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이미유 게스트북 <사계찬가>의 선입금 특전으로 발행했던 회지입니다.

* 청소년의 음주 장면(...)이 나옵니다.

 

 

 

 

 

맨 처음 입술과 입술이 마주 닿았을 때, 미유키는 한치도 틀림없이 메이가 예상한 그대로의 맛이라 겹친 살점 사이로 하마터면 바람 빠진 듯한 웃음을 흘릴 뻔했다.

 

입 안쪽의 말랑말랑한 피부와 가지런한 치아를 따라 맴도는 이온 음료의 싸구려 레몬 향과 철망 사이로 휙 불어와 코끝을 간지럽히는 어슴푸레한 산들바람의 내음.

 

미유키에게서는 그리운 향기가 났다.

 

입맞춤은—만약 두 입이 물리적으로 부딪히는 것만으로 이리 정의할 수 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 건 그다음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비로소 머리가 이해했을 때. 일순 고장 났던 사고 회로가 다시 돌아가면서 눈앞에 있는 것이 누구고 여기가 어디며 입술 위에 남은 미미한 온기가 누구에게서 전해진 것인지 깨달았을 때. 그때 한마디 했어야 했다. 소리 지르거나, 화내거나, 짜증 내거나, 비웃거나, 하여간 메이가 화났을 때 하는 여러 행동 중 하나. 무엇이든,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했어야 했다. 아니, 차라리 박차고 일어나 자리를 떴어야 했다. 이건 자유의지가 아니고, 이런 전개는 절대 생각해본 적 없으며, 나루미야 메이는 미유키 카즈야라는 인간이 여차하면 무기처럼 들이미는 가벼운 장난 따위에 넘어가지 않는다, 확실히 행동으로 보여줬어야 했다.

 

대신 다시 키스를 했다.

 

고개를 숙이고 멱살을 잡아 눈앞의 입술을 삼켰다. 벌린 입과 완벽하게 기운 두 얼굴의 각도와 솜털같이 부드러운 목 뒤의 살결을 어루만지는 검지와 중지의 그렇고, 그런. 다만 이번의 키스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졌고, 시끄럽게 웅웅거리던 귓가의 이명은 어느새 조용히 가라앉아 살점과 살점이 미끄러지는 소리만이 잠잠한 주위를 채웠다.

 

평생을 이어질 줄 알았던 입맞춤이 끝난 이유는 순전히 생존 본능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가 아닌 ‘지금 당장 숨을 쉬지 않으면 산소 부족으로 죽을 것 같아’라는 이성의 외침 때문에. 만약 메이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다면 끊지 않고 계속했을 테다. 다짜고짜 밀어붙인 몸을 절대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숨이 막힌다 해도, 덥고 자세가 불편하고 입술이 아프다 불평하더라도 잡은 손아귀에서 힘을 풀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이마 언저리에서 넘실거리는 갈색 곱슬머리 너머로 해가 지고, 서늘한 밤공기가 옷 사이로 들어와 소름을 남기고, 달도 구름 뒤로 지고 구름마저 걷히고 없어, 새까만 하늘을 빼곡히 덮은 새벽 별과 그 별이 쏟아내는 빛과 그 빛이 남긴 잔상마저 사라져 마침내 암흑만이 남을 때까지. 우주와 하늘의 모든 천체와 은하와 항성과 행성과 존재하는 전부가 태어났다 사라지고 길고 긴 순환 끝에 이 세상마저 기어코 무너질 때까지.

 

하지만 괜찮아. 메이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세계는 다시 태어나니까.

 

그게 메이의 기본적인 믿음이었다. 삶의 모든 면에 적용되는 신념의 디폴트값. 야구, 학업, 커리어, 미래, 기로, 선택, 그리고 카즈야. 이 모두는 고칠 수 있었고, 부러진 것은 합치면 되었으며, 그건 때때로 놀랍게 간단해 시선 한 줄기나 짧은 입술의 접촉 한 번으로 시작되고 또 끝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 입맞춤 이후의 이야기이다.

 

 

 

 

 

내 소매 위의 작은 심장

 

 

 

 

 

“뭐?”

–오늘 새벽 도착했어. 지금은 호텔.

 

메이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둘러보았다. 시계가 있을 리 없지. 아예 방에서 나와 거실도 한 바퀴 돌았다. 달력……도.

 

하는 수 없이 메이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어깨와 귀의 틈바구니에 끼우고 랩탑을 열었다.

 

“왜?”

–일이 있어서?

“네가 일본에 무슨 일이 있다고?”

–나 이래 봬도 일본인…… 진짜, 메이. 시비 거는 건 여전하네.

 

켜지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기기의 매끈한 표면을 초조하게 두드리며 메이는 드물게 집 정리의 필요성에 대한 고찰을 했다. 기회는 많았지만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 없다. 이사 온 지 석 달이 되어가는 집이었으나 황량한 공간은 테이프만 뜯고선 방치해 놓은 박스가 반,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박스가 반이었다.

 

이제까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건만.

 

“그래서. 만나 달라는 거야?”

–그 말이 듣고 싶은 거야?

“내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거 그만하지?”

–그래. 그렇다 치자.

“뭐?”

–만나고 싶다는 뜻이야.

 

지금만? 아니면 여태까지 계속? 그전에는? 그전의 전에는? 앞으로는? 지금부터 올 미래의 시간에는?

 

모두 메이가 묻고 싶었으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는 질문이었다.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언제나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잃게 했다. 이 세상 전부에게 드러내도 당당하겠지만 정작 한 사람 앞에서만은 소리로 되지 못하는 마음.

 

메이는 미간을 좁혔다. 밝아진 랩탑 화면의 모서리에 뜬 숫자를 보니 더욱 모를 일이었다. 이른 시각은 둘째 치더라도, 막바지이긴 하나 아직 시즌 중인 날짜.

 

“너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왜. 걱정이라도 해?

 

메이는 순간 억울함이 치솟았다.

 

왜 걱정을 안 하겠어, 왜.

 

 

 

 

 

“어라. 네가 여기 웬일이냐.”

 

그때도 무관심한 말투였었다.

 

미유키는 하얀 침대 시트가 깔린 새하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벽과 천장과 바닥과 안에 들어찬 가구 모두가 흰 방이었다. 손잡이와 바퀴는 차가운 크롬 색. 침대 머리맡의 지지대는 코팅이 벗겨진 메탈. 하얀 레일에 걸린 하얀 커튼이 역시나 하얀 창틀 위로 드리워 창 너머로 내리쬐는 늦은 오후의 햇볕을 가렸다.

 

물론 방의 색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메이의 눈에는 미유키만 들어왔으니까. 실실 웃는 얼굴에 거뭇한 흙먼지를 묻히고선 상체 한쪽을 어색하게 팔로 지탱한 꼴이 초라했다. 궁상맞고 한심했다. 볼품없었다.

 

메이는 성큼성큼 다가가 유니폼 밑단을 위로 확 들쳤다.

 

붉고, 파랗고, 검은색.

노란색, 초록색, 보라색.

 

완곡하게 부풀어 오른 상처를 따라 울긋불긋 다채로운 색깔의 무리가 피어나고 있었다. 오로지 메이에게만 허락되지 않은 풍경.

 

“표정 대단하네.”

“…….”

“걱정했어?”

“……하지 마.”

 

옷자락을 잡은 손 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웃지 마. 그렇게 말하지도 마.”

 

걱정했냐니. 메이는 서러웠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안 그래도 구겨진 표정이 더 울상이 되었다.

 

“뭘?”

“하지 말라고! 하여간 넌!”

 

다 상관없다는 투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금 이런 기분은 메이 혼자 느끼는 거라는 마냥. 무슨 불행이 어떤 모양으로 미유키에게 떨어진다 해도 메이에게는 알 권리가 없다는 것처럼. 단지 구경꾼뿐인 것처럼. 여기 있는 게 웬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것처럼.

 

메이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너무나도 싫었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는 말은 어차피 꺼내지 못할 말이었으나 그래도 억지로 삼키는 거라 여기고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때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정말로 진심인 말들이 가장 하고 싶지 않은 말들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심장 속에 고이기 시작한 때.

 

“메이,” 온화한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 “난 괜찮아,” 속삭이는 목소리. “별거 아니야.”

 

그러니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거다.

 

“너는! 어떻게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물론 할 수도 있었겠다만, 결승이 당장 코앞인데 어떻게 약점을 보여주겠냐.”

“나중에! 경기 다 끝나고! 그때 말하면 됐잖아!”

“그래. 그런데 건강한 넌 떨어지고 부상당한 난 올라갔잖아? 말하면 네가 더 자존심 상할 줄 알았지.”

“진짜 너란 자식은……,”

“내가 왜, 응? 나 오늘 좀 멋지지 않았어?”

 

안타에, 도루에, 역전까지 따내고. 성한 왼팔을 허우적거리며 조잘대더니니 환하게 웃는다. 꿈만 같은 미소였다. 메이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꿈. 그러니 세상 어떤 표현으로도 적절히 담을 수 없다. 동일한 경험이 있을 리 없다. 기억 속에서 생생한 단 한 순간을 빼고. 바라지 않았던 기적이 입술을 통해 실현되었던 낮과 밤의 경계선, 그 언젠가.

 

그러나 그때의 이야기를 다시 한 적은 없다.

 

그 키스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물론 아직도 하지 않는다.

 

키스에 관한 이야기. 그날. 그 저녁. 입맞춤이 끝나고 땅거미가 내려앉는 풀밭에 누워 말없이 서로의 손가락을 매만졌던 밤, 그 모두.

 

일부러 하지 않으려던 건 아니다. 다만 그때의 일을 꺼내려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우주의 섭리가 발현해 전심으로 이것이 일어나는 걸 막는 것만 같았다. 건널목의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뀐다든지. 전화가 울린다든지. 지나가다 만난 누군가가 짜증 나게도 아는 체를 한다든지. 하여간 목 뒤를 잡고 쓰러질 만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한 번씩 다 일어났고 그때마다 메이의 세상을 향한 신뢰도는 뚝뚝 잘려 나갔다. 아무래도 신은 근본부터 이 관계를 부정하는 게 아닐까, 의문이 들 정도로.

 

그런 이유에서다. ‘어째서 그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냐’라든가, ‘그러고선 갑자기 연락해서 만나자는 건 무슨 의도냐’라든가, ‘아무리 죽 쒔다지만 시즌 중에 왜 갑자기 일본이냐’같은 질문 대신 익숙한 뒷모습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두드린 것은.

 

“추워.”

“오랜만이야, 메이. 인사도 없어?”

“어떻게 나를 기다리게 할 수 있어?”

“아니, 기다린 건 나…… 많이 추워? 뭐 먹으러 갈까?”

 

미유키는 변한 게 없었다. 각진 안경 뒤 반짝이는 눈과 귓바퀴를 덮은 머리카락의 동그란 윤곽. 입가에 고인 은은한 미소는 도장으로 팠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체격이 더 커지고 아주 희미하게나마 보였던 앳된 소년의 선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긴 했다. 이마저도 메이의 빈약한 상상이 그려왔던 그대로라는 게 우스웠다.

 

“싫어. 배 안 고파.”

 

둥글게 접히는 눈꼬리는 여전히 묵직한 덩어리가 되어 메이의 가슴에 들어찼다.

 

“그러면,”

“목 안 말라. 안 심심해. 필요한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어. 아무것도 없어.”

 

되는대로 말하고 쌩쌩 불어오는 찬 바람을 피해 점퍼를 코끝까지 여미자 미유키가 큰 소리로 웃었다. 여전히 꿈만 같은 미소였다. 다만 이제는 허상도, 상상도, 과거도 아닌 현실이었다. 눈앞에 실존하는 형상. 지금 여기에.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7년 만이었다.

 

 

 

 

 

처음으로 술을 마신 밤, 메이는 눈꺼풀 뒤에서 별이 터지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책장에 꽂힌 책 중 하나가 그것은 초신성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 책에서는 또 사실 초신성은 수명이 다한 별이고, 수백, 수천억 개의 항성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밝은 빛을 내며, 남은 모든 것을 태우고 껍질만 남게 되어 결국 끝없는 심연의 공간이 될 운명이라 쓰여 있었다. 메이는 그때 깨달았다. 모든 걸 고칠 수는 없었다. 아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바꾸진 못했다. 감정을 느끼지 않는 법을 몰랐다. 보게 된 것을 보지 못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때는 지났다.

 

 

 

 

 

“뭐?”

 

조수석 쪽을 돌아보다 잡고 있던 운전대가 휙 돌았다.

 

“야, 방금 진짜로 저세상 가는 줄…… 앞 봐. 난 아직 보험금 타러 가기 싫거든?”

“무슨, 뭐라고? 다시 말해봐.”

“클러치 제발 살살 밟고. 토할 것 같아.”

“카즈야!”

 

아, 알았으니까 소리 좀. 손을 휘휘 내젓더니 제법 그럴싸하게 귀까지 틀어막는다.

 

“집 샀다고. 집.”

 

길 한복판에서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그러나 메이가 그러거나 말았거나 미유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라디오 채널을 바꾸느라 여념이 없었다.

 

“집이라니? 미쳤어?”

“그게 왜? 살 수도 있지.”

“네가 여기에 집을 왜 사. 미국은 어쩌고.”

 

그때 그 순간, 잠시라도 기대를 했다는 건 평생 인정하지 않을 거다.

 

“글쎄, 투자?”

“투자.”

 

메이는 멍하게 미유키의 말을 따라 했다. 어이가 없어 설익은 웃음이 터졌다. “투자. 네가.”

 

“나도 부동산 투자할 수 있지. 아까부터 정말 너무하네.”

“네 금전 감각으로? 너나 거짓말하지 마.”

“새삼 느끼는 거지만 넌 나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해.”

“그게 내 잘못이야? 여태껏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처럼 끝맺지 못한 말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시사 뉴스에 덮였다. 모르는 이들의 웅얼거림 속에서 숨 막히는 고요가 이어졌다. 기다란 손가락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철 지난 유행가. 클래식. 끈적한 재즈. 차근차근 건너뛴 미유키의 손이 멈춘 곳은 오래된 팝송이었다.

 

“그것 때문에 일본 들어온 거야?”

“뭐, 응.”

“계약서는.”

“오늘 아침에 사인했어.”

 

메이는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언제 가느냐 부러 묻지 않아도, 그러면 곧 돌아가겠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미유키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대화도, 거리도, 마음도. 둘 사이의 가장 중요한 것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 존재했다. 뱉지 않는 단어의 음각, 묻지 않는 질문의 공백, 좁혀지지 않는 공간의 의미, 그런 곳에.

 

차 안에는 한동안 잔잔한 통기타와 박자에 맞춰 창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보러 갈래?”

 

 

 

 

 

메이는 딱 한 번 미유키의 집—또는 방—에 간 적이 있다. 그때의 일은 평생 떨구지 못할 앙금처럼 남아 메이의 기억 한구석에 머물러 있다. 칙칙한 가구와 횡으로 길게 금이 간 문틀. 빛바랜 코너의 벽지. 전통 깊은 학교의 기숙사에서 으레 날 법한 눅눅하고 오래된 나무 냄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끝에 확연히 맴도는 미유키의 향기.

 

메이는 이 방과도 즉시 사랑에 빠졌다.

 

정말 구제 불능이라니까. 주섬주섬 기숙사를 빠져나가던 메이를 발견한 시라카와는 그렇게 말했었다. 미유키? 진심이야? 네가? 추궁하는 동료 앞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었다. 정작 메이 본인도 자신을 이해 못 했으니까.

 

–한심하든지, 아예 제대로 미치든지 하나만 해.

 

조언이라기엔 모질고 야유라기엔 가장 아픈 데를 직격으로 꽂는 말을 듣고도 기어코 야밤의 도주를 강행했더랬다. 차오르는 들숨마다 물씬 익은 벚꽃 향을, 내쉬는 날숨마다 헉헉대는 단 숨을 토해내며. 욱한 마음에 폭 좁은 삶의 넓이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반항도 저질렀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 사기. 이 일탈의 결과물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고선 어딘가로 휙 사라진 방 주인에 의해 좁은 기숙사 방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메이처럼. 차가운 표면을 따라 굴러떨어지는 물방울의 구불구불한 길마저도 메이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자.”

 

한참 후 돌아온 미유키는 두 손 가득 들고 있던 과자 봉지를 우르르 쏟아놓았다. 아무런 개성 없는 종류인 것을 보니 자판기를 싹 털어온 전리품인 듯했다. 메이는 그중 제일 먼저 눈에 띈 초콜릿 바를 집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봉지를 뜯고 달착지근한 내용물을 한입에 먹어 치우는 동안 미유키는 맞은편에 앉아 메이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이제 말 좀 하지?”

“뭘?”

“한밤중에 남의 기숙사에 쳐들어오고선 이유도 대지 않으시겠다?”

 

메이는 빈 포장지를 구겨 방 반대편의 휴지통 안으로 던져 넣었다.

 

“내가 너 찾아오는 데 꼭 이유가 있어야 돼?”

“……보통은 그렇지?”

“술 마시고 싶어서. 됐냐.”

“나랑? 술을?”

 

이번에는 맥주 캔으로 손을 뻗었다. 마개를 따서 하나를 미유키의 앞에 놓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너 원래 술 자주 마시냐?”

“아니. 처음인데?”

“뭐?”

 

미유키의 얼굴이 차마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술을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마셔보고 싶은 거고, 그걸 굳이 나랑 하겠다고 너네 팀 애들 놔두고 한밤중에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러더니 고개를 젖히고 웃기까지. 그것도 기숙사 전체가 다 깨어날 만큼 시끄러운 소리로. 아니, 그게. 꺽꺽대며 말을 더듬는 걸 보고 있자니 좋아하고 뭐고, 베개로 저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왜 하필이면 나냐. 세상에 나처럼 최악인 술친구가 어딨다고.”

 

눈물까지 맺힌 채로 한참을 웃던 미유키가 턱을 괴고 비스듬하게 바라본다. 메이는 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너 이외에 누가 있겠어. 흘러넘치려는 말을 쓰디쓴 액체와 함께 목구멍 안으로 넘겼다.

 

세상의 모든 문턱은 너와 처음 넘고 싶었으니까.

 

“코시엔 같은 거야.”

“……뭐?”

“그런 게 있어.”

 

 

 

 

 

메이의 첫 코시엔은 두근거리고, 가슴 벅차고, 꿈에 그려왔던 모든 것이었다. 카즈야는 없었지만.

 

온 힘을 다해, 모든 정신을 공 하나하나에 집중시켰다. 빠르게, 그러나 일정한 속도로 뛰는 심장의 박동이 명치 한가운데부터 손가락 끝까지 저릿하게 전해졌다. 코와 입으로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호흡마다 살아있는 걸 느꼈다. 한평생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물론 마지막도 아니었다. 졸업, 드래프트, 입단, 이 모두는 낭떠러지가 아닌 끝없이 이어진 길의 한 지점이었을 뿐이다. 인생의 가장 큰 승부처라 여겼던 순간들을 훌쩍 뛰어넘는 경기는 매해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돌이켜 보면 행복하기 그지없는 나날이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다 생각했었다.

 

어느 날 아침, 우연히 텔레비전을 켜기 전까지는.

 

우습게도 그 모습을 화면으로 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재밌는 일이었다.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떠올렸으면서 정작 경기를 볼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어울리지도 않는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고 덕지덕지 보호구로 가려진 인물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메이가 모를 리 없다. 지금 기분이 어떤지. 상태는 좋은지. 저 눈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마스크 밑의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간간이 까닥이는 손목이 무얼 뜻하는지.

 

그 경기에서 자이언츠는 메츠를 3-0으로 이겼다. 메츠는 9회 초 2루타를 허용, 한 명을 막고 다음을 걸어 보냈다. 그후 홈런이 나왔다. 싱커를 담장 너머로 날려버린 시원한 배팅. 그리고 9회 말.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완벽한 피칭으로 게임을 끝냈다. 4히트 셧아웃. 커리어 세 번째. 이 배터리로는 두 번째 완투승.

 

불끈 쥔 손이 허공을 가르고 홈 플레이트를 향했다. 마스크를 벗은 이는 활짝 웃었다. 입고 있는 유니폼보다 밝고, 내리쬐는 햇살보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메이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지붕이 높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받은 인상이었다. 도심에서 제법 먼 외곽이라 그런지 집과 집 사이에 여유가 있었다. 앞뜰을 두른 낮은 담장 사이로는 고만고만한 정원수가, 디딤돌 옆으로는 커다란 단풍나무가 드리워 집의 앞면과 대문을 가리고 있었다.

 

“들어와.”

 

깨끗하고 널찍한 현관에 들어서니 좌우로 길게 뻗은 복도가 나왔다. 메이는 오른쪽으로 돌았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묵은 나무가 거친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내부는 크기에 비해 굉장히 간단한 구조였다. 집의 동편 전체를 거실이 채우고 그 뒤로 방이 오밀조밀 늘어서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부엌이 크고 넓었다. 횡으로 놓인 원목 벤치와 조촐한 4인용 식탁. 빛바랜 미닫이문 너머의 역시나 닳아빠진 마룻바닥. 낡은 모서리를 떠받친 세월의 흔적이 만연한 기둥. 천정부터 바닥까지 가득 들어찬 건 오래된 향나무와 육송의 향기.

 

“마음에 들어?”

 

대들보의 빗살을 눈으로 좇던 메이는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카즈야치곤.”

“와, 아까부터 내 취급 진짜 별로……. 뭐가 제일 마음에 드는데?”

 

전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 향기와 공기와 분위기까지 다. 이 집의 주인까지 포함해서.

 

“글쎄. 우선 천장 높은 거 좋고.”

“그렇지?”

“응. 전통 가옥인데 깔끔한 편이고. 보수 잘 돼 있고. 넓고.”

 

정갈하게 깔린 다다미를 신발 코로 두드리며 제법 그럴듯한 칭찬을 하자 미유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런 집 찾느라 힘들었다, 집 산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작 계약서 받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하더라, 아이처럼 재잘재잘 늘어놓는 뒷모습이 메이의 혀뿌리에 아릿한 여운을 남겼다.

 

아마도 정겨움일 무엇이었다. 또는 그리움. 또는 애틋함.

 

“방이 좀 많지?”

“응? 아, 응.”

“이런 집에 살면 대체 이 많은 방을 어디에다 다 쓰는 걸까.”

 

메이는 어깨를 으쓱하고 턱짓으로 당장 눈앞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여긴 서재나…… 공부방?”

“오.”

 

앞장서서 가던 미유키가 의미 없는 추임새를 중얼거렸다.

 

“여기, 이거 하나 정도는 손님방으로 남겨도 좋을 거고. 맨 끝은 침실. 그리고 저건 아마 드레스룸. 욕실 옆이니까.”

“취향 고상한데?”

“비워두는 것보다야 낫잖아.”

“애초에 방 하나를 다 채울 만큼 옷이 있는 게 이상한 거야.”

“뭘 모르네, 카즈야. 네가 그러니까 인기가 없지.”

“……말하는 거 하며.”

 

복도를 느릿느릿 걷다가 나오는 문틀에 하나하나 손을 짚어가며, 아무 쓸모도 소용도 없을 대화를 이었다. 부질없다는 건 안다. 이런 허황된 거짓말에 속을 나이는 예전에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부여하고는 싶었다. 흉내 내는 것만으로 뱃속에 나비가 날아다니고 구름 위를 통통 튀어 다니는 기분이었으니, 만약 이게 진짜 상황이었다면 메이는 당장 이 자리에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턱 끝까지 차오른 행복을 숨기지 않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보란 듯이 만천하에 꺼내든 채로.

 

“정원 보여줄게.”

 

불쑥 다가온 손이 메이의 소매를 잡았다.

 

 

 

 

 

같이 살면 어떨까. 당연히 해본 적 있는 생각이다. 주거지를 마음대로 선택할 자유가 있는 어른이지만 헛된 기대를 품으며 즐거워할 정도로는 철부지일 시절에.

 

정확히 메이와 미유키가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팀도, 리그도 다르다는 걸 깨닫고 처음에는 얼마나 좌절했는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주위 사람깨나 괴롭히던 때였었다. 그게 어떻게 마음대로 되겠어요. 하물며 고등학교도 따로였는데. 도움도, 위로도 되지 않는 말을 지껄이는 후배를 기회 날 때마다 갈구면서도 아예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는 같은 팀이 되지 않을까.

 

지나가는 것처럼 던지는 넋두리에는 한심하다는 조소만이 돌아왔었다. 그러나 메이는 이 부분에 한해서 무한대에 가까운 자신감이 있었다. 비단 머리가 움직이기 전에 손과 발부터 나가는 반응형 운동선수라서가 아니다. 일종의 믿음이었다. 모든 것은 고칠 수 있었고, 부러진 것은 합치면 되었으며, 그것은 종종 굉장히 우발적이라 이럴싸한 전조도, 예고도 없이 발밑에 툭 떨어진 선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노을빛을 받으며 나눈 키스가 그러했다. 낡은 기숙사 방에서 보낸 밤이 그러했다. 이슬 맺힌 풀에 뺨을 묻고 도란도란 나눈 이야기가 그러했다. 가장 예상치 못한 때에 찾아오는 미소가 그러했다. 나지막한 목소리도,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한 손길도 그러했다. 미유키가 그러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자만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눈을 떴을 때 맨 처음 보는 광경이 누군가의 등이 될 거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졸업 후 사는 도시가 달라졌어도, 비록 곁에 있진 못하더라도, 절대, 필시, 평생 자신의 것이라 확신해 왔었다. 소년은 어른이 되고 어른은 메이가 모르는 어른이 되어 그 주위에 역시나 메이가 모르는 여러 어른들이 나타나고 사라지길 반복했건만 한 번도 달리 생각한 적 없다. 언젠가는. 항상 믿었다. 언젠가는, 꼭.

 

그리고 온 세상이 단풍으로 붉게 물든 어느 가을날,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뉴스가 터졌다.

 

미유키 카즈야, 메이저리그 진출 선언.

 

메이의 첫 일본시리즈 경기를 앞둔 날 아침이었다.

 

 

 

 

 

집도 넓었지만 정원은 더 넓었다. 메이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집 뒤편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바깥을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몄다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정경이었다. 조형도, 장식도 없고 이렇다 할 공간의 분할도 없었다. 무성한 잔디밭 사이로 드문드문 자란 투박한 풀꽃과 그 가장자리를 따라 두서없이 늘어선 크고 작은 나무가 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아늑했다.

 

단풍 진 벚나무. 노란 이파리가 무성한 계수나무. 동그란 흰 꽃의 차나무와 흐드러지는 주황빛 꽃잎으로 덮인 금목서. 계절에 맞게 앙상해진 매실나무의 뒤로 바람에 나부끼는 가시나무와 편백 잎사귀. 한창 무르익은 모과나무의 열매에서는 그윽한 향기. 그늘진 구석에는 소담하게 꽃눈을 피운 동백나무.

 

“아직도 추워?”

 

그리고 새하얀 달빛 아래 반짝이는 별을 담은 눈동자.

 

“카즈야.”

“응?”

“손은 괜찮아?”

 

 그 보석 같은 두 눈이 고스란히 메이를 향했다.

 

“언제부터 알았어?”

“메츠 게임 때. 와일드카드 전.”

“그렇게 오래?”

 

어디선가 불어온 싸늘한 바람 줄기가 마른 잎을 잔디 위에 우수수 뿌렸다. 시선 구석에서 툇마루에 놓인 울퉁불퉁한 엄지가 꼼지락거리며 손바닥 밑으로 사라지는 걸 놓치지 않았다. 메이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퍼부을 것만 같았다.

 

“별거 아냐. 그냥 가끔 그래. 그날은 풀로 뛰어서 유독 심했던 거고.”

“…….”

“진짜야. 수술할 필요도 없다던데? 잘 쉬면 된대.”

“…….”

“왜 이렇게 조용해, 응? 말 안 해서 또 삐졌어? 용케도 알았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이 세상 누구보다 더. 하지 않은 이유는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의 무게는 무거웠고 그 대상은 옆에 없었기에. 당연히 제 것으로 생각했던 건 너무나도 손쉽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기에.

 

“내가,” 겨우 속삭일 수 있었다. “내가 모를 리 없잖아, 카즈야.”

 

그럴 리 없어도, 한눈에 보고 알아도 그걸 신경 쓰는 건 메이의 몫이 아니다. 상태를 살피는 것도, 치유를 권하는 것도,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일을 걱정하며 병원까지 가는 차의 운전대를 대신 잡는 것도. 메이에게 허락된 권리는 좀 더 수동적인 무엇이었다. 치기를 가장한 불시의 방문, 서랍에 고이 넣어둔 울리지 않는 전화, 그런 것 말이다.

 

메이는 울고 싶어졌다.

 

“걱정했어?”

 

문득 실감이 났다. 바로 옆에 앉은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미유키라는 것이. 7년 만에 마주한 얼굴은 오랜 친구처럼 편안하고 그리운 연정처럼 간절했다.

 

손과 손의 거리는 이제 검지 두 마디.

 

 

 

 

 

메이는 미유키와 키스하는 걸 머릿속으로 그려본 적이 있다. 물론 그 후로 실행에 옮긴 적 없으니 순전히 망상이었을 뿐이다. 다음이 있다면 그때는 꼭 귀를 만지고 싶었다. 처음 키스했을 때, 눈을 뜨자 보인 광경이 쏟아지는 석양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귓바퀴의 동그란 선이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 감각을 상상하면서는 자신의 귓불을 만져보았었다. 통통한 살점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 누르며, 어떤 두께일까, 얼마나 부드러울까, 입술 만큼이나 따뜻할까, 찬찬히 생각해 보았었다. 메이에게 주어진 건 늘 의문뿐이었다. 손을 잡으면 어떨까. 만약 데이트를 한다면. 땅거미가 지는 귀갓길을 공유한다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생각을 목소리로 낸다면. 그리고 그 마음이 공교롭게도 거울에 비춘 듯 꼭 같은 형상이라면.

 

굳이 미유키여야 했을 필요가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었고, 메이는 작은 것이라도 대충하는 일이 없었으니 미유키 외의 다른 사람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삶의 크고 작은 관문을 같이 넘을 이는 언제나, 어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사람이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시작은 이것이었다. 옆에 있건, 옆에 있지 않건 미유키는 메이에게 있어 한없이 먼 존재였다. 그 눈은 늘 메이의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그 발끝은 항시 만나지 않는 평행선을 걸었다.

 

메이는 그 거리가 싫었다. 덕아웃과 덕아웃의 거리. 그라운드와 관중석의 거리. 도쿄와 후쿠오카의 거리. 일본과 미국의 거리. 좁히고 싶었다. 어렸던 시절에는 18.44라는 웃기지도 않는 숫자에 집착했으나 결과적으로 둘 사이의 공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멀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유치한 투정 따위를 부린 적은 없다. 평생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 각오는 있었다. 다만 그 옆을 필연적으로 채우는 이들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건 견딜 수 없었다.

 

싫었다. 그 아무도 몰랐으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저 부서져 가는 몸뚱아리를 포수석에 던져놨으면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서로 부축하겠다고 나서는 세이도 유니폼을 입은 모두에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뒤통수를 바라보기만 해도, 꽁꽁 싸맨 마스크를 굳이 벗기지 않아도, 멀고 먼 그라운드에 쪼그려 앉은 이가 겨우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여도 알 수 있는데. 화면에 찰나 비친 영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허허벌판을 지나고 망망대해를 건너, 밟는 땅과 마시는 공기와 내리쬐는 햇살이 달라지고, 서로의 밤이 서로의 낮이 되어 시간마저 엇갈리고 더는 일상과 꿈이 겹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데.

 

자그마한 소년의 터무니없이 커다란 모자 아래로 반창고가 늘어도 모르는 척해야 하는 메이의 위치는 지금도 다름없었다. 같은 팀인 주제에 아무것도 몰랐다는 표정을 한 이들에게 둘러싸여 경기장을 나가는 동안에도 메이가 있을 곳은 관중석의 먼 발치였었다. 마스크 아래의 찌푸린 미간을 먼저 본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메이였어도 할 수 있는 건 뉴스에 뜬 설명을 듣고 관련 기사를 찾아보는 것뿐이었다. 둘의 관계는 항상 이랬다. 흐르는 계절에 따라 소년의 키는 무럭무럭 자랐으나 갈 곳 없는 마음만은 항상 제자리를 맴도는 철없는 걸음마였다.

 

 

 

 

 

눈을 떠보니 다시 키스를 하고 있었다.

 

“카즈야.”

“메이.”

 

차오른 숨결이 누구의 것인지 모른다. 메이는 고개를 숙였다. 목과 어깨가 만나는 오목한 지점에서는 찾아 헤매던 향기가 났다. 턱선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렸다가 다시 입을 겹쳤다. 그리고 또 아래로. 목덜미, 귓가, 콧잔등, 이마, 온기가 느껴지는 곳만을 찾아다니며 짧은 키스를 내리고 답례하듯 돌아온 잔 떨림을 피부로 맞았다. 미유키의 손가락이 메이의 머리카락 사이로 얽혔다. 메이는 그 손마저 떼어내 부르튼 마디마다 입을 맞췄다.

 

“카즈야.”

 

이름을 불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또 떠나가 버릴 것 같아서. 메이는 문득 이 순간이 무서워졌다. 당연할 줄 알았던 아침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바라고 바랐어도 밤은 지나고 키스는 잊혔다. 울리지 않는 전화 끝에는 건네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남았고, 무심을 가장한 겉도는 질문들 사이로는 상처투성이 마음만 맺혔다.

 

“가지 마.”

“메이.”

“여기 있어. 가지 마. 안 가면 안 돼?”

 

감정은 홍수처럼 쏟아져나왔다. 메이는 마룻바닥에 누운 몸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마음속을 채운 건 후회였다. 과거의 메이가 저질렀던 바보같은 실수와 착각을 향한. 웃는 얼굴의 꺼풀 뒤에 소용돌이치는 두려움과 혼란을 모른 척하고, 오로지 저 혼자만이 그의 고통을 눈치챘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했던 비겁함까지 포함해서. 밀어낼지 끌어안을지 머뭇거리는 손끝을 뻔히 인지했으면서 다시 기회가 올 거라 확신했던 미련함에도.

 

메이는 무엇보다 자신이 가장 싫었다.

 

“또 올게.”

 

단단한 팔이 다가와 등을 두드렸다. 굳은살이 박힌 엄지의 끝마디가 메이의 날개뼈를 따라 작은 원을 그렸다. 느리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으나 메이는 꿈쩍하지 않았다. 품 안의 몸을 한층 더 세게 끌어당겼다. 거짓말. 웅얼거리자 머리 위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정말이야. 집도 샀는데 정 붙여야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뭐?”

 

메이는 고개를 휙 들었다. 마주친 시선이 급히 돌아가는 걸 보고 턱을 잡아 다시 제 쪽으로 고정시켰다. 방금 뭐라고 했냐. 다시 얘기해봐. 재촉하는 메이의 머릿속에 스멀스멀 피어나는 무형의 구름이 급속도로 불안한 색을 띠어갔다.

 

“투자라며?”

“메이.”

“진짜 무슨 생각이냐. 갑자기 일본에 오질 않나, 뜬금없이 집을 사질 않나. ……잠시.”

 

척추를 따라 차가운 소름이 흘러내렸다.

 

“너 설마, 아예 들어올 생각이야?”

 

사방에서 모여든 얼룩이 뒤섞여 마침내 빚은 건 가장 최악의 형태였다. 메이는 미유키의 멱살을 잡았다. 그래. 처음부터 이상했다. 이놈이 한가하고 심심해서 시즌 중에 저를 잡고 이런 데에 데려올 리 없다. 왜 진작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산 집이야? 그래서 시즌 중에 온 거고?”

“…….”

“말해 봐, 카즈야. 무슨 일이야. 정말 어디 아파? 팀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면 결혼이라도 해? 그런 거야?”

 

보잘것없이 절박한 목소리만 나왔다. 전신에 대상을 지정할 수 없는 분노가 몰아쳤다. 이게 배신감의 한 종류라는 걸 깨닫고 도무지 저 자신을 믿을 수 없어졌다. 이제 더는 없으리라 여겼던 기대가 여태껏 남아 있었고, 그러면서도 또 늦어버렸다는 사실이 미련했다. 잡지도 못한 것이 다시 손안에서 빠져나갔다는 현실이 절망스러웠다.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고 눈앞에서 불이 튀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옷가지가 메이의 손아귀에서 우악스럽게 구겨졌다.

 

그러나 미유키는 시종일관 잔잔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정원은?”

“뭐?”

“정원은 마음에 들어?”

 

메이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었다.

 

“오래된 집을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했는데, 그래도 이것만큼 적당한 게 없었어. 우선 커야 하고, 시내에서 좀 멀었으면 좋겠고…… 이건 내 욕심. 사실 이건 널 위한 거기도 한데, 정원이 넓었으면 했거든. 캐치볼 정도는 집에서 했으면 하니까.”

“잠시, 카즈야.”

“집이 다소 고리타분하긴 하지만 방이 많은 건 좋아 보였어. 네 말대로 목적 따라 나누어 쓸 수 있잖아? 우리가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게 어색한 사람들은 아니다만, 이제 우리도 나이가 있고, 네가 워낙 유별나기도 하고, 난 아침잠에 예민한 편이고. 아. 만약 기숙사 분위기를 내고 싶은 거면 참아보기는 하겠다만,”

“잠깐! 그만 말해!”

 

너른 공간에 정적이 깔렸다. 미유키는 연신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유유자적 마루에 드러누워 넋 나간 메이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달빛 아래에서 오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이제야 눈치챘어?”

 

메이의 가슴 속에서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뭉클 피어올랐다.

 

“너.”

“하하.”

“너, 진짜.”

“그 사이 귀만 간 게 아니라 머리도 나빠진 거야?”

“어떻게 7년 만에 나타나서! 7년!”

“벌써 그렇게 됐어? 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돈 버느라 바빠서.”

“웃기지 마. 말도 안 돼. 성격 나빠.”

“그래, 그래.”

“하여튼 제멋대로지. 저 좋을 대로만 다 하고. 재수 없어.”

“와, 지구 반대편에서 밤새워 매물 찾은 사람한테 막말…….”

“그냥 미국 가버려. 진짜 싫어.”

“정말?”

 

당연히 아니지. 메이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지금 있는 팀은? 계약은? 이곳으로 완전히 올 거야? 온다면 어디로 갈 거야? 그리고 언제? 얘기는 벌써 된 거야? 확실히 정해진 거야?

 

아직도 전혀 이해되지 않았고 모르는 것투성이었다. 한껏 부풀어 오르는 가슴과 다르게 머리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꾹꾹 눌러 담기만 했던 수많은 질문을 다 쏟아낸다면 이 밤이 아니라 며칠이 지나도 모자랄 테다. 무슨 생각으로 미국에 간 건지. 왜 메이에게는 아무 말 없었는지. 언제 돌아오기로 결심한 건지. 이 집을 산 건 무슨 계기였는지. 그동안 메이가 미유키를 보고 싶었던 만큼 미유키도 메이가 보고 싶었는지. 왜 연락이 없었는지. 그날 밤, 무슨 심정으로 방문을 열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키스를 했는지.

 

“메이.”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메이의 뺨을 감싸더니 얼굴 언저리를 쓸어내린다. 넌 가끔 너무 둔해. 중얼거리는 입가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고 눈꼬리가 배시시 접혔다.

 

“설마 내가 다 잊은 줄 알았어?”

 

메이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입맞춤은 잊힌 게 아니었다. 말은 먹힌 게 아니었다. 미유키였던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이치. 모든 고뇌의 장본인. 메이의 우주.

 

 

 

 

 

날이 갈수록 마음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여만 갔던 자욱한 의심과 불안의 안개를 걷고 드디어, 드디어 그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겹쳤을 때, 미유키는 곧바로 깨달았다. 아. 큰일 났구나.

 

아랫입술을 두드리는 혀끝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살포시 벌어진 두 입과 한껏 뒤로 뺀 허리를 단단한 팔이 얽고 기울어진 두 고개가 만든 실로 완벽한 각도.

 

둘은 언제나처럼 완전한 호흡을 찾았다. 꼭 맞아떨어지는 퍼즐 조각처럼. 상호 보완하며 돌고 돌아 마침내 하나로 어우러지는 화음처럼. 소년의 쪽빛 바닷물처럼 영롱한 눈동자에는 미유키의 모습이 작은 점이 되어 비쳤고, 그걸 바라보는 미유키의 눈에도 소년의 놀란 표정이 담겨 마치 오래전 깨진 거울의 파편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미유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키스와 감정과 지금 서로가 서로를 향해 느끼는 마음의 공명은 분명 한 번 일어나고 사라지는 신기루일 리가 없다는 것을. 돌발적으로 일어났을지언정 흐지부지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이건 영원하다는 것을. 이러한 경험은 서로가 아니면 다시는 없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동시에 잘 알고 있었다. 이건 함정이었고, 입술 위에 한순간 맴도는 달콤함은 오직 냉정한 판단을 흐리는 유혹일 뿐이며, 소년의 얼핏 보면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손길은 단지 미유키를 현혹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적이고, 장애물이란 걸. 메이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아마 절대 말하지 않겠지. 인정도 하지 않을 거다. 물어도 부정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전력을 다해 도망치다가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선심 쓴다는 듯 이쪽을 볼 것이다. 막다른 골목의 높은 담장을 등지고 퇴로가 전부 사라지고 나서야, 돌고 돈 공이 이마 정중앙을 노리고 날아오는 때가 되어서야 겨우. 물론 그때가 되어서도 순순히 입을 열지 않을 게 확실했다. 적어도 미유키가 먼저 시인하지 않는 이상은. 언제나 그랬듯 한 걸음이 두 걸음이 되고 또 세 걸음이 될 때까지 다가가고, 져주고, 구슬리고, 달래고—어떤 상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메이는 항상 승자일 것이고, 감정의 무게를 지는 건 궁극적으로 미유키가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였다. 뒤로 물러선 이유는.

보류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기다리기로.

 

잘 안다. 이건 이상적인 방향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렇게도 원하는 게 확실한데 다른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미유키가 원하는 건 메이의 포수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없이 빛나는 마운드의 소년이, 일본 최고의 투수가 화려한 일평생의 커리어를 통해 가졌고, 또 앞으로 가질 수많은 포수 중 한 명이 되는 건 미유키가 가장 피하고 싶은 말로였다. 열 손가락의 하나도, 종이에 그어진 촘촘한 빗금 중 한 줄도, 메이의 회상 속에서 존재하는 과거의 한 명 같은 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 ‘미유키 카즈야? 내 고등학교 때 포수였어.’ 이따위 심심풀이 대화의 주제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래. 미유키가 원하는 건 훨씬 더 큰 무언가였다. 이 고집스러운 소년의 옆도, 뒤도, 맞은편도 아닌 가슴속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한여름의 가장 뜨겁게 이글이글 타오르는 해를 따와 마운드에 내려놓은 듯한 이 투수를 보자마자 평생 소유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길고 긴 낮의 시합과 힘겨운 밤의 연습 후, 침대에 누워 야구와 트레이닝과 볼 배합과 그날의 플레이와 실수와 성적, 모든 생각을 다 소진하고 났을 때—그때 생긴 빈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 찰나겠지만 그래도. 너절한 상자 속에 굴러다니는 것 외에 아무 쓰임새 없지만 왠지 모르게 버릴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보물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떨구어낼 수 없는 일상의 사소한 버릇처럼. 공기처럼. 그렇게 단지 존재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이 모두가 지나 마침내 웃기지도 않는 계획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이 감정을 매듭지어야 할 결말의 순간까지만이라도.

 

그때를 위해서는 몇 초는 물론, 몇 시간도, 며칠도 기다릴 수 있었다. 몇 주도, 몇 달도 필요하다면. 그리고 한 해가 십 년이 되고 십 년이 한 세기가 되고 또 한 천년이 되어, 한 기가 지나고 한 세가 흐르고 시대가 바뀔 때까지. 이 세계가 시작되고 끝나며 숫자를 세는 것이 더는 아무 의미 없어질 때까지. 그때까지도 미유키는 기다릴 것이다. 미유키는 이게 자신의 느린, 그러나 확실한 종말의 길이라는 걸 잘 알았다. 구체적 이해와 객관적 확실성이 누구보다 중요한 미유키에게 있어, 동료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며 연인은 더더욱 아닌 애매하기 그지없고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인간관계란 고통스러운 독약과도 같았다. 하지만, 뭐. 별수 없었다. 기다려야지. 언젠가는 꼭 들어야지. 저를 향한 메이의 진심 어린 고백을.

 

하지만 이 굳건한 다짐 아래에서도 미유키는 짐작했다. 머지않아 실수할 거라는 걸. 무언가 여지를 줄 거라는 걸. 아무리 치밀하게 계산 속에서 움직이더라도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불가능한 날이 분명 올 것이다. 이제 곧 쩌렁쩌렁 고막을 울릴 요란한 목소리를 마음속으로 준비하면서 미유키는 이게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았다. 무심한 척 건드린다든가, 마음을 얼핏 떠보는 자잘한 행동일 수도 있으나 아예 제대로 미친 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술 마시고 실수한다거나, 집문서부터 내밀고 다짜고짜 같이 살자고 한다거나, 월드 시리즈 개막전에서 청혼한다든가, 뭐 이런.

 

어쩌면 또 한 번의 키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 눈이 마주치고 소년이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불렀던 그때부터 예감했었으니까. 자그마한 꼬마 포수의 자그마한 손바닥 위에 내려온 자그마한 해돋이와 같은 기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유키는 시작부터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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