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센티넬버스AU

* 유목님께서 금썰을 빌려주셔서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손 하나에 나는 울고 웃어. 눈길 한 번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

 

어느 어둡고 고요한 여름밤, 세상에서 가장 센 힘을 가진 소년이 토해낸 고백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어

 

 

 

 

 

“손.”

 

불쑥 다가오는 그림자를 마주하고 머뭇거렸다. 묵직한 정적이 깔리자 맞은편 소년의 눈동자가 한층 더 탁해진다. 하는 수 없이 손을 내밀어 떨리는 손바닥 위에 얹었다. 예상보다 훨씬 뜨끈한 피부가 언짢았다. 바로 후회하고 손을 거두었다.

 

“더.”

“싫은데.”

“더, 라고 했어.”

 

잠시나마 평온했던 소년의 표정이 단번에 구겨졌다. 미유키는 개의치 않고 닿았던 손등을 흙이 묻은 바지에 문댔다.

 

“젠장. 오늘만 해도 두 개 깨먹었단 말이다.”

“그래서. 나와는 관계없잖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스포츠백을 집어 들었다. 팔에 걸리는 무게가 가슴까지 잡고 늘어지는 것 같다. 뒤로 돌기 직전 보였던 흔들리는 동공은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미유키 카즈야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다. 나루미야 메이는 독서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이것에 관해서는 몇 번 읽은 적이 있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가장 끔찍한 악몽이 드디어 현실이 되는 그때 부르짖을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신이 한 명인 세상, 또는 여럿인 세상. 이 둘 중 무엇이 나을까, 카즈야. 그의 질문을 받은 친구는 전자를 택했다. 하나뿐이면 찾을 때 편하지 않겠냐, 라며.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타당한 이유였다. 그러나 나루미야 메이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두 번째를 골랐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그는 가정했다—모든 곳에 제각각의 모습으로 깃들어 있는 게 더 멋지지 않을까.

 

길가에 구르는 낙엽. 손에 닿자마자 바로 녹아버리는 눈송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공의 궤적과 발끝에서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한여름을 소리로 채웠다가 늙은 고목에 껍질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매미. 그리고 본인이 가늠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는 힘을 가지고 지구의 한 귀퉁이에 태어난 소년.

 

모든 하찮은 것들 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것. 그것만을 위해서도 존재하기를 바랐다.

 

 

 

 

쿠라모치 요이치는 말했다.

 

 

 

“그거 버릇돼.”

 

기숙사 통로의 코너를 꺾어 들어가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깨가 퍼뜩 뛰어오를 만큼 놀랐다. 돌아보니 그림자가 진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건 쿠라모치다. 아, 진짜.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며 눌러 담았던 짜증과 피로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심장 떨어질 뻔했네…….”

“대충 넘어가려 하지 마라. 너 오늘 미팅 있었던 건 기억하냐?”

 

아.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 그러고 보니 주장과 부주장, 매니저를 포함해 감독님까지 참석하기로 한 미팅이다. 까먹었지? 그럴 줄 알았다. 동료의 삐딱한 자세는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나 잘잘못이 명백한 상황에서 자책감을 가지지 않기란 힘들었다.

 

“미안. 커버 치느라 곤란했겠다.”

“두 번은 안 할 거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부주장이 믿음직해서 든든하고요.”

“농담할 시간에 그 자식 제대로 떨어낼 생각이나 하라고.”

 

둘러댈 말은 금세 바닥났다. 이 정도로 적나라한 충고면 발뺌도 어렵다. 그게 고등학교 시절을 내내 같이 보낸 동료에게서라면 더더욱. 웃어야 하나, 정색을 해야 하나. 갈피가 잡히지 않는 와중에도 주먹을 쥐었다 피는 걸 반복했다. 오늘따라 잡혔던 오른손에서 뻐근한 감각이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언제부터 알았어?”

“작년부터.”

“의외로 눈치 빠르다?”

“사촌 형이 그쪽이거든.”

 

이쪽은 뭐고 그쪽은 뭐냐. 무슨 기형종이라도 된 기분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평범한 운동선수가 가진 정상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있긴 했다. 기형 맞지. 자조적인 웃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쿠라모치가 무언가를 미유키 쪽으로 던졌다. 공이었다.

 

“잠시 얘기 좀 하자.”

 

 

 

 

「원래부터 좀 불안정한 사람이었어. 어느 날 길에서 쓰러졌는데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이 급하구나 싶어서 딱 한 번 가이딩 해줬다더라. 알고 보니까 관리국 소속이었다나, 뭐라나. 하여튼 그 후부터 그 형 제대로 미쳐서.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 사람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데.」

 

난생처음 수학여행에 온 중학생 마냥 밤새 이야기를 했다. 텅 빈 그라운드 중간에 서서 낡은 글러브 하나씩 끼우고 공을 주고받으면서. 쿠라모치는 의외로 ‘그쪽’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니면 미유키가 너무 모르는 걸지도 모른다. 가이드라는 판명을 받고 나서도 한 번도 제대로 알아본 적 없다. 미유키에게는 야구가 전부였다.

 

「그거 억제링이지? 그 자식 귀에 달린 거. 위험군 센티넬이 한다는.」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꽂힌 공은 엉뚱하게 입속에서 쓴맛을 남겼다. 미유키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야기가 이어졌다. 축구에 제법 뜻이 있던 형이라 고집 끝에 억제링으로 연명하며 선수 생활을 계속했단다. 종반에는 관리국에서 반강제로 수거해 갔다고도. 폭주라도 했어? 묻자 답지 않게 말을 버벅거렸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결국엔 그거다. 제대로 된 가이드의 가이딩을 한번 맛본 센티넬은 다시는 링이 주는 인위적인 압박으로 만족할 수 없다, 라는.

 

「그게 뭐라고 그렇게 더듬거려.」

「그렇잖아. 가이드한테는 기분 더러울 거 아니냐.」

 

달리 서술하지는 않았으나 표정을 보니 꽤 지저분했던 모양이었다. 가이드에게 집착 증세를 보이는 센티넬이 더러 있다는 건 미유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처음 판정을 받은 열 살의 여름, 몇 번이고 경고를 들었다. 절대, 절대로 아무에게나 해주면 안 된다. 평생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희망을 주는 것도 금물이다. 공식 허가를 받은 페어링 외의 모든 관계는 궁극적으로 마이너스일 뿐이다.

 

어느 날은 매치 끝나자마자 너무 급하게 빼서 귀가 찢어진 적도 있다더라. 이야기를 잇는 쿠라모치의 목소리가 허공을 울리는 이명처럼 아득했다. 그런데 제대로 가이딩 한 번 받고 나니까 세상이 달라보이더래. 두통 없는 머리가 어떤 느낌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면서.

 

능력이란 건 마치 보기 위해 눈을 뜨고 걷기 위해 발을 내딛는 행위와 같다. 그걸 억지로 누른다는 건 곧 눈을 뽑고 발목을 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합금 소재가 주는 화학 분비 작용에 의지한 억압이냐, 선천적으로 일치하는 가이드의 파동에 의한 증상 완화냐. 이건 선호와 기피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번 몸으로 겪고 나면 뿌리칠 수 없는 유혹과 같다고 들었다.

 

공교롭게도 미유키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이건 참으로 분통 터지는 점이었는데—기초 물리와 역학의 법칙을 뛰어넘는다 칭송되는 가이딩의 전 과정에서, 정작 그 현상을 제공하는 가이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그 흔한 정전기 한 줄기마저도. 개중에는 정신적 만족감이니 뭐니, 개소리를 떠들어대는 사람이 있긴 했다. 그러나 적어도 미유키 자신은 느껴보지 못했다.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간다느니, 그 자리를 가슴 벅찬 뜨거움이 채운다느니, 그러고 나면 눈물이 날 만큼 충족감이 샘솟는다느니. 구름 잡는 소리는 이제 믿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다 여기고 싶은 게 아닐까? 미유키는 아직도 굳게 믿고 있다.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하는 입장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느끼지 않으면 억울해서. 아무래도 불공평해서. 이런 게 있다 우기지 않으면 안 그래도 부족한 가이드가 더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태어나면서 지는 짐이 있다. 미유키도 모르지 않았다. 새삼 출생부터 가진 형질을 탓하는 건 아니다. 단지 가끔, 아주 가끔 불편을 넘어 의문이 생길 때가 있었다. 왜 나인가. 왜 하필이면. 할 것이 분명하다 못해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에게 왜 다른 귀중한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힘이 있는 걸까. 나보다 훨씬 더 적합한 이들이 있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적은 숫자인데. 이런 능력을 타고날 운명이었다면 곁다리로 다른 것도 주면 좋았잖아. 그깟 공 좀 받는 재주 말고, 숭고한 사명감, 헌신, 희생정신, 그런 것.

 

아니면. 미유키는 글러브에 깊숙이 박힌 공을 꽉 소리 나게 쥐었다.

 

그 눈이 저를 보는 것만큼만 저도 그 눈을 볼 수 있었다면. 그렇다면 내민 손을 망설임 없이 잡았을 텐데.

 

 

 

 

사와무라 에이준이 말했다.

 

 

 

“미유키는 이나시로만 왔다 하면 어딘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침부터 식당 전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미유키는 두 손에 든 식판을 내려놓는 자세 그대로 굳었다.

 

“어떻게 매번 그래요? 한 번도 빠짐 없이. 원정이면 버스 삼십 분 기다리는 건 기본이고 홈이어도 경기 끝나자마자 휙 가버리고.”

“에이준.”

 

그런 때가 있지.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암묵적 무시로 지키는 불편한 평화라고 해야 하나.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 생기는 현상 유지. 알고 보면 서로 주전 포지션을 다투는 라이벌이라든가, 졸업 후 서로의 약점을 속속들이 아는 숙적이 될 필연이라든가.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사와무라를 부르는 코미나토를 비롯해 굉장히 곤란함이 역력한 얼굴들이었으나, 딱히 나서서 말리는 사람이 없는 이유는 역시 미유키의 최근 행적에 다들 알게 모르게 의문을 품었기 때문일 테다.

 

물론 왜 지극히 사적인 부분이 입방아에 오르내려야 하는 건지 미유키도 모르겠지만. 하긴 팀 미팅을 대차게 빼먹은 시점에서 더는 사적이지 않은 건가? 나름 한가한 의문을 속으로 품는 동안에도 사와무라의 추궁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저번에 같이 창고에 들어가는 거 봤습니다. 거기 에이스랑요. 둘이서 뭐해요? 무슨 일 있는 거 맞죠? 뭔지 모르겠지만 거절하면 안 돼요?”

“사와무라. 거기까지.”

 

이번에는 무시하기 힘든 쿠라모치의 제재였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습니까. 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발끈하는 후배를 보니 정작 미유키 본인이 허탈해진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으며 사와무라의 등을 툭툭 쳤다.

 

“늦겠다. 어서 먹어.”

“미유키 선배.”

“무슨 뜻인지 모르겠냐? 조용히 하고 이만 접자는 거야.”

 

그러나 물러서면 사와무라 에이준이 아니지. 기대도 안했다. 의외였던 건 여느때처럼 욱할 줄 알았던 단세포가 자못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이었다. 팀원 전부가 다 모인 곳에서 쩌렁쩌렁 소리치던 놈이 갑자기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마냥 주위를 흘끔거리더니, 상체를 숙이고 한손으로 입가를 가린다. 손가락을 까닥거려 귀를 가리키는 제스처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 ‘그거’잖아요.”

 

 

 

 

미유키가 갓 중3이 되었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메이에게서 신이 나서 전화가 왔더랬다. 카즈야. 교문 앞으로 나와. 배려라고는 눈 씻고 찾을 수 없는 일방적인 호출을 받고 잠시 무시할까 고려도 했으나 뒷일이 두려워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갔다. 그대로 팔목이 잡힌 채 다짜고짜 끌려간 곳은 구교사의 낡은 교실이었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 한참 동안 가방 안을 뒤적이며 뜸을 들이더니,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네모반듯한 패킷을 꺼내서 책상 위에 던지는 것이다.

 

뭔데, 물으니 피어싱 세트란다. 놀란 눈을 들어 쳐다보자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인다. 이건 왜? 입이 움직이기 전에 올라간 메이의 손이 귀, 정확하게는 살이 오른 귓불 주변을 톡톡 쳤다.

 

「나보고 해달라고?」

「응.」

 

미유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거나 말거나, 메이는 손바닥 위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느라 바빴다. 살균용 솜으로 똘똘 뭉친 덩어리를 풀어헤치더니 안에 든 것을 내민다.

 

노을 너머로 비스듬히 기울어 들어오는 햇빛을 받은 물체는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미유키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그걸 받아 들었다. 크기에 비해 무거웠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걸고 허공에 들었다. 반짝이는 게 은은 아닌 것 같고 제법 되는 무게감이 티타늄도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왜 링인 건지. 처음이면 그냥 일직선으로 꽂는 디자인이 낫지 않나.

 

「센티넬 억제링이야.」

 

악세사리에 관한 부족한 지식을 그러모아 이리저리 고민하는데 소독용 알콜로 바늘을 닦는 일에 집중하던 메이가 고개도 들지 않고 툭 던진다. 순간 눈이 커졌다. 이게? 진심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네가 이런 게 어디서 났어?」

「병원에서 갖고 튀었어.」

 

여기까지 와서야 이해가 갔다. 이 자식, 예전부터 그런 낌새를 보이더니 보나 마나 관리국에 끌려가 검사를 받은 거다. 아마 판정이 나고서도 온갖 행패를 다 부렸겠지. 분명 야구 계속하겠다고 고집이란 고집은 있는 대로 피웠을 터였다. 그리고 이 링은 아예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닌지라 그쪽에서 진땀 빼다가 슬쩍 꺼낸 걸 거다. 순전히 막무가내인 메이를 구슬릴 목적으로.

 

「이거 하면 계속 야구 해도 된대. 완전히 관통할 때까지 찔러넣고 구멍 생기면 끼워.」

 

한 손에는 보기에도 섬뜩해 보이는 철제 바늘, 다른 손에는 엄지손톱만 한 링. 그리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중학교 3학년생, 미래의 에이스 나루미야 메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가 느지막한 오후 햇살을 받아 다채로웠다. 잔뜩 들뜬 메이를 두고 못 하겠다는 말은 못 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바늘을 받아들고 귓불에 가져갔다. 끝이 무척이나 날카로워 갖다 대기만 했는데도 움푹 팬 자국이 생겼다.

 

「중간에 하면 돼?」

「대충해. 하여간 겁은 많아선.」

 

아아. 그러셔. 울컥하는 마음이 앞서 홧김에 손에 힘을 넣었다. 쑥 들어가는 게 예상했던 것보다 수월해 순간 멈칫했다. 진짜 끝이 박혀 들어간 걸 보고 당혹스러웠으나 중간에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를 악물고 저항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끝이 반대쪽으로 뽑혔을 때는 너무 뻑뻑해 바늘을 잡고 양옆으로 슬슬 돌려야 했다.

 

솔직히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당황해서. 얄팍한 살점에 쓰는 것치고 바늘만 불필요하게 길었다는 건 떠오른다. 다행히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살을 꿰뚫었다는 건 충분히 충격적일 나이였다. 철제 심의 한중간까지 넣고 나서는 더 갈팡질팡했다. 이제 뭘 해야 하더라. 링을 끼우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이건 어쩌지? 다시 빼나? 아니면 끼운 채로 링도 욱여넣나?

 

쩔쩔매는 내내 메이는 조용했다. 처음엔 너무 평온해서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나 심호흡 몇 번 하고 나니 시야에 들어온 입술에 언뜻 피가 맺혀 있다. 책상 위에 고이 포갠 손이 옅게 떨리고 있다는 건 조금 더 나중에 깨달았다. 에라, 모르겠다. 바늘을 쭉 빼고 링의 가느다란 부분을 구멍 안으로 쑤셔 넣었다. 찰칵. 잠금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자 그제야 길고 긴 안도의 숨이 흘렀다.

 

「제기랄…….」

 

꾹 닫혔던 메이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건 끝을 길게 늘어뜨린 욕지기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려 했다. 그러게 왜 나한테 와서 객기냐, 곱게 병원에서 뚫어 달라고 할 것이지. 그러나 메이가 더 빨랐다. 아직 링을 잡은 채인 미유키의 손이 덥석 잡혔다. 휙 다가온 또 다른 손바닥이 뒤통수를 감싸 우악스럽게 끌어당긴다. 어, 소리를 내기도 전에 입술부터 부딪혔다.

 

무지막지한 키스였다. 적어도 열넷의 미유키 카즈야는 그리 느꼈다. 처음엔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몰라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얼마 가지 않아 입술이 반강제로 비어져 열리고 젖은 살점이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게슴츠레 눈을 뜨자 시야의 대부분을 얼굴이 차지하고 있다. 메이는 한쪽 손으로는 미유키의 머리를 단단히 붙들고, 다른 손으로는 아직 귀걸이에서 떨어지지 않은 미유키의 손목을 부여잡은 채였다. 그러면 미유키는? 한 손은 메이의 귓불을 관통한 링을 잡은 채, 입속에선 메이의 혀가 맴도는 중이다. 무릎이 스칠 때마다 남기는 저릿한 여운에 손끝을 떨면서.

 

쪽, 민망하기 그지없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지고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정작 메이는 그런 미유키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파……. 입이 떨어지고서도 진심으로 짜증이 가득하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리고 귀를 만지작거린다. 결국 화를 내지도 못했다. 다짜고짜 웬 키스냐. 억울하니까 너도 뚫려봐라, 뭐 그런 뜻인 건가. 첫 키스는 피 맛이 났고 실없는 웃음과 함께 끝났다.

 

 

 

 

와타나베 히사시가 말했다.

 

 

 

“네가 걱정돼서 그랬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와아아, 멀리서 함성이 들려왔다. 더블! 더블이에요, 선배! 제가 친 것도 아니면서 신이 나 두 팔을 흔드는 사와무라는 미유키와 눈이 마주치자 세상에 다시 없을 뻣뻣한 동작으로 돌아선다. 그런 그에게 손을 들어 화답한 와타나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노트에 글자를 적어넣기 시작했다.

 

“그 말을 너보고 전해달라냐? 하여간 간이 부어도,”

“아니. 어제 연습 끝나고 한 얘기야. 너한테는 비밀로 해달라던데.”

 

온화한 얼굴을 앞에 두고 미유키는 드물게 할 말을 잃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는 이유는 역시 마음의 부채 때문일 것이다. 전전날 미팅을 빠졌을 때도 나서서 뒷수습을 해주었다고 들었다. 고마움도 있고, 미안함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비상한 분석력을 가진 팀메이트다. 한마디로 저기 저, 눈치 없이 뛰어다니는 후배에게 한 것처럼 입 틀어막고 없던 일로 넘어가지는 못한다는 소리였다.

 

“척 보기에도 그 계열이잖아? 저번 폭투도 그렇고, 우리 눈에도 간당간당할 만큼 불안정한데 거기에 캡틴 데리고 둘이서만 사라지는 게 불만이었던 거지. 쓸데없는 쪽으로 상상력 풍부하잖냐. 네가 책잡혀서 협박이라도 당하는 줄 알았단다. 팀 전략 안 불면 얻어맞을 줄 알아라, 아니면 지금 여기서 학교를 터뜨리겠다, 제발 살려주세요, 그런데 그건 절대 말 못 해요, 대략 이런 사이인 줄 알았대.”

“풉.”

 

설익은 웃음이 끝끝내 터졌다. 협박 같은 소리. 그놈에게? 소리를 참느라 끅끅거리며 웃다 보니 눈에 눈물까지 고였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설마.”

 

노트를 탁 소리나게 덮으며 돌아보는 와타나베는 짐짓 심각했다. 그런 그를 마주하고 미유키의 입가에서도 덩달아 웃음기가 사라졌다.

 

“가이드와 센티넬이 경기 끝날 때마다 나란히 실종되면 뻔하지 않나.”

“…….”

“솔직히 걱정하고 있어. 나뿐만 아니라 팀 모두가.”

“……혹시 감독님도 아시냐?”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미쳤구나. 기어코 깊은 한숨이 나왔다. 오래 숨길 수 있을 거로 생각하진 않았으나 적어도 이번 여름은 넘기길 바랐다. 와타나베가 미유키의 어깨를 두드렸다. 위로인지, 설득인지, 동정인지 모를 손길이었다.

 

“도를 넘은 간섭일 수도 있는 건 알아. 하지만 제대로 말하는 게 좋을걸. 둘 다 선수고, 특히 넌 주장인 입장에서 꺼려지는 건 이해한다만 앞으로 평생 숨길 수는 없잖아. 어쨌든 목숨과 직결된 문제니까 맡은 센티넬이 제일 중요한 건 다들 이해할 거야. 그런 면에서 빨리 얘기하는 게 너한테도, 걔한테도,”

“잠깐. 그만. 거기서 잠시.”

 

미유키는 줄줄 이어지던 설명을 손을 들어 멈추었다. 조리 있는 설명이었으나 들을수록 어딘가 이상했다.

 

“왜 평생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너희 각인했잖아.”

 

당연하다는 듯이 단정 짓는 와타나베를 보며 미유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각인? 방금 각인이라고? 느릿느릿, 절레절레 젓는 고개를 따라 와타나베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니야?”

“아니야.”

“진짜로?”

“진짜로.”

 

하하. 멋쩍게 웃는 미유키와 대변되게 이번에는 와타나베의 얼굴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하나는 방 밖으로. 둘은 건물 밖으로. 셋은 도시 밖으로.

 

구두로 널리 전해진 대처법은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한다기보다는 미지의 사태의 심각성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한마디로 그거다. 지나가다 누군가가 링 세 개를 달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라.

 

그리고 그 위업을 달성한 이가 나루미야 메이다. 현재 그의 귀에는 세 개의 링이 꽂혀있다. 미유키가 그날 뚫은 왼쪽 귓불에 하나, 그보다 조금 더 위로, 귓바퀴를 따라 나란히 둘.

 

말이 센티넬이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그때 사와무라의 태도를 무작정 비난할 수 없는 건 이것이 보편적인 사회 통념이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특이능력을 가진 이들이 스포츠를 한다는 것 자체가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일반인에 섞여 살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억제를 해야한다. 메이에게는 그게 손목부터 뎅겅 잘린 기분이라고 했다. 투수가. 손목이. 그러면 과연 누가 능력자이고, 누가 능력자가 아닌 걸까.

 

자율신경계 불안증세 방지용 시상하부 분비 조절 기능 대치품. 정식 명칭을 처음 안 건 그날 메이가 가져온 링의 포장지를 구겨 버리면서였다. 한 개도, 두 개도 아니고 세 개. 이건 기록이었다. 적어도 미유키가 알기로 링 셋을 달고 운동을 하겠다는 미친놈은 없었다. 세 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예 없어서라기보다는 이것이 다 필요할 정도의 능력을 소유하고선 일상을 살기가 힘든 때문이었다.

 

보통 각인 제대로 먹힌 전담 가이드를 달아주지. 풀타임으로 하나. 백업으로 두셋 더.

 

반년에 한 번 생존 보고 차 들르는 관리국에서 담당 의사 선생님이 해준 이야기였다. 전부 무료, 사는 집과 먹는 밥과 4대 보험이 평생 보장된다. 이건 미유키도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메이의 능력은 염력 계열이었다. 특정한 풀떼기를 키우는 것도 버젓한 능력인 마당에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물리 에너지를 행사하는 힘이라니 군에서 눈에 불을 켜고 탐내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걸 떠나 공 던진다는 놈과 염력이란 건, 너무나도 논리적으로 안 좋은 합이라 처음 야구를 계속하겠다고 했을 때 링만큼은 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못 박았단다. 그런데 그 발칙한 놈이 한 팩 확 채가더니 무단으로 그걸 끼우고 마운드에 올랐다고.

 

그거 달아준 사람이 납니다, 선생님. 그 정신 나간 놈 귀에 구멍 뚫은 게 저예요.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관리국에서는 저희 둘이 사적인 연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판국이다. 하물며 가이딩을 해주고 있다는 걸 알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모든 압력이 제게로 올 거다. 그놈 잘 꼬셔봐라. 내친김에 너도 이쪽으로 오고. 마치 제가 가자고 하면 그 자식이 쭐레쭐레 따라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데 사실 그 반대거든요. 자기 포수 말도 더럽게 안 듣는데 내 말이라고 듣겠습니까.

 

다 떠나서 제일 화딱지가 나는 건 그거다. 미유키와 메이는 궁합이 좋았다. 지지리도 긴 관리국의 실험을 굳이 거치지 않아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이게 뭔 말이냐 하면, 미유키의 손가락 하나만 스쳐도 메이는 좋아 죽으려 한다는 뜻이었다. 경박하지만 사실이다. 매번 짧다, 짜다, 쩨쩨하다 온갖 싫은 소리는 다 하는 주제에 옆에 가까이 앉는 것만으로 관리국에서 붙여주는 가이드 백 명보다 낫다며 칭찬 아닌 칭찬을 늘어놓는 놈이었다.

 

그래서 손만 잡았냐, 하면 물론 아니다. 순정 꽤나 지키는 남자의 첫 키스를 제멋대로 가져간 파렴치한답게 여기저기 만지는 것도 거리낌 없었다. 물론 미유키 쪽에서 요령껏 쳐내기는 했다. 맨살 만지는 건 손부터 팔뚝 아래까지. 입으로 할 거면 목 위, 입술 근처는 빼고. 깨무는 건 괜찮지만 흔적은 없이. 그랬다가 한 번 귓바퀴에 잇자국이 오돌토돌 생기고 나서는 아프지 않게, 라는 조건이 붙고 한 시간이 넘게 손가락을 쭉쭉 빨아당기는 통에 오 분 이하, 라는 시간제한도 달렸다.

 

이렇게까지 사정 봐주는데도 시종일관 툴툴. 그러면서 할 때는 맡겨놓은 짐짝 챙겨간다는 태도다. 대체 사람을 얼마나 싸게 생각하면 이런 식인 거야? 아무리 투수고 투수 중에서도 내로라하는 마이페이스라지만 당연하다는 듯이 접촉을 요구하는 건 적잖이 곤란했다. 어찌 됐건 내 몸이고 내 몸 내 마음대로 쓰는 거라고 해도 미유키는 지금 둘의 관계가 관리국에 알려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놈도 모르지 않으니 꼭꼭 숨어서 하는 거다. 차라리 양심마저 없는 쓰레기였으면 한 대 치고 말았을 텐데.

 

어디서부터 잘못 끼운 단추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아예 처음부터 허락하면 안 됐다. 무슨 대단한 희생심에 불타는 박애주의자라고. 한평생 없던 정의감이 갑자기 샘솟아서는. 아니, 애초에 잘 숨겼어야 했다. 그놈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가이드가 저라는 사실은 무덤까지 가지고 갔어야 할 비밀이었건만, 그걸 들킨 건 제 일생일대의 과오였다. 전혀 계산에 없던 돌발상황이라 누구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날은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이었다. 시니어 시절 마지막 경기 중 하나. 한창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던 스카우트 제안이 매듭지어질 시기라 경기장은 유달리 사람이 많고 날 선 분위기였다. 그 속에서 투수가 쓰러졌다. 잡고 있던 공을 찢고 머리를 부여잡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책임감 있는 포수로서 응당 제일 먼저 달려가 이름을 불렀다. 혹시나 뇌 질환일까 봐 때리거나 흔들지는 못하고 손만 꼭 잡았다.

 

참고로 그전까지 미유키가 가이드라는 건 본인마저도 종종 까먹곤 하는 사실이었다. 관리국의 담당의와 아버지와 팀의 감독님만이 알았다. 미유키 카즈야, 가이드. 평생 들여볼 일 없을 기록용 서류에 적힌 세 단어가 다였고 그쪽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다. 센티넬은 적었고 가이드는 그보다 더 적다. 혼자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랬는데.

 

첫 발현이었다고 한다. 두 해 빠듯 호흡을 맞추어 왔던 투수가 잠재적 능력자였다는 건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여기에서부터 그릇된 판단이었을까. 아니면 그 자리에는 사실 센티넬이 둘이었고, 다른 하나가 나루미야 메이라는 걸 간과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경솔함이. 퍽이나 간절하게 이름을 불렀던 마음이. 온 진심을 담아. 일어나라고. 핏줄이 설 만큼 손을 꽉 잡은 채.

 

미유키는 그 눈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돌연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압력이 몸을 짓눌렀다. 시선을 들자 상대 팀이 보였다. 벤치에 앉으려 굽었던 작은 등이 우뚝 멈추더니 고개가 휙 돌아 이쪽을 향했다. 샛노란 눈에서 광선이 나와 빗줄기를 뚫고 미간에 꽂히는 듯했다.

 

실수였다. 가이딩을 하려던 게 아니다. 필사적으로 진정시켜야 한다는 마음이 그런 효과를 불러온 건지, 생전 처음 겪는 실전이라 본능적으로 나온 건지, 미숙한 탓에 겁도 없이 질질 흘리고 만 건지. 셋 다인 건지. 미유키는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했다는 것이다. 메이의 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개자식.

 

달싹이는 입술만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카와카미 노리후미가 물었다.

 

 

 

“……공공재 취급도 작작 해야지.”

“뭐?”

“아니야. 혼잣말.”

 

깡. 시원한 배트 소리와 함께 공이 푸른 하늘 위로 높이 떴다. 벌써 여섯 번째 안타. 쿠라모치에게는 두 번째 출루. 정확하게 2루수와 중견수 사이에 꽂히는 공을 보며 옆에 서 있던 카와카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혹시 걱정돼서 그래?”

 

음.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 옆을 돌아보았다. 카와카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건 방금 배팅 석에 들어간 코미나토도 아니요, 4회 만에 강판 된 주제에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와무라도 아니요, 벌써 지친 건지 구슬땀을 줄줄 흘리며 늘어진 후루야도 아니었다. 땡볕 아래의 마운드에 홀로 선 고독한 인물. 이번 회에만 노아웃에 안타 둘 맞은 위기의 투수. 살벌한 기운을 풀풀 흘리며 고군분투 중인 이나시로의 에이스.

 

그 포인트에서는 헛웃음이 튀어나올 수밖에.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어, 아주. 한숨 한 번 쉴 때마다 저 화상과 연관 지으려 드네. 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던가? 오히려 둘이서 같이 자리 비운 것 빼고는 엮일 일은 거의 없기나 마찬가지였는데.

 

“부쩍 같이 다니길래. 요즘 들어 자주 찾아오고.”

 

다른 사람이면 질 낮은 캐물음이라고 생각하겠으나 카와카미만은 달랐다. 믿을 수 있는 동료였기 때문만은 아니고, 몸에서 배어 나오는 인품이라고 할까. 미유키는 말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스코어는 한참 전에 벌어졌고 분위기는 돌릴 가망이 없었다. 무엇보다 투수의 폼이 망가져 있다. 팔을 올렸다 거칠게 다시 내리는 동작에서 얼마나 초조한지가 빤히 보였다. 눈을 감아도 살갗을 콕콕 찌르며 다가오는 불쾌한 파장은 덤이었다.

 

“언제부터 해준 거야?”

“중학교 마지막 학기부터.”

“꽤 됐네.”

 

깡. 경기장을 또 다시 울리는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수비진이 바쁘게 움직인다. 결국 2번 타자도 출루. 미유키는 어깨를 풀며 옆에 놓인 배트를 집었다.

 

“딱히 편견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야. 오히려 둘이 친해 보여서 좋아.”

“각인 안 했어.”

“응?”

“아니라고. 그런 사이.”

 

미유키의 말을 들은 카와카미의 반응이 몇 주 전의 와타나베와 똑같은 것이 그 나름대로 신기했다. 팀 전체를 비롯해 감독님과 코치님과 매니저들까지 각인했다고 생각하는 건 어처구니없었으나 오해할 만은 했다. 와타나베의 말마따나 둘이 사라진 게 몇 번이었는데. 메이야 뭐, 위험군인 걸 선전하고 다니는 타입이고, 미유키가 가이드인 걸 모르는 사람은 이제 서도쿄 내에서 사와무라 한 명뿐일 거고. 스카우트 시즌의 시니어 리그 경기에서 발작 중인 투수를 대놓고 가이딩 하는 포수라니, 연예인으로 치면 선데이 찌라시 스캔들 감이다.

 

결국 시라스를 타석에 두고 세 번째 볼. 그러면 이제 곧 미유키의 차례다. 시합에서 이기는 건 좋지만 뒤끝이 무서웠다. 저놈, 이 상태로는 끝나고 꽤나 괴롭힐 텐데. 배팅 장갑을 힘있게 조였다. 그라운드를 스파이크 끝으로 톡톡 치는 그의 뒤에서 카와카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유키.

 

“만약에 하면?”

“뭘?”

“각인. 하고 나면 어떤 사이가 되는데?”

 

 

 

 

그 후부터는 지옥이었다. 그동안 깜찍하게 숨겼단 말이지. 나름 절절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말이야. 재미 좀 봤겠네. 안 들켰으면 평생 숨기려고 했냐. 잔뜩 날 벼린 앙심으로 시작한 협박에 공갈이 더해지더니 한 해가 지나고선 눈물 없이 차마 들을 수 없는 간절한 애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사람 속을 긁는 빈정거림.

 

내가 네 눈에 투수긴 해?

 

이 말이 나올 때쯤엔 십중팔구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난 다음이다. 온갖 떼를 쓰고 저 좋을 대로 화풀이를 하다가. 이 자식의 말인즉슨, 미유키 카즈야는 공 던진다는 놈이면 아무리 무능해도 뒤를 봐주려 안달 난 줏대없는 포수고, 와중에 쓰잘데기 없는 책임감만 넘쳐서 기를 쓰고 다 받아주는 게 타고난 성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루미야 메이도 투수였으니 저도 그렇게 해줘야 정상인데, 절대 그러지 않는 걸 보면 자신을 투수로 보지도 않는다는 기적적인 생각의 흐름이었다.

 

투수긴 해. 내 투수가 아닐 뿐이지. 그렇게 말했다가 서슬 퍼런 살기란 걸 몸소 체험하는 귀중한 경험을 가졌다. 따지자면 화낼 걸 알고 일부러 한 말이었으니 메이 잘못은 아니다. 미유키는 애석하게도 그에 대해 제법 잘 아는 편이었다. 말해봤자 당사자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메이가 원하는 건 단 하나, 각인. 평생 그의 옆에서 안정을 줄 수 있는 그만의 가이드의 확보. 나흘에 한 번 인스턴트처럼 받는 관리국의 가이딩이 아니라, 내장이 뒤집힐 것 같은 흥분으로 지끈거리는 두통이 아니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눈을 감지 못하는 긴긴밤이 아니라. 고요한 호수의 수면—처음 눈을 감고 손을 맞잡은 날, 메이는 미유키의 가이딩을 그렇게 묘사했었다. 물방울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원을 그리고 퍼져 호숫가를 덮은 사초를 간지럽히는 잔물결이라고 했다. 나는 이게 필요해, 카즈야. 그렇게 말했다.

 

 

 

 

「야구를 못 하니까.」

 

왜 관리국에 협조하지 않느냐, 언젠가 한 번 물었을 때 메이가 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내가 야구를 못 하는 건 이 세상에게 있어 엄청난 손해니까.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조금 불쌍하게 봐줬을 수도 있었을 테다.

 

「잘나셨어, 아주.」

「당연한 말을 하네. 난 원래 잘났어, 카즈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이게 아니더라도. 보란 듯이 미유키가 달아준 링을 가리키더니 코웃음을 친다.

 

「솔직히 말하면 네 잘못이지.」

「뭐?」

「이따위 건 없어도 됐잖아. 처음부터 네가 해줬으면 되는데. 그때 그놈처럼.」

 

이래서 예뻐할 수가 없다는 거다. 본인이 원하는 걸 마땅히 해줘야 한다는 독선적인 태도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오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제로 미유키는 그날 얼결에 벌어진 사건 이후로 아무에게도 가이딩을 해주지 않았다. 눈앞의 소년을 빼고는.

 

「이 새끼, 저 새끼, 공 던진다는 새끼면 다 해주면서 나는 왜 안 돼? 비싸게 구는 것도 정도가 있지.」

「말조심해.」

 

맹세코 쉽게 생각한 적 없다. 아무 노력 없이 얻은 능력이라지만 단 한 번도 당연시 받아들인 적 없다. 자의로, 순전히 미유키 자신이 원해서 손을 잡은 건 메이뿐이었다.

 

이 사실을 상기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나쁜 마음이 스멀스멀 솟아났다. 내미는 손마다 크기를 더하고 따라오라는 부름마다 무게를 불렸다. 그건 절대 인정하기 싫은 흔들림이었다. 감추고 감춰 이제는 저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진심이었다. 동시에 공포였다. 금색의 두 눈이 서늘한 날이 되어 피부를 사각사각 벗기고 꽁꽁 감추어 둔 추한 속내를 만천하에 내놓을까 두려웠다.

 

「그림처럼 완벽하지 않냐? 세기의 콤비잖아. 서로 공도 주고받아, 가이딩도 해줘.」

「그림 좋아하네.」

「같은 팀에서 뛰고, 같이 연습하고, 한방에서 지내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접으며 신혼여행이라도 계획하는 얼굴이다.

 

「같이 자고.」

「꿈 깨세요.」

 

그때 메이의 표정이 어땠더라. 세상에 그렇게 자신만만한 얼굴은 처음 보았다. 타인의 선택을 놓고 의무인 것처럼.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가만히 있으면 숨을 쉬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데 네가 거절하는 게 말이 되냐는 것처럼. 진실 따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너나 꿈 깨. 고등학교는 얼마 안 남았으니까.」

 

둥근 엄지 끝이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밀어 올린다. 입꼬리를 올려 웃는 얼굴이 푸른 하늘보다 맑고 여름 해보다 뜨거웠다. 밝은 햇살 아래에서 하얀 유니폼으로 칭칭 감싸고도 나루미야 메이, 이 소년이 가장 아름답게 빛났다. 그러고 나면 내 거야. 활짝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고 미유키가 느낀 감정은 아마도.

 

 

 

 

“……글쎄다. 서로의 가장 소중한 존재?”

“뭐야.”

 

하하. 카와카미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받아친다. 그건 마치 그거 같잖아. 사랑 고백. 미유키는 덩달아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응?”

“딱 그거야.”

 

그때였다.

 

장갑 밑을 따라 솜털이 쭉 돋았다. 위험해. 머릿속을 울린 건 본능이었다. 메이. 제일 처음 떠오르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뇌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뒤돌아 마운드로 달려나갔다.

 

“메이!”

 

먼저 움직인 건 두 발. 까랑, 타자용 헬멧이 철제 벤치 위에서 굴렀다. 들고 까닥이던 배트도 놓았다. 거치적거리는 운동용 가글을 벗어 내야 어딘가에 던졌다. 땀이 맺혀 부연 시야 너머로 천천히 넘어지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가까워졌다. 두 팔에 안아 든 몸이 뜨거웠다.

 

“메이!”

 

발밑에서 산산조각이 난 합금 가루가 잘각거렸다.

 

 

 

 

미유키 카즈야는 뭐라고 했나?

 

 

 

“일어났냐.”

“카즈야.”

 

어둠 속에서 두 눈이 깜빡였다. 초점을 맞추려는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옆에 앉은 미유키를 똑바로 응시한다. 그리고 밑으로. 시선이 닿은 곳은 이 침대에 뉘었을 때부터 놓지 않고 잡고 있던 손이었다.

 

“꿈인 줄 알았어.”

“뭐?”

“눈 뜨니까 네가 우리 기숙사에 있잖아.”

“여기 내 방이야, 이놈아.”

 

쓰러진 메이를 둘러업고 기숙사까지 오면서 저도 반은 실성한 상태였다. 병원으로 가겠다는 걸 한사코 말리고 거의 납치하다시피 데려왔다. 내일이 되면 또다시 이런저런 질문이 들어오겠지. 그러나 진짜 걱정은 메이였다. 시합 도중 링이 깨진 건 처음이다. 세이도 그라운드 안에서의 경기였다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역시 그때 가이드 얘기를 나중에 꺼냈어야 했어.”

“이건 또 무슨 개소리실까.”

“그렇잖아. 너 내 가이드 하기 싫어서 이나시로 안 온 거니까.”

 

어떻게 된 놈이 저렇게까지 자아가 비대할 수 있는 건지. 아이처럼 잡힌 손을 앞으로, 뒤로 흔드는 메이는 어마어마한 발견이라도 한 마냥 연신 중얼댔다. 먼저 같은 팀에 들어가고, 그다음에 물었어야 했어. 그러면 카즈야도 도망 못 갔을 텐데.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다 너 때문인 것 같더냐?”

“실제로 그런데, 뭐.”

 

기가 차 한마디 해줬더니 더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졌다, 선언하고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어두운 방 안에서 탈탈거리는 선풍기 소리만이 들렸다. 미유키는 입술 안쪽의 연한 살을 잇새에 넣고 꾹 씹었다. 입을 벌리면 말이 되지 못하는 감정이 나올 것만 같았다.

 

“메이.”

 

「어쩐지 넌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너 간다며.”

 

「메이, 간다더라.」

 

“관리국.”

 

「군으로.」

 

메이를 같이 옮겨준 이나시로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해준 말을 곱씹으며, 저 두 눈이 다시 뜨일 때까지 새벽 내내 옆을 지켰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네가 너무나도 의연했기에. 턱을 들고 어깨를 펴고 두 팔을 벌리고 항상 그 자리에 서서 야구를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래서 착각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차가운 현실을 잊고 있었다. 프로리그에서 링을 세 개 끼운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다는 걸 왜 진작에 깨닫지 못했을까. 카즈야.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도 안이 참을 수 없이 먹먹했다. 억지로 잡힌 손을 빼 뜨거운 응어리로 틀어막힌 목 위를 쓸었다. 선뜻 답을 하기 힘들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랬어. 단 한 번도 손해를 본다고 여긴 적 없어. 내가 열등하다고 느끼지도 않았어.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 불편할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어. 그저 당연한 거로 생각했어. 아마 너는 모를걸. 특별한 힘을 가지고도 고를 수 있으니까.”

“특별하지 않아.”

“특별해.”

 

손이 다가왔다. 다시 잡으라고 요구할 줄 알았더니 직접 미유키에게 닿는다. 따스했다. 손바닥 위, 그리고 손가락 마지막 마디의 아래. 단단한 피부를 꾹꾹 짚을 때마다 입속의 연한 살을 씹었다. 이건 반칙이지.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뿌리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미유키는.

 

“네 손 하나에 나는 울고 웃어. 눈길 한 번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야. 그래도 그렇게 되어버린 걸 어떡해.”

“사랑 고백 같습니다만.”

“그딴 것과 똑같이 취급하지 마. 사람은 사랑 따위로는 죽지 않아.”

 

사랑 따위.

 

너무나 예상한 그대로여서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니면 울음이거나. 메이다운 말이었다. 그건 비단 인류 역사를 돌고 돌리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인 사랑을 그따위 것으로 치부해서 때문만이 아니다. 미유키가 잘 알고 있어서였다. 메이가 바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를 리 없다. 하고 싶은 걸 계속하겠다는 열정. 인생의 전부인 그것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절망. 원하는 단 하나가 도리어 불가능한 단 하나라는 모순. 필연적으로 나타날 미래를 향한 공포. 그래서 원하는 각인. 단지 그런 것. 다만 그런 것.

 

저도 딱 저만큼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문제없었을 거다. 가이드와 센티넬로서. 절박한 사람과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걸 손짓 하나에 제공해주는 관대하고 마음 넓은 기증자로서. 친절에 웃고 감사에 화답하는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로서.

 

그것 외에는 없어, 메이?

정말로 그게 다야?

 

진심으로는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사람은 사랑으로도 죽는다 정정해주고 싶었다. 눈이 마주칠 때 찰나 멈추는 호흡과 네가 손을 내밀 때마다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과 갈 곳 없는 절망으로 빠졌다가 하늘 끝으로 치솟는 마음이 차라리 가이딩의 산물이었더라면 한결 나았을까. 그러면 웃으며 손을 잡았을까. 너처럼 터무니없이 쉽게 사랑, 각인, 이런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었을까. 소년은 세 치의 혀끝으로 쓸데없이 상냥하게 이름을 굴린다. 카즈야. 그 당당한 태도로 사람의 마음을 걸레짝처럼 난도질하고도, 저를 부르는 목소리는 언제나 필요 수치를 넘는 다정함이었다.

 

“그냥 해도 각인이 될까?”

“뭘 해?”

“섹스.”

“미친 새끼.”

“말해줘.”

 

미유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결국 감정의 공명이야. 쌍방이 원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아. 닫힌 문을 한쪽에서 두드린다고 열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야.”

“힘으로 열면 되잖아.”

“그러니까 그게 안 된다고……, 됐다. 말을 말자.”

 

입술 사이로 말이 흘러나가고 그 자리에 대신 모래알이 들어차는 듯했다. 미유키는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려고 했다.

 

“그러면.”

 

눈앞의 광경이 휙 돌았다. 눈 깜짝할 새에 메이의 얼굴이 낡은 이층 침대를 배경으로 위에 올라와 있다. 미유키는 숨을 죽였다. 가깝다.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의 눈동자는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태양처럼 밝은색. 금속처럼 차가운 색. 이 안에 조금이라도 애정이 담겼을까? 문득 기대한다. 또다시. 포기를 모르는 미련한 바보처럼.

 

“각인이 되면 너도 날 원한다는 뜻인 거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끼익. 둘의 무게가 실린 낡은 침대가 힘겨운 소리를 냈다.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이 점점 커지더니 시야가 캄캄해졌다. 눈 감아, 카즈야. 나지막한 명령이 화살처럼 날아와 두 손을 매트리스 위에 박았다. 등줄기를 따라 뜨거운 무언가가 치달았다.

 

차라리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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