어보지 않냐.”

 

이렇게.

 

 

 

 

 

–오늘따라 조용하네. 무슨 일 있어?

 

하늘은 맑고 바람은 잔잔했다.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찬 서리 기운이 바짓단과 발목의 틈을 타 스며들었다. 그 외에는 평범한 12월의 초입이었다. 차라리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았을 것이다. 날씨의 변화는 둘의 즐겨 나누는 대화거리 중 하나였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마음이 편할 것 같지 않았다.

 

미유키는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두컴컴한 동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응.

“…….”

–…….

“……됐다. 아무것도 아니야.”

 

말을 끊자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미유키는 오늘 내내 머릿속에 품었던 단어를 소리 없이 곱씹어 보았다. 친구. 둘의 관계를 가장 보편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표현. 하지만 미유키에게는 어색했다. 메이는 미유키의 주위에 있는 다른 이들과 비교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뭐냐. 웬일로 안 캐묻네.”

–캐물어 줬으면 좋겠어?

 

정말로 그리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미유키는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역시 그러했다. 딱히 꺼낼 이야기가 없다기보다는, 이런 때는 차라리 전화를 끊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싶은……

 

아니, 미유키는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우리는 친구가 맞느냐,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라면 어떤 관계인지. 과연 답은 있는지. 마음의 고민을 털어놓을 방법은 어디에서 배우는 것인지. 혼자서 끌어안지 않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지혜롭게 난관을 헤쳐나가는 법은 존재하는지. 그리도 좋아하는 과거의 철학자와 과학자와 연구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과연 알고 있는지.

 

“어떻게 했어? 불안했을 때.”

 

전화 너머가 한동안 조용했다. 미유키는 긴장으로 굳은 입술을 혀로 축였다. 툭 던진 질문은 짧지만 메이라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는 것이었다. 가을 대회 이후부터 마음을 떠나지 않는 무게. 누구나 다 알지만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모르는 척하는 그것. 이걸 말로 꺼내는 것만으로 몸속의 피가 바짝 마르는 듯했다. 불안감을 구체화하는 과정은 그것이 주는 두려움보다 훨씬 더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존재 자체를 인정함으로 도리어 헤어나올 수 없는 모순에 빠질까 공포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미유키는 문득,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는 게 완전히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고 싶은 걸 생각했어.

 

메이의 목소리는 미유키의 어깨에 내려앉는 밤공기만큼이나 깨끗하고 잔잔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생각하고 그걸 하라고, 그렇게들 말하는데 사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이거든. 너도 알잖아. 우린 언제나 이런 각오로 하루를 살아가니까. 그리고 바로 그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다 일상이 깨져버린 거니까.

 

귀를 기울이는 건 쉬웠다. 단어의 중간중간마다 들리는 옅은 숨소리에도 쓸데없는 상념이 들지 않았다. 메이가 서술하는 건 곧 미유키의 경험이기도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속내를 밝힐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곧장 메이의 얼굴이 떠올랐었다. 패자와 승자가 엄밀히 갈리는데, 당면한 벽의 성질 자체가 다른데, 그런데도 미유키가 손을 내미는 사람은 결국 메이가 되었다.

 

어떻게 해서 항상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걸까. 미유키는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 말고, 하고 싶은 걸 떠올렸어. 꼭 보고 싶었던 광경이 있었는지, 꼭 하고 싶었던 말은 없었는지, 정말로 바라던 게 있었는데 무시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그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게 깨끗한 마운드를 보고 싶다는 거였어. 남이 만들어준 것 말고, 내 손으로 직접 가꾼 마운드.

“평소에도 네 손으로 하지 그래?”

–넌 말하는 게 왜 매번 그 모양이냐? 그리고 원래도 내가 하거든?!

 

발끈하는 반응을 듣자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린다. 미유키는 전화 반대편에서 분해하고 있을 메이의 표정을 떠올리며 실없이 웃었다.

 

–원하는 게 알고 보니 내 컨트롤 바깥이라는 생각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현실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노력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되새기며 살아가야 하니까. 하루하루 주어진 결과에만 순응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전부 운명론자들일 뿐이야. 그런 건 지금 같은 상황에 도움이 안 돼. 다들 몰라도 너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 거 아니냐.

 

이번 일로 미유키가 깨달았던 사실이 있다.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부상을 떠안고 살아가지는 못할 거라는 것. 불투명한 미래와 발목을 잡는 과거 속에 갇혀 허우적대도 주위 사람들은 어제와 다름없이 그대로였다. 자신의 하늘은 무너지고 땅은 꺼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는 동쪽에서 떴고 발소리는 연습장을 향했다. 눈을 뜨면 보이는 천장은 익숙한 회색이고, 시계가 가리키는 곳은 언제나 다섯 시 반—오직 달라진 하나는 미유키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이 하룻밤 아침에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미유키를 서서히 잠식해 갔다.

 

–나도 별거 아니라는 거 아는데, 일부러 더 사소한 것부터 시작했어. 오버워크 생각 안 하고 좀 더 뛰기, 밤에 몰래 나와서 마음 가는 대로 던져보기, 그런 거 있잖아. 이때까지 욕심이라고 생각해서 당연히 하지 않았던 것들 말이야. 또는 덜 중요하다고 넘겨버리고 미루었던 것들이라거나. 그렇게 하고 싶은 걸 하나씩, 하나씩 하다 보니 정말 우습게도 다시 일상이 시작되더라고. 절대 예전으로는 못 돌아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나는 나였고 세상은 변함없었던 거야.

 

발밑이 푹 꺼지는 감각은 합숙 때마다 지겹게 느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온종일, 매초 흉부를 압박하는 옅은 통증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지난 한 달, 미유키는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육체의 고통보다, 정신을 압박하는 재활보다 더 자신을 옥죄는 것은 레이 선생님의 한 마디였었다. 미유키는 마운드를 정리하는 메이를 상상해 보았다. 그런 패배를 겪고 무슨 생각을 마지막으로 잠들었을까. 바로 다음 날 어떤 기분으로, 또 무슨 표정으로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었을까. 마운드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행복했을까.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그의 옆에 다른 누가 있었을까.

 

–그때 깨달았어. 내 세계는 나의 생각보다 훨씬 더 견고하다는 것.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쌓아왔던 작은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 내가 해야만 한다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일상은, 너무나도 독창적이고 유일한 방식으로 나를 대변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나 자신을 피나는 노력으로 지켜 왔기 때문에, 공을 한 번 잘못 던지고, 또는 잘못 받고, 이런 실수 하나로 허무하게 무너져내리지 않아. 내가 내린 모든 오답과 그릇된 판단도 내 일부분이라는 거, 그걸 알고 나니 더는 불안하지 않게 되었어.

 

조곤조곤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문득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편지를 쓴 사람이 메이라는 것을. 둘은 절대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확신했었는데, 아무리 이름 석 자가 쓰여 있다 해도 미유키가 아는 그 메이는 아닐 것으로 마음속 어딘가에서 굳게 믿고 있었는데, 지금, 바로 지금, 구름의 틈으로 새벽이 흐르는 12월의 감청 빛 하늘 아래에서 둘은 마침내 하나의 인물이 되었다.

 

–카즈야.

 

어느새 동녘에서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건 뭐야?

 

 

 

 

 

「친구잖아. 설마 이것도 아니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면서? 고등학교를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요인이 될 정도로. 2학년 때 그놈 컨디션 저조한 것도 바로 알았고, 세세한 버릇이나 호불호도 알고.」

 

계단의 난간에 앉아 지평선 위로 차오르는 아침 해의 찬란한 테두리를 바라보면서, 미유키는 쿠라모치가 한바탕 늘어놓았던 잔소리를 곱씹어 보았다. 오래전 차갑게 식어버린 폰은 점퍼 주머니 속에서 거북한 무게를 남겼다. 통화는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중 반은 메이의 이야기를 듣는 데에, 반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썼다.

 

「냉정하게 말해보자. 어느 날 뜬금없이 편지 하나가 네 친구의 이름을 달고 도착했어. 내용은 허무맹랑하고 목적도 불분명하고—아, 이건 네가 네 입으로 직접 한 말이야—그럴만한 이유도 없는데 직접 배달되어 와. 그것도 새벽 두 시에, 학교 사물함이라는 수단을 써서까지. 그런데 입도 뻥긋 안 하시겠다?」

 

쿠라모치의 말이 모두 옳다고 할 순 없으나 확실히 맞는 것 하나는 있었다. 친구의 이름이 쓰인 편지였다면 미유키가 지금처럼 행동할 리 없다. 아무리 혼자 끙끙 싸매는 구제 불능이라지만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양쪽에게 옳은 일인지 정도는 알았다.

 

「너는 지금 현실 도피 중인 거야. 이게 무슨 뜻이든 그게 뭔 상관이야. 정체 모를 편지가 왔으면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먼저잖아. 왜 뜸을 들여? 빤히 받아놓고, 쉬는 시간, 점심시간 마다하지 않고 종일 그 종이 쪼가리만 들여다보고 있으면서 왜 진실을 밝히려 하지는 않아? 못하는 거야, 안 하는 거야? 애초에 이 둘의 차이는 있는 거야?」

 

물어보려 한 적은 있었다. 다만 세상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누군가 미유키를 찾기도 하고, 전화 반대편에서 메이를 부르기도 했다. 버스가 출발하거나 지하철이 도착하기도 했다. 아는 사람들이 몰려오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지나갔다. 갑자기 비가 오기도 하고, 바람이 불기도 했으며, 해가 지기도 했다.

 

「지금 나에게 했던 모든 말들, 그대로 걔한테 가서 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인 거. 너도 알고 있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복되는 일상은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이어졌고 늘 같은 하루의 시작은 늘 같은 하루의 끝으로 종결을 맞이했다. 그 안에서 벌어졌던 일 하나하나는 매우 작았고 그 파장 또한 미미했다. 인생에는 항상 다음의 버스와 다음의 지하철이 존재했다. 누군가가 불러도 양해를 구했으면 될 것이었고, 전화를 끊겠다는 메이는 미유키의 말 한 마디였으면 틀림없이 마음을 바꾸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언제든 물어볼 수 있었다. 언제나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미유키는 할 수 없었다.

 

 

 

 

 

 

4.

 

[‘그의 눈에는 오직 사랑의 빛,’ 트라키아의 성스러운 사제가 부르는 노래에서 귀를 떼지 못해 매일 밤 검푸른 바다에 뛰어들었던 청년을 위한 찬가는 이렇게 시작해. ‘사랑은 늘 새로워서,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준다,’ 라고. 나는 예정된 미래에 굴하지 않고 그들의 섬을 가르는 해협과 거친 사투를 벌였던 연인처럼, 헛된 그리움의 열병을 앓아. 그건 아무리 괴로워도 치료를 원하지 않는 마음이고, 눈을 통해 들어오지만 혀끝으로 뱉지 않으면 심장을 갈기갈기 찢는 저주이며, 우리 안의 선하고 다정하고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것만을 모아 빚었으나 결국엔 소유자를 레브카스의 낭떠러지로 이끌어. 눈먼 사랑에 빠진 이들의 세계에는 높은 탑이 하나, 동편으로 난 창이 하나, 그리고 세찬 풍랑 속 창틀 위에 피운 위태로운 등불이 하나야. 용기란 언젠가부터 비극적 말로를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무모한 발길의 이름이 되었어. 내가 바라는 영원은 절대 이렇지 않아. 베른발의 죄수는 처절한 비명 속에 눈을 감았고, 아디제 강의 설익은 사랑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 끝나버렸으며, 헬레스폰토스를 걸어 들어간 무녀의 비명은 차가운 지중해의 바다 거품에 먹혀 결국 아무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거든. 그러니 나는 끝을 원하지 않고 시작도 갈구하지 않을게. 여름날 잠깐의 밀회를 위해 젖은 해변의 모래를 밟게 하지 않을게. 나의 가시철사 위에 담요를 올려줄 사람, 그를 향한 내 말이 깊고 깊은 대양 속에 불멸이 되는 저주로도 남지 않았으면 해. 소맷자락의 빛바랜 잉크 자국이 계절과 함께 옅어질 수 있기만을, 다만 간절히 바랄게.]

 

 

 

세월은 빠르게, 하지만 분명한 무게를 담은 채 흘러갔다. 사흘에 한 번 꼬박꼬박 사물함에 도착하던 편지가 새벽을 깨우는 전화를 동반하게 된 후, 다시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여기에 며칠이 더. 그리고 뚝 떨어진 기온 덕에 이슬마저 더는 맺히지 않게 된 완연한 12월의 금요일 밤 무렵이었을 것이다. 메이에게서 메일이 도착한 것이.

 

–내일 잠시 보자.

 

미유키는 액정을 내려다보며 눈만 깜박였다. 한동안은 그것과, 보낸 사람의 이름을 재확인하는 것과, 벽에 걸린 시계를 번갈아 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전후 사정 설명 없이 짤막한 건 둘째치고 지금 시각이 몇 신데. 내일은 토요일이라 오후 수업이 없으니 점심부터 만나자는 건가? 아니면 마음 편하게 저녁? 잠시는 정말로 잠깐이면 된다는 걸까, 또는 비유적인 표현인 걸까? 얼마나 오래 걸리는 일이지? 애초에 만나는 목적은 뭔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의 무리 어딘가에 「대체 왜」가 떠올랐을 때, 미유키는 이 사태의 중대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현재 미유키가 마주 보고 앉은 책상 위에는 바로 오늘 아침 수거한 편지가 놓여 있다. 이제껏 받아왔던 다른 서신들에 비해 눈에 띄게 휘갈긴 글씨에, 너저분하게 줄을 그어 지운 자국이 가득한. 내용마저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뇌에 야구 생각밖에 없는 운동선수라고 하지만 미유키도 글의 분위기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종일 찜찜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런 걸 새벽에 가져다 놓고선,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만나자고 하다니.

 

요즘 미유키에게 있어 메이의 편지들은—그리고 편지 속의 메이는—한쪽 홈이 맞지 않아 비뚜름히 돌출된 나사쯤으로 자리잡아 있었다. 신경 쓰이고 걸리적거리며 자칫하면 손을 벨 수도 있지만, 깊은 홈 안에 꼭 맞물려 있기에 주위 벽을 깎지 않고선 빼낼 수도 없는 불청객 같은 존재. 전화 너머의 메이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편지 속의 메이에게 골머리를 썩이는 괴리감으로 가득한 삶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거로 믿은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란 것이 있지 않나. 물론 그동안 이것에 대해 마주할 수많은 기회가 있었고, 한 달의 시간은 절대 짧다고 할 수도 없지만……

 

미유키는 그제야 자신의 대처가 매우 안일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이 있을까. 미유키는 이미 손 쓸 도리 없이 늦었다는 절망적인 마음의 외침을 무시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제일 간단한 건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고 만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었다. 메이는 대외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미유키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고, 따라서 얼마나 강한 의지를 동반해 피하든 간에 평생 마주치지 않고 사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내일 무턱대고 나가면? 이것이야말로 결과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미유키는 당장 내일 메이를 대면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지금은 밤 열 시를 조금 넘긴 시각. 늦긴 했지만 새벽 한중간인 것도 아니니 메이에게 전화해서 무슨 일이냐 물어보기 알맞은 타이밍이었다. 메이라면 분명 이해할 것이다. 설령 벌써 잠자리에 들었다 해도 미유키가 급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 흔쾌히 승낙할 것이었다. 메이는 그랬으니까. 적어도 이번 한 달간 미유키와 대화를 나누었던 메이는, 미유키를 거절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미유키는 초조하게 숨을 들이쉬며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핸드폰을 감싸 잡았다. 경직된 손가락이 오밀조밀 늘어선 자판 위를 배회하며 키를 두드렸다 지우고, 단어를 완성했다 삭제하기를 반복했다. 중간에 몇 번 통화 버튼을 누를까 고민했던 것도 같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흐른 기분이었다. 똑딱똑딱, 들릴 리 없는 초침 소리가 귀 언저리에서 맴도는 듯했다.

 

한참 후, 미유키는 자신에게 가능한 단 하나의 답을 보냈다.

 

–그래.

 

 

 

 

 

이 세상의 우연은 오류의 집합체라는 말이 있다.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미유키는 생각한다. 자잘한 흠집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표면 위에 드러나고야 마는 필수 불가결의 현상. 완벽한 세계에서 이론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겠으나, 희박한 확률을 뚫고 언젠가는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부산물들. 이걸 실감하게 하는 요인은 미유키의 삶에서 많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예측 가능한 연산 안에서 추구했다. 인생의 전환점은 충분한 사전 숙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애초에 그리 복잡할 것도 없었다. 부 활동 특기생 전형으로 기숙사에 사는 고등학생의 세상은 매우 좁을 수밖에 없다. 야구, 팀원, 경기의 승패, 수업, 시험, 그날그날의 연습과 식단과 일과—단조로운 인간관계와 그보다 더 단출한 일상과 이 모두를 한 데 묶는 편협한 관심사 속에서 미유키에게 허락된 일탈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사랑. 그래, 말이 좋아 사랑이지 감정놀음이나 마찬가지다. 이게 머리를 썩일 고민거리가 되어야 할 이유는 시작부터 없었다. 믿고 안 믿고, 그런 뜬구름 잡는 철학적인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열여덟의 미유키에게는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끌리는 것과 그 호감을 구체적인 욕구로 바꾸어 실천하는 노력은 발상 자체부터 판이해서, 첫 번째 경우가 현실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꼭 두 번째로 이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쉽게 말해 미유키는 연애를 할 마음이 없었다. 시간과 여유도 없고, 의지도, 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데 사랑이며 고백이며,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 말이다.

 

물론 이런 생각의 흐름에 메이가 고려된 적은 없다.

 

당연히 안다고 생각했던 친구였다. 낱낱이 나열할 순 없으나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 팀도, 포지션도 다르고 성격마저 정반대지만 그걸 극복할 연결고리가 있다고 믿었다. 아마 초반에 친해지게 된 계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에게도 굉장히 재밌었던 경기가 상대에게도 그만큼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걸 알았을 때, 말로 꺼내진 않았지만 무척 즐거웠던 것 같다. 스스럼없이 이름을 요구하던 아이. 대뜸 자신을 불러세우더니 이제껏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들을 격앙된 목소리로 묻던 아이. 붉은 해가 서산 뒤로 넘어갈 때까지 좋아하는 이야기를 잔뜩 하며 그 커다란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아이.

 

솔직히 말하자면 힘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타인을 삶의 일부분으로 들이는 건 두 손으로 잡기에도 버거웠던 야구공의 무게에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오직 미유키 혼자만의 선택이었다면 절대 가까워지지 않았을 인연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모든 부정적 가능성을 가볍게 건너뛰고, 소년은 어느덧 미유키가 친구라 부를만한 어떤 것이 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만 몇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친구가 예상하지 못했던 말들로 채운 편지를 들고 다시금 미유키를 찾아온 것이다.

 

「내 생각보다 훨씬 견고한 세계.」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지? 메이와 그때 가졌던 대화는 미유키에게 실로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남았다. 찰나의 판단 미스로 평생의 커리어가 한 방에 끝날 수 있는 직업이었다. 단련하고 또 단련해도 인간의 몸뚱아리는 약해 빠졌다는 걸 매초 실감하는데, 이젠 그걸 뛰어넘어 세계마저 견고하단다. 미유키는 부상의 심각성을 익히 알았다. 운동선수에게 언젠가 한 번씩은 일어나는 부작용 같은 것이기에 전치 3주 진단을 받고서도 심란했을지언정 놀랍지는 않았다. 오히려 계산 밖이었던 것은 그러고 나서 겪은 심리 변화였다. 괜찮을 것을 알면서도 커져만 가는 불안은 당초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압박감이어서, 만약 기한이 없는 증상이었다면 어떤 심경이었을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신이 몸담은 곳이 얼마나 위태한 세상인지 절감한 때였다. 야구에는 늘 진심이라 생각했었고, 기꺼이 선택한 미래의 지독함은 익히 알고 있다 믿어 왔었는데, 현실은 그걸 가뿐히 초과해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의 경험이 얼마만큼 빈약한지 샅샅이 까발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서웠는데, 인정하기 싫지만 처음으로 미지의 공포라는 걸 맛보고 번민에 빠졌는데, 전화의 반대편에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 이가 있다. 그는 사흘에 한 번씩 장문의 편지를 통해 기약 없는 사랑의 맹세를 속삭이고, 새벽이 밝아오기 전의 고요한 공기를 틈타 어제 하루 있었던 일을 가만가만 이야기한다. 미유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같은 고통을 겪었으며, 어떤 것이 모자라고 또 과한지 말로 꺼내지 않아도 안다.

 

다시 오류로 돌아가 보자—퇴근하는 인파와 주말을 일찌감치 즐기러 나온 이들로 한창 붐비는 토요일 저녁의 거리, 미유키는 시내 구석의 작은 카페 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미유키가 알지도 못하는 갖가지 시인의 이름을 휘갈겨놓은 편지 속의 소년은 이 카페 구석의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서 주머니에 넣는 손은 다급하지도, 의식적으로 느리지도 않았다. 담담하고 예사로웠으며 아름답기까지 했다. 미유키는 거기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저 손가락으로 번호를 눌렀을 것이다. 종이를 고르고 펜을 들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처럼 인상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고심하느라 어두운 창밖을 보면서.

 

이건 사물함에서 처음 편지를 발견했던 초겨울 늦은 오후의 기시감과 동일했다. 거기까지 미유키를 이끈 건 당시에는 별 의미 없이 작위적으로 고른 선택지였겠으나 결국 지난 한 달간 미유키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동안 메이는 오로지 종이의 거친 촉감과 핸드폰의 차가운 온도를 통해서만 다가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유키에게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진심을 고백하자면, 끝을 바라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고난의 길에 누군가가 함께한다 느꼈다.

 

그래서 도망쳤다. 웅성거리는 가게 안의 인파를 뚫고 왔던 길을 내달렸다. 미친 사람처럼.

 

 

 

 

 

5.

 

“실연당한 사람치고는 괜찮아 보이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쿠라모치는 아니나 다를까 즐거워 죽겠다는 듯 히죽히죽 웃는 얼굴이다.

 

“너까지 상대해줄 기력 없어. 그리고 실연 안 당했고.”

 

“이거 웃기는 놈일세. 온종일 핸드폰만 바라보면서 죽을상인데 실연당한 거 맞지, 뭘.”

 

미유키는 남의 방에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들락거리면서 당당하게 침대에 걸터앉기까지 하는 뻔뻔한 놈을 있는 힘껏 쏘아보았다. 그러나 조금 후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분명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대꾸할 가치가 없다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발끈해서 되받아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정말 그렇게 나오게?”

 

미유키는 못 들은 척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스코어북에 다시 시선을 고정했다.

 

“진짜냐. 와, 이 자식 고집불통이네.”

“…….”

“평소엔 설렁거리면서 이상한 데에서 자존심 세우더라.”

“…….”

“물론 원래도 그런 줄은 알았다만. 하여튼 그놈도 멀쩡하게 생겨서는 왜 사서 고생인 줄 모르겠다니까.”

“대체 너도 사와무라도, 언제부터 그렇게 메이를 잘 알았다고……!”

 

또다시 발끈해 휙 뒤돌아보았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생각 없이 던진 말이 무슨 뜻으로 들릴 수 있는지 그제야 깨달아서. 그러나 이걸 놓칠 쿠라모치가 아니었다. 미유키에게서 끌어낸 반응이 만족스러웠던 건지 의기양양 지어 보이는 미소가 여간 얄미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는 그놈 모르는데. 넌 잘 알고.”

 

여유만만하다 못해 이제 미유키의 침대 위가 자기 텃밭이라도 되는 마냥 길게 드러눕는다. 미유키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느닷없이 사와무라가 자기 방에 쳐들어와 횡설수설하다 간 것이 겨우 어젯밤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놈. 심지어 이 둘이 다인 것도 아니었다. 메이를 만나러 시내로 나갔다가 도망치듯 뛰어 돌아왔던 지난 토요일의 저녁 이후, 매일 밤 누군가 한 명씩은 방에 찾아와 미유키의 눈치를 보다 돌아갔다. 그러니까 일요일에는 조노, 월요일에는 후루야…… 짜고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으나 도움 안 되는 놈들만 번갈아 가며 찾아와 신경을 긁는데,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찾아올 사람은 대충 다 찾아온 듯하고, 결정적으로 내일부터 합숙이었으니 이 말도 안 되는 시련도 오늘로 끝이 아닐까.

 

“그래. 합숙. 너 말 잘했다.”

 

아, 진짜. 이 정도면 뭐 하나 생각할 때마다 혀를 깨물어야 할 수준이다. 미유키는 비로소 모든 회피의 시도를 포기하고 의자를 돌려 쿠라모치를 마주 보았다. 이놈은 사와무라도 아니고 조노는 더더욱 아니었다. 입 꾹 다물고 무시한다고 돌아갈 만큼 단순하지 않으니 제대로 상대해주고 납득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합숙이 왜?”

“바로 내일부터지.”

“그렇지.”

“…….”

“…….”

“정말 안 볼 생각이야? 평생?!”

 

……물론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진 않지만. 표면의 느긋함도 던져버리고 진심으로 갑갑해 죽겠다는 얼굴의 쿠라모치를 보니 살살 구슬려 돌려보내는 것마저 없었던 일로 해야 할 듯싶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을 걱정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긴 했다. 얼핏 보기엔 껄렁하고, 온갖 안 그런 척은 다 하고 다니지만 누구보다 주위 사람을 아끼고 챙기는 데에 열심인 팀메이트였다. 한 마디로 오지랖 넓은 놈.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도 열성을 다해 신경 써주는 건 고맙지만, 가끔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만 많은 놈.

 

“그냥 없던 일로 하겠다고?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놓고 입 싹 닫아버리겠다는 거야? 아니면 해결하는 건 전부 내년으로 미루겠다거나? 설마 진심으로 그럴 생각은 아니겠지. 네가 앞뒤 꽉 막힌 고집불통이긴 해도 비정한 쓰레기까지는 아니니까.”

 

그런 박애에 넘치는 친우가, 할 수만 있다면 가슴까지 땅땅 내려칠 기세로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미유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타협할 만한 사항이 아니었다.

 

“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잠깐. 지금 잘못 말한 것 같은데.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게 아니고?”

 

얼빠진 얼굴이 제법 볼만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면 아마 쿠라모치에게 멱살을 잡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나 한심해 보이든, 경멸당하든 세상에는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었다. 미유키는 약속대로 그곳까지 갔고, 가게 문을 열었다. 자신의 한계가 과연 어디까지인지 온몸으로 겪고 돌아왔었다.

 

“네가 뭐라 그러든 결과를 바꿀 순 없어.”

 

고집스럽게 한 말만을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쿠라모치의 눈치를 살피는 이유는 여기까지 찾아와준 것도, 이제껏 편지에 관해 상담을 해준 것도 고마운 일이긴 했으니까. 애초에 쿠라모치가 자신에게 해준 조언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마주하기에는 미유키에게는 잃을 것이 너무 많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일어설 줄 알았던 쿠라모치는 정작 아무 말도 없이, 신중해 마지않는 눈빛으로 미유키를 응시할 뿐이었다.

 

“만약 시작을 바꿀 수 있다면?”

 

한참 후 나온 말을 듣고, 이번에는 미유키가 얼빠진 얼굴을 할 차례였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이때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무효로 돌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

 

미유키는 인상을 썼다. 쿠라모치가 지금 하는 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장난을 치는 거라면 받아주는 것도 한도가 있었고, 의미 없을 가설을 토론하자는 거면 시간 낭비라는 걸 상기해주고 싶었다.

 

“그게 가능할 리 없잖아.”

“그러니까 ‘만약’이라는 거야.”

“그 ‘만약’을 내가 왜 고려해야 하는데. 너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쓸데없는 말장난은 그만두자고 할 참이었다.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응수하며 삐딱하게 쿠라모치를 바라보던 미유키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져 갔다.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한 번도 없어?”

 

미유키는 내내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천천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처음 이 난리가 시작되고부터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았던, 형태를 잡지 못한 께름칙한 감각이 구체적인 모양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부상도 없고, 고민도 없이 명랑한 평소의 미유키였다면 아마 어렵지 않게 골라냈을 얼룩들이었다. 만약 메이의 편지가 조금이라도 덜 현란했더라면, 그래서 겉에 드러나는 잔가지 따위에 현혹되지 않고 그 기저에 깔린 특이점을 볼 수 있었더라면 금방 알아냈을 것들이었다.

 

“나루미야가 너에게 편지를 주러 우리 학교까지 왔어. 그리고 그나마 익숙할 필드 너머의 기숙사가 아닌, 한 번도 와본 적 없을 교내 건물의 사물함을 굳이 선택해. 그런데 새벽 두 시에 도착한 사물함 앞에 우연히 사와무라가 있는 거야. 결국 그놈이 몰래 엿보는 가운데 절절한 진심이 담긴 편지를 아무렇게나 끼워놓아서 바닥에 떨어뜨린다? 이게 앞뒤가 맞는 전개라고 생각해?”

 

때때로 시끄럽고 부산스러운 면모가 있다 해도 덜렁거리진 않는다. 얼핏 무모하게 행동하는 듯 보여도 치밀하게 계획하고 매사에 임하는 성정이었다. 적어도 미유키가 아는 메이는 그러했다. 누구보다 솔직하고 적극적이며, 항상 마음의 모든 자리를 사용해 다가가기에 미유키가 아닌 누구였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편지를 전달할 리 없었다.

 

미유키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한심해 죽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쿠라모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

 

 

 

 

 

[간단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해볼까 해.]

 

 

 

결론은 이러하다.

 

때는 갑작스레 찾아온 그해의 첫눈이 도쿄 시 전체를 소복이 뒤덮은 동지 밤. 23일의 자정을 코앞에 둔, 평범한 고등학생에게는 터무니없이 야심한 시각. 미유키는 기숙사에서부터 역까지의 전력 질주로 인해 터질 듯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서쪽을 향해 달리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연말의 막차란 한 해의 회포를 풀고 느지막하게 귀가하는 이들로 인해 가득 붐비기 마련이었다. 새된 호흡이 닿는 차가운 유리 위로 뽀얀 김이 서렸다 사라지고 그 너머로 일렁이는 심야의 불빛이 황홀한 잔상을 그렸다. 크리스마스와 신년을 앞둔 도시는 언제나 들뜬 축제의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이제껏 동떨어진 감각이라 생각해 왔었는데, 계속 미루기만 했던 감정의 매듭을 짓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지금 미유키는 이게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누가 지고, 또 이기고 같은 평면적인 문제가 아니야.]

 

 

 

사건의 실마리는 의외로 간단히 풀렸다. 쿠라모치와의 대화 중 제 발 저린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들어온 사와무라가 술술 전말을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잠이 오지 않아 책상 앞에 앉았는데 창밖에 수상한 인영이 있어 살금살금 나가 보았고, 거기에서 목격한 것이 그 문제의 나루미야 메이였다는 것이다.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선 기숙사 옆의 언덕에 서 있는데, 다가오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은 채 한참을 한 곳만 바라보다 휙 돌아서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가 보았다고 한다. 그러다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던 메이의 일기장을 찾았던 것이라고. 결국 이걸 어떻게 할 것이냐로 팀 전체가 식당에 모여 한바탕 토론을 벌였고, 사와무라의 강력한 의견 표명으로—그리고 다른 팀원들의 상대적인 관심 부족으로—메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닌 미유키에게 넘기기로 결정이 내려졌다고 한다. 「대체 이게 내 이야기인 줄은 어떻게 알았는데?」 물으니 사와무라와 쿠라모치가 동시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더 캐묻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알고 저는 모르는 무엇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 하루 분량씩 곱게 뜯어내 사물함에 넣는 정성은 료상의 아이디어. 미유키는 여기까지 듣고 나서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런 장기적 계략을 세운 것인지 따지려던 마음을 고이 접기로 했다.

 

 

 

[무엇을 얻었고, 또 잃었나, 그런 결과론적인 고찰도 아니야. 나는 졌지만 그건 내가 나였기 때문에 일어난 어쩔 수 없는 결과였어. 여기에 후회는 없어.]

 

 

 

그래, 일기였다. 저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아무 바라는 말이 없었던 것은 어떤 특정 대상을 향해 쓴 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미유키의 마음을 떠보거나, 의미 없는 계산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라서도, 풀면 어떠한 포상이 있는 과제이기 때문도 더더욱 아니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장까지, 그 위에 있는 글자와 그게 뜻하는 모두는 그저 메이의 거짓없는 진심일 뿐이었다. 그 조그마한 머리통 안에 있었던 생각들. 미유키가 한 달 동안 파악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던 그것.

 

 

 

[하지만 네게 연락하지 않은 건 나의 선택이었어. 내가 후회하는 건 이거야. 카즈야, 나는 네가 힘들 때 너와 함께할 의무가 있었어. 왜냐하면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전부 동원해 생각해 보아도, 아무리 궁리하고 또 머리를 짜내 되돌아보아도, 그때 내가 원하는 건 너를 만나는 것, 단 하나였거든.]

 

 

 

지난 한 달 동안 미유키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짧게나마 응원석에 앉아 저 없이 돌아가는 세상을 관찰한 이후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변화를 겪었다. 가을의 플레이를 돌아보고, 봄을 바라보며 팀을 재정비하고, 덤으로 삶의 목적과 자아를 성찰하는 시간까지 가지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전국 진출을 앞두고 활기에 찬 동료들 사이에서 덩달아 들뜨기도 했고, 기말고사로 근심에 빠진 반 친구들과 함께 고통스러워하기도 했으며, 항시 마음의 부채를 안고 있었던 선배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가졌다. 숨을 쉬는 것마저 거북했던 상처는 이제 꾹 눌러야만 희미하게 존재감이 느껴지는 흔적으로 아물었다. 불안함에 잠들지 못하는 밤도 사라져 갔다. 그리고 이 모든 곳에는 메이가 있었다. 전화로, 메일로, 글로, 미유키의 오늘과 내일에 잔잔히 다가와 기쁨과 불안을 기꺼이 함께해 주었다.

 

 

 

[어때.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당연하지 않아?]

 

 

 

사와무라가 건넨 마지막 종이 다발은 재미있게도 책의 일부분이 아니라 맨 뒤 페이지에 끼워져 있었던 낱장이라고 한다. 그때 기숙사까지 찾아온 메이가 무슨 생각으로 이것을 들고 왔는지 미유키로서는 알 수 없다. 왜 기껏 가져온 것을 몽땅 버리고 돌아갔는지도. 아예 처음부터 그럴 계획으로, 단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었던 걸 수도 있다. 도착해 보니 겁을 먹었을 수도, 막상 전해주려니 막막했었을 수도 있다. 홧김에 저지르고 나니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건 불필요한 세부 사항일 뿐이라는 것이다.

 

메이가 왔었다. 미유키의 옆에.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품고, 당연한 질문의 간단한 답을 안고서. 미유키에게는 이것이 가장 소중했다. 다가가려 노력했던 진심은 비록 한 달의 시간차를 두었으나 둘의 마음속에 꼭 같은 모양으로 공존했다.

 

–메이.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목적지를 앞두고 미유키는 핸드폰을 꺼냈다. 자판 위를 배회하는 손은 망설임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아주 오래전에 해야 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여름날 마음의 틈에 날아든 작은 씨앗은, 어느새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커다란 나무로 자라 구깃구깃 접힌 종이가 기적처럼 미유키의 손에 들어왔던 그 겨울날 오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웹 공개하는 김에 뒤늦게 후기도 같이 올립니다. 변명을 해보자면 원래 진짜로 쓰려고 했는데 마감이 너무 급해져서... 이 정도면 나는 마감과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고찰해보지만 역시 마감이 없으면 사는 맛이 나지 않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이런 기회를 주신 새막님과 성공적으로 교환식을 치러 주신 멍뎅님 산사님 야구공님 칠칠님께 감사드려요.

 

이 밑도 끝도 개연성도 없는 연성은 메이와 단 1%도 싱크로율이 없는 러브레터를 받고 헷갈리는 미유키가 보고 싶다는 데에서 시작했습니다. 그게 구제할 수 없는 문학소년병에 걸린 메이를 보고 싶다는 욕구로 바뀌고 여기에 부상으로 심란한 미유키가 보고 싶다는 욕망이 얹히고 전화로 들리는 메이 목소리에 미유키가 홀딱 반했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더해지고...... 그러다 보니 이런 캐해석 가출해 산으로 올라간 내용이 탄생했습니다.

 

사실 메이의 편지(일기)를 쓰는 게 가장 재밌었어요.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썼는데 중2병 걸린 가상 세계의 메이도 진짜로 이렇게 쓰지 않을까 망상하면서 즐거웠답니다.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세계사라는데 다른 건 몰라도 편지의 내용만은 개연성 있지 않나요? 저 일기는 사실 중학교 때 처음 미유키를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하면서부터 썼고, 마지막의 절망에 가득 찬 내용은 추계 대회 예선 탈락 후라는 나름의 타임라인 설정이 있습니다. 이 편지들을 구상하면서 메이에게 사랑은 역시 고대 그리스의 이성주의보다는 낭만주의에 가까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낭만주의보다는 근대철학 이후 행동주의가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어쨌든 사랑이란 개념이 메이에게는 시련이 아니라 축복이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담아 썼습니다.

 

미유키의 부상 시점은 멍뎅님이 주신 아이디어예요. 이때 미유키의 심리가 어땠고, 어떻게 극복했을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커플링 연성이라기보단 캐릭터연구가 되어버렸지만요. 미유키가 원작에서 야구 한정 다소 완벽하게 그려지는 경향이 있지만 정말로 불안했을 것 같았거든요. 인간 관계상의 트러블은 고민은 할지언정 전혀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은데 직접적으로 야구를 하지 못하는 부상만은 절대 견딜 수 없어 하는 타입? 그런데도 성격상 아무에게도 고민을 말하지 않을 것 같아 사심을 가득 담아 메이를 붙여주고 싶었답니다. 아무도 모르지만 둘만이 이해하는 세계가 분명 있겠죠. 그리고 이럴 때의 미유키를 메이 아니면 누가 과연 잡아줄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요. 별거 아닌 건 티 내면서 진짜로 필요할 때는 아무 말 없이 옆에 가만히 있어주는 메이를 나름 표현하고 싶었답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제 취향만을 갈아 넣은 내용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저것 보고 싶은 것만 많아져서 산만하기 그지없는 내용이 되었지만요. 그리고 늦었지만 메이 생일 축하해... 미유키랑 평생 행복하게 오손도손 살아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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