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5월 후루미유 교류회에 냈던 회지입니다.

* 심리적 불안정을 겪는 후루야가 나옵니다.

* 성행위에 관한 암시가 있습니다.

* 등장하는 인물의 인적 사항, 나이, 언급된 혜성의 표기법, 출현 날짜, 궤도 등 세부 사항은 글의 편리를 위해 다소 조정되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공을 던질 수 없었다.

 

마지막 게임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 토너먼트 가장 후반부의 게임. 그러니까 그 해, 그 달, 그 주의 마지막. 마지막 경기의 마지막 이닝. 마지막 이닝의 마지막 몇 분.

 

상대는 몇 번이고 맞붙었던 팀이었다. 모르는 게 없었다. 성적부터 스펙, 단점과 장점, 물론 주로 단점. 경기 스타일, 주의할 만한 특기 사항, 최근 행보. 선수단 전체의 이름을 눈감고도 한 자 한 자 다 적을 수 있을 정도였다.

 

끝나면 쉴 계획이었다. 공을 던지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연말에는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본가에 내려갈까. 가는 길에 선물을 사야 하나. 오래간만에 들르는데 기차 대신 비행기를 타볼까. 하지만 역시 낭비일 것 같지. 역시 사람은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제일 편하다. 그러고 보니 늦어도 이틀 후에 출발해야 했다. 이번 해 진짜로 별로 안 남았네. 공을 둘러 잡은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마다 힘을 넣어가며 생각했다. 이 해가 가기 전 마지막 게임이라는 사실이 새삼 와 닿았다. 결국에는 그게 인생의 마지막 게임이 되었다.

 

그 순간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공을 말아쥔 손가락부터 팔뚝까지 맥이 점점 거세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렸다. 한 자리에 오도카니 선 채 억겁의 시간이 흘렀다. 똑딱똑딱. 들릴 리 없는 시계 초침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후두부를 두드렸다. 쿵. 쿵. 피부를 울리는 진동이 처음에는 지진인 줄 알았다. 심장 박동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가슴이 터질 것같이 아프고 단 숨이 벅차올라 기도를 죄어왔을 때였다. 그 상태에서 얼마의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모른다. 나중에 전해 들은 바로는 실제로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쥐죽은 듯 조용하던 경기장이 소곤거림으로 변하고 술렁거림에서 야유로 바뀔 때까지 단연코 세이도의 에이스 후루야 사토루는, 단 한 줄기의 소리도 듣지 못했다.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을 뿐이다. 정말로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조금만 곱씹어봐도 자명했다. 쇠뇌 끝에 쇠뇌를 번복해 머릿속에서부터 깨끗이 지워버렸던 현실. 그날의 게임 스코어보다, 팀원들의 아연실색한 시선보다, 그 후 빗발처럼 쏟아졌던 비난보다 훨씬 큰 고통은 다름 아닌 기억이었다.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제일 은밀한 중심부, 할 수만 있다면 몇 겹의 천을 드리우고 탄탄한 동아줄로 꽁꽁 싸매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겨두고 싶었던 마지막 보루―그곳에 감춰둔 진실로서의 진실은,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던지지 않았다. 그럴 마음조차 없었다.

 

 

 

 

C/2014 Q2 (Lovejoy)

 

 

 

며칠 전부터 건물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매년 오는 연말이었으나 이번에는 배로 소란스러웠다. 옆방에 지낸 지 한 달 정도 된 라일리는 마주치기만 하면 아예 그걸로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바로 어젯밤에는 눈에 띄게 흥분을 감추지 못한 기색이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언제나처럼 시작한 그의 설명은 곧 근일점, 실시등급, 천구 적도 등 전혀 알아듣지 못할 용어로 뒤섞였고 중간중간 목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그가 기울인 우유병이 커다란 몸과 함께 들썩이며 안을 채운 내용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저 좁은 찻잔 속에 들어가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가 주장하는 일생일대의 이벤트보다 잔의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는 불투명한 액체가 공용 부엌 벤치 위를 더럽히는 것이 사실상 더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다. 듣고 있어? 어쨌든 혼자만의 독백은 아니었는지 그가 벤치를 가로질러 상체를 숙여 왔다.

 

“딴생각 중이야? 오늘따라 멍하네.”

“네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어.”

 

후루야는 퉁명스럽게 받아치고는 제 몫의 시리얼이 담긴 접시를 들어 텔레비전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때마침 아침 뉴스를 시작하고 있었다. 요새 들어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이야깃거리는 당연하게도 다음날로 다가온 성탄절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살인적인 추위. 또 기록을 경신했고, 옆 도시에서는 하루 만에 몇 명이 병원에 실려서 갔고, 또 다른 마을의 누구는 콩이었나 유채였나, 하여간 농사를 망쳤다는 내용이 주로였는데 오늘 아침 새로 등장한 뉴스는 다름 아닌 라일리를 비롯해 요새 만나는 모든 이들의 최대 관심사인 듯한 그 천재지변이었다.

 

「나흘 전 북반구로 진입한 혜성은 '크리스마스의 선물'이라는 별명답게 내일 밤부터 보인다고 합니다. 천문관에 따르면 해가 지고 나서 남쪽 하늘의 토끼자리를 중심으로 나타날 예정이며 보시는 분들께서는 작은 쌍안경이 있다면 도움이 될 거로…….」

 

후루야는 거기까지만 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화로운 아침 식사에서까지 저것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제 몫의 그릇을 씻고 위층으로 올라가는 도중 라일리의 호명이 들렸다. 오늘 입실 리스트 준비해놨어. 홀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나머지 층계참을 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의 리셉션 담당은 후루야였다. 그것도 원래 같이 하기로 되어 있던 안나가 급한 휴가를 냈기에 혼자. 낡은 컴퓨터는 전원을 켤 때마다 드륵드륵 이상한 소리가 났다. 팬에 먼지가 낀 거야. 인터넷, 컴퓨터 등 전자기기를 담당하는 소피아는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그럴 때는 당장 본체를 열어서 팬을 청소해야 해. 아니면 이따위 구식은 망가지게 되어 있다고.

 

후루야는 그녀가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었던 지침을 가볍게 무시하고 원하던 프로그램을 열었다. 이제 십 분 후면 체크아웃을 하는 사람들이 내려올 것이다. 그런데 뭘 뜯어서 어떻게 하라고? 턱도 없지. 차라리 망가져서 새로 하나 장만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굳게 믿었기에 웅웅대는 본체에서 나오는 열기가 정강이를 뜨겁게 데우는 걸 무시하기로 했다. 물론 오늘 들어오는 뉴페이스가 많지 않다는 건 굳이 리스트를 열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모쪼록 도시 외곽에 위치한 낡은 유스호스텔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이 관광객 많기로 유명한 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관광도시에 위치한 것이라면 더더욱. 시내 중심부에는 하루가 멀다고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새로 열리는 저가 숙박업소는 호스텔이라기보다 대형 숙소에 더 가까웠다. 각각의 개인 사물함과 오성 호텔 못지않은 주방이 제공되고 온수 수영장까지 딸린 곳이 우후죽순 쏟아지는데 굳이 여기 찾아올 이유 따위 있을 리가.

 

그나저나 이 망할 리스트는 언제 뜨는 거야. 대체 손님이 몇 명이나 된다고. 쓸데없는 수다가 많긴 해도 일 하나는 확실히 처리하는 축에 속하는 라일리였으니 실수할 리는 없고,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많아봤자 세 명 미만일 거다. 인내심이 점점 사라져가기 시작한 후루야는 무의식중에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입술의 각질을 물어뜯는 건 어렸을 때 잠깐 가졌던 나쁜 버릇 중 하나였다. 그 나이의 아이가 무슨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많았겠느냐마는 뭔가 생각할 일이 있을 때마다 종종 나왔던 행동이었는데, 이걸 고치게 된 것은 한참 후인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우습게도 누군가의 충고 때문에.

 

“후루야.”

 

달칵달칵, 반응 없는 마우스의 버튼을 누르던 후루야는 이름이 불린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장난스러운 미소와 다르게 손가락 끝이 따뜻했던 사람. 충고의 주인. 지난날의 인연. 짧았으나 가장 깊은 자국으로 남았던 기적.

 

미유키 카즈야.

 

얼굴을 마주한 건 약 8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표정이 그게 뭐야.”

“그러는 선배는 오래간만인 후배에게 하는 첫 마디가 겨우 그겁니까?”

“이젠 맞받아칠 줄도 알아? 살다 보니 별걸 다 보네.”

 

쓰다듬는 손길에 이리저리 머리가 헝클어졌다. 후루야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쳐냈다. 성깔도 나빠졌고. 중얼거리는 미유키는 성격도, 생김새도, 특유의 표정과 버릇도 여전했다. 지나간 세월과 함께 당연히 바뀌었어야 할 미소는 후루야가 기억하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우린 어디로 가는 중이라고?”

“가는 게 아니라 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요. 알바이신 지구.”

 

후루야는 손가락으로 그들이 지금 걷고 있는 울퉁불퉁한 자갈이 깔린 가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그마치 두 시간 째 이 도시의 대표적인 명물을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걷고 있었건만 이제야 깨닫다니. 어쩌다 일일 투어가이드를 맡게 된 제 처지가 가련해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 봤자 벌써 엎질러진 물이었으니 주어진 일을 다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를 처음 보자마자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도망을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용수철처럼 퉁겨져 일어난 것과 동시에 옆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그런 걸 신경 쓸 정신 머리 따위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어이없이 평상적인 인사말을 하는 둥 마는 둥 내뱉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십 분 전에 올랐던 계단을 사뿐히 내려가려 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이라고도 할 수 없던 아둔한 시도는 반동으로 밀린 의자가 벽에 부딪히며 난 소리에 산산조각이 났다. 무슨 일이야? 홍차가 아직도 반쯤 담긴 머그잔을 손에 든 채 올라온 라일리는, 뻔뻔스럽게도 저를 '후루야의 옛 친구'라 소개한 미유키와 떠들썩하게 인사까지 나누었다. 그는 미유키의 주장을 한 점 의심 없이 믿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리가. 그뿐이랴. 오전 내내 저와 미유키를 따라다니며 별별 질문을 다 하더니, 종국엔 '오늘은 일 빼고 놀아'라며 대단한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근무 날짜를 바꿔주기까지 했다. 물론 호스텔에 남아있었다면 가는 곳마다 수백 개의 질문을 받아야 했을 테니 필시 점심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지쳐 있었을 거고, 그런 면에서 미유키의 손을 끌고 밖으로 향한 건 당시로써는 제법 타당한 선택이었다.

 

“예쁘네.”

 

결국 지금 이곳, 고등학교 선배의 옆. 때는 무려 크리스마스이브. 장소는 도시의 외곽으로 빠지는 오르막길. 서편으로 지는 해는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겨울 해는 비교적 짧은 편이라 거리를 지나는 행인은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관광객뿐이었다. 그나마도 골목 모퉁이를 몇 번 돌아야 한둘 마주칠 정도. 시선이 교차할 때마다 짧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는 건 이 지방의 전통이었다.

 

후루야는 몸을 틀어 사람 둘이 나란히 지나기도 빠듯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나마 메인 도로랍시고 있는 돌길을 따라선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칠해진 흰 벽이 늘어서 있었으나 샛길에만 들어서도 이야기가 달랐다. 다닥다닥 붙은 벽들은 죄다 칠이 벗겨져 있었고 금이 간 회담 위로 낙서가 없는 집이 드물었다. 각양각색의 알아듣지 못할 끄적거림이 하나 같이 후루야의 허리 즈음밖에 오지 않는 높이인 걸 보니 전부 다 고만고만한 나이의 아이들 소행인 듯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자랑이었다. 지난 삼 년간 후루야가 적을 두었던 도시, 그라나다. 전성기의 이곳은 문화와 예술과 교육의 중심지로서 유럽과 아프리카, 두 대륙을 잇는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였다. 이베리아반도에 최후로 남았던 이슬람 왕조의 수도였고, 몇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레콘키스타에 당당히 저항해 싸웠던 그 시대 마지막 등불이었으며, 당시 유럽의 주류였던 로마 카톨릭 사이에 꽃핀 이교도의 성역이었다. 한때 이곳을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던 이들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은 따스한 지중해의 햇살 아래 색이 바랜 회벽과 같이 희미한 잔재로만 남았다. 지금에 와서 이곳은 특이한 건축 양식으로 잘 알려진, 조금은 색다른 유럽을 찾는 이들에게 추천받는 관광 명소였다. 조심해요. 후루야는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오던 미유키에게 주의를 주었다. 안 그래도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은 위로 올라갈수록 미끄러웠다. 어젯밤의 폭설이 원인이었는데, 전례에 없던 한파 덕에 아침이 되었을 때는 드물게 몇 센티미터나 되는 눈이 쌓인 채였다. 이 동네의 길은 그런 식의 기상현상에 최적화되있지 않았다. 불규칙하게 깔린 자갈 틈을 따라 여즉 소복이 덮인 눈이 신경 쓰였던 후루야는 팔을 뻗어 미유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세심하잖아?”

“이제 곧 정상입니다.”

 

하나하나 지치지 않고 기술하는 그의 행동이 거슬렸다. 그렇지만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살결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가슴팍까지 차오르는 간질거림을 무시하고 꾸역꾸역 걸음을 옮겼다. 나중에 가서는 한 손에는 미유키를, 다른 손으로는 담벼락을 붙들고 기다시피 올라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거미줄처럼 뻗은 좁디좁은 골목길의 막다른 끝에 위치한 작은 공터, 즐비한 복층 건물에 가려졌던 시야가 탁 트이고 이제까지 지나쳤던 연갈색의 지붕들이 시에라네바다 산맥 밑에 자리한 도시의 완곡한 능선을 따라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빼곡히 들어찬 하얀 벽이 안달루시아의 게으른 오후 햇빛을 받아 해수면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이젠 슬슬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냐. 여기까지 온 이유.”

 

미유키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후루야는 대답 대신 난간에 기대섰다. 먼 곳에서 오후 세 시 반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개가 짖는 소리와 누군가의 정비하지 않은 스쿠터의 배기음도. 묵묵히 앞만 바라보던 후루야는 손을 들어 파릇파릇한 나무 사이로 우뚝 솟은 고성,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너머의 아득한 지평선을 가리켰다.

 

“원래는 저곳에 가려고 했었어요.”

“저기가 어딘데?”

“지브롤터.”

 

잠깐 조용했던 미유키가 눈썹을 치켜떴다. 가깝지 않나, 되뇌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차를 타고 네 시간, 그러고 나온 항구 도시에서 택시를 타고 삼십 분이었다. 차를 운전해서 간다면 톨게이트 비용을 내야 하는 것이 가장 귀찮은 부분이었다. 그마저도 버스를 타면 해결되는 문제. 고작 이백오십 킬로미터 남짓인 거리는 후루야가 그간 거쳤던 여정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짧았다.

 

“별 의미는 없어요. 그냥 대륙의 끝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간 적은 없다. 도무지 갈 수 없었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왜냐고 물으면 후루야도 대답하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얼마나 이론적으로 실현 가능하느냐, 얼마만큼 진정으로 원하느냐 같은 요소는 아무런 실체적인 무게가 없는 디테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곳에서 삼 년이나 머물게 되었다. 정말로 가고 싶었던 곳의 문턱에서,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딛지 못한 채.

 

후루야는 끊어진 대화가 주는 침묵 속에서 애꿎은 입술만 씹었다. 그간 받아칠 줄 알게 되었다니,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언제나 이 사람을 마주하면 모든 언어를 잃어버렸다. 지식은 변명이 되고 마음은 장애물이었다. 8년의 세월을 거슬러 예나 지금이나 후루야의 가장 큰 고민이자 숙제였다.

 

“입술. 상처 나니까 뜯지 마.”

 

후루야는 오늘 내내 곁눈질로만 훔쳐보던 미유키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거북했으나 눈을 뗄 수 없었다. 한없이 신경 쓰였지만 마치 오랜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했다. 쪽빛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남유럽과 고딕과 르네상스와 아랍풍이 질서 없이 섞인 건물들을 뒤로한 고등학교 선배의 형상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미유키는 항상 후루야의 꿈속에서만 실체 해왔었다. 대략 한 달에 한 번꼴로, 언제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현실과 상상을 구분해주는 지표, 누가 그의 존재에 대해 물었다면 두말없이 그리 대답했을 것이다. 뽀얀 입김에 가려졌다 나타나고, 골목 어귀를 돌면 사라질 듯 없어졌다 다시 보였던 그가 어쩌면, 진짜로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만큼 독보적이었다. 울창한 숲에서 그만이 꽃인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후루야는 고개를 숙였다. 뒤로 물러날 줄 알았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입술이 마침내 다다른 곳은 또 다른 입술이었다. 부드러운 피부에서는 얕은 맥이 뛰었다. 잔잔히 뒤섞인 숨결에서는 그리운 향기가 났다. 그러쥔 철제 난간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산간에서부터 귓바퀴를 에이는 칼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흩날렸지만 오로지 닿은 입술만이 따스하고 정겨웠다.

 

그것마저 거슬렸다.

 

“……죄송해요.”

“괜찮아.”

 

어색하게 나온 사과는 덤덤한 용서에 고요히 덮였다.

 

“굳이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지.”

“아니죠.”

 

후루야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어두웠던 밤. 차가웠던 공기. 녹녹한 살갗. 그리고 촉감만큼이나 코를 간지럽혔던 포근한 살 내음.

 

“여기엔 왜 오셨어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년 전, 후루야 사토루는 미유키 카즈야와 딱 한 번 섹스를 한 적이 있다.

 

 

 

 

C/2006 P1 (McNaught)

 

 

 

“이래서는 못 보지 않을까요?”

“불꽃놀이?”

“아니요.”

“그럼 뭐, 아. 혜성?”

 

하나, 둘,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받던 미유키가 눈매를 접어 웃었다.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귀엽네.”

“그런 거 아닌데요.”

“맞잖아.”

“아니라고요.”

 

세 살배기 아이들이라도 되는 마냥 항상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흐르는 건 왜일까. 이 사람을 상대로는 유독 그랬다. 휴, 한숨을 내쉰 후루야는 그의 어깨에 방울방울 맺힌 비를 떨구어주며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혜성이 뭐라고 난리들인 건지 모르겠어요.”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까. 게다가 이번엔 특별하잖아.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두고 처음 발견돼 신년과 함께 나타난 혜성.”

 

어떻게 된 게 이 구절을 안 듣고 넘어가는 날이 없다. 라일리만 피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젠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고등학교 선배까지. 후루야는 생산성 없는 싸움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미유키의 후드를 제대로 고쳐 씌우고 저도 외투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썼다.

 

“어쨌든 나하곤 상관없어요.”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봤자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끝없이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 앞으로도 뒤로도 인파뿐이었고 그들과 비등하거나 살짝 큰 키를 가진 후루야였기에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동그란 머리통만 눈에 들어왔다. 조그마한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어디에 박혀있다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삼삼오오 짝을 지은 것이 경이롭기만 했다.

 

그들은 지금 새해의 0시 0분을 코앞에 두고 도심에 자리한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매해 신년의 열두 종과 함께 시작되는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서. 둘만의 외출은 고작 두 번째였다. 미유키가 이곳에 온 지 어언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건만 정작 얼굴을 마주한 적마저도 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원인은 전적으로 미유키를 피해 다닌 후루야 때문이었다. 첫날 잠시 산책을 한 이후로는 실수로라도 마주치지 않으려 부지런하게 다녔는데, 크리스마스는 예고 없던 약속, 발 끊은 지 오래인 새벽 조깅, 낮에는 다들 꺼리는 부엌 잡일 등 각고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결국은 주위의 과도한 관심으로 인해 백기를 들게 되었다.

 

신년 축제를 구경시켜 주는 건 어때?

 

지구를 바꿀 대단한 아이디어라도 떠올린 마냥 헐레벌떡 다가온 라일리에게 제안을 받은 것이 당장 오늘 저녁이었다. 반박할 새는 없었다. 우선 미유키가 건너편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라일리의 목소리가 언제나처럼 쩌렁쩌렁 울려서 식당 전체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던 까닭이다. 결정적으로 업무 담당 명단을 작성하는 안드레아가 내일 정오까지 특별 휴가를 주겠다며 쐐기를 박은 탓에, 후루야는 꼼짝없이 미유키와 오붓한 신년 파티를 맞이할 운명에 처했다. 특별은 무슨 특별. 강제지. 투덜거림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로 나올 뻔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때도 그렇고, 동료라는 인물들이 싸잡아서 전부 다 도움이 안 된다니.

 

“어쩐지 매번 비슷한 패턴 같지.”

 

순간 속마음을 읽혔나 싶었다. 퍼뜩 놀라 쳐다보니 미유키가 턱 끝으로 약간 떨어진 뒤편을 가리켰다. 무리 지어 나온 호스텔 사람들이 둘을 향해 열정적으로 손을 흔드는 중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흘끗 쳐다볼 정도로 크게 이름을 소리치는 것이 적잖이 민망했다.

 

“어제도 저랬었어.”

“선배한테요?”

“아니. 라일리가 너한테.”

 

호스텔 앞 사거리에서. 못 듣고 지나가던데? 어깨를 으쓱이는 제스처에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어제는 후루야가 역병이라도 든 사람처럼 미유키를 피했던 날이었다. 더 특별히, 더 필사적으로. 분명히 이렇게 될 걸 예감했던 게지. 후루야는 허탈한 심정으로 미유키의 옷 소매를 살며시 잡아 반대편으로 끌었다.

 

“놔두고 먼저 가죠. 잡히면 피곤해져요.”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딸려오는 그를 붙든 채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거리 전체는 축제 분위기에 한껏 무르익은 채였다. 가는 곳마다 시끄러운 음악이 들려왔고, 우산과 반짝반짝 불이 들어오는 머리띠, 풍선, 음료수를 파는 노점상들이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가 주위를 한층 더 시끌벅적하게 했다. 도심 중앙부로 들어갈수록 사람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어깨가 조금 스치는 정도였던 인파는 언제부턴가 한 발자국 옮기기도 힘들 정도로 늘어났다. 옴짝달싹할 수 없이 인파에 갇혀있는데 돌연 미유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삼십 분 남았어? 그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시곗바늘이 열한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태껏 광장은 고사하고 큰길로 나가지도 못했는데, 이러다 새해의 카운트다운은 아무것도 없는 길거리에서 맞이하게 될 듯싶었다.

 

후루야는 까치발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현재 정체한 곳은 다행히도 그가 잘 아는 위치였다. 미유키의 어깨를 감싸 안고 왼편에 난 샛길로 발길을 돌렸다. 눈에 띄게 한적해진 돌길을 따라 익숙한 코스를 밟았다. 작은 분수를 지나 물장수의 동상이 나오면 오른쪽, 모자 가게를 끼고 다시 왼쪽. 왠지 미로 같아. 즐거워 죽겠다는 듯한 미유키의 중얼거림이 덩달아 기분을 들뜨게 했다.

 

“다 왔어요.”

 

전방에 거대한 건축물을 두고 후루야는 걸음을 멈췄다. 하늘로 우뚝 솟은 고딕 양식의 첨탑이 어두운 배경 속에서 한층 더 웅장해 보였다.

 

“성당?”

 

오도카니 선 미유키를 뒤로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도 때가 때인 만큼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있었으나 방금의 거리에 비교하면 나은 편이었다.

 

“네. 좋아해요?”

“아니.”

“왜요?”

“지은 죄가 많아서.”

“…….”

“그래도 그냥 여기 있자. 아늑하고 좋네.”

 

정문으로 올라가는 높은 층계는 양옆을 벽이 막고 있어 흡사 야외 영화관의 좌석과도 같았다. 성큼성큼 걸어간 미유키가 중간 즈음의 사람이 적은 곳을 골라 두 명분의 자리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정확하게 손바닥 두 개 크기의 하늘이 보였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하아,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 후루야는 털썩 드러누워 몸의 긴장을 풀었다.

 

“여기선 새해에 뭐해?”

“포도 먹어요.”

“응?”

“포도요. 열두 알. 종 한 번 칠 때마다 한 알씩. 안 먹으면 그해에는 재수가 없대요.”

 

미유키는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바닥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후루야는 얼떨떨한 심정이 되었다. 뭐가 그렇게 웃길까 싶었다. 정말이에요, 해명하며 너도나도 포도알이 담긴 일회용 컵을 든 구경꾼들을 가리켰지만 한 번 터진 웃음은 그칠 줄 몰랐다. 그래서, 포도는 가져왔어? 배를 잡고 웃던 미유키가 눈물까지 맺힌 눈꼬리를 훔쳐가며 물었다.

 

“아니요.”

 

후루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먹어봤는데, 나아지는 건 없더라고요.”

 

 

 

 

학창시절 때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건 아니다. 그저 군데군데 떠오르는 에피소드나 간단한 인적 사항을 빼면 모든 것이 뿌연 안개가 낀 듯 희미했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중학교를 들어가자마자 몇 반이었는지, 가장 싫어했던 과목은 무엇이었는지, 교실 안의 어디 즈음에 제 자리가 있었는지. 그런 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하루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갔는지, 그 과목을 왜 싫어하거나 좋아했는지, 옆자리에 누가 앉았고 무슨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때 느낀 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그런 것들은 정작 아무런 기억이 없다. 인간은 실로 미련한 생물이다. 소속, 숫자, 수치, 이런 하등의 가치도 없고 표면적인 것만을 허락했다. 팔꿈치에 닿은 책상의 감촉이 어땠는지, 일과를 끝내고 마시는 보리차 한 잔이 얼마나 청량했는지, 삼십 분 남짓이었던 등굣길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떤 색을 띄우고 무슨 향을 풍겼는지 같은, 정말로 중요한 부분은 말끔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고등학교로 올라오면 더 심했다. 떠오르는 장면이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익숙했던 곳을 떠나 대도시로 간 것이 크지 않을까 싶지만, 역시 결정적이었던 건 따로 있을 테다. 고등학교 2학년의 두 번째 학기 중에 벌어진 사건. 그때를 떠올리는 건 여전히 가슴 한편을 날카로운 칼로 헤집는 느낌이었기에 후루야는 당연한 수순으로 그곳에서 멀어지려 애썼다.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사슬로 묶어 묵직한 돌을 매달아 깊고 깊은 심해에 던졌다. 그렇게 잊었다. 정작 그 사건만은 떨굴 수 없는 악몽처럼 새겨놓았으면서 그보다 이전의, 일본에서 보냈던 유년기는 지우개로 밀어버린 듯 깨끗이 없앴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그 당시의 후루야 사토루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한 번 읽고 버린 소설책처럼, 가까이 다가가면 아지랑이가 되어 버리는 신기루처럼, 아침 해와 함께 증발해버리는 지난밤의 꿈처럼 모호한 기억의 저편에 가장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겼다.

 

단 하나, 미유키 카즈야를 빼고.

 

그는 달랐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었다. 표면적인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좋게 봐줘도 어설프다고 할 수밖에 없는 후루야의 언어 실력으로는 설명하기 턱없이 부족한 무언가였다. 세간에서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으나 절대 클리셰는 아니었다. 애착이라고 하기엔 깊고, 존경이라고 하기엔 단순했으며, 연정이라고 하기엔 무거웠다. 언젠가부터 후루야는 그것이 일종의 유일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모습, 행동, 사고, 말 모두가 독보적이었다. '그'라는 사람 자체가 너무도 특별했기에 대신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찾아갔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절망에 빠진 날, 적도를 넘어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대혜성이 출현했다던 밤. 후루야 사토루가 아직 잃어버리지 않았던, 가장 소중하고 찬란했던 보물에게로.

 

신기하게도 희멀건 막이 씐 것 같은 과거 속에서 오직 그 밤만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았다. 비품을 쌓아두는 창고 안이었다. 그래. 기숙사를 사이에 두고 연습장의 반대편, 학교 내에서도 미처 보수가 덜 된 구역이라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사전에 누군가에게서 들었는지, 아니면 어쩌다 보니 거기까지 흘러 들어간 건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오래된 문은 나무가 뒤틀려 제대로 맞물리지 않았고, 후루야는 잠금쇠를 걸 만큼 계획적이 아니었기에 거기 있던 내내 틈이 벌어져 있었다. 안에는 정체 모를 도구들이 무작위로 쌓여서 발을 디디는 것마저 용이치 않았다. 불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가는 곳이었으나 한쪽 벽에 뚫린 작은 통풍구에서 하얀 달빛이 들어와 시종일관 먼지로 가득하던 광 안을 밝게 비추었었다.

 

먼저 키스를 한 것은 미유키였다. 옷을 먼저 벗은 것도 미유키. 묵은 곰팡내가 나는 매트 위에 먼저 누운 것도 미유키. 그 날 밤의 모든 것이 그로 시작하고 귀결되었다. 연신 제 손과 입술을 찾은 이도, 숨을 섞고 체온을 나눈 이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도 모두 미유키였다. 눈과 귀와 살갗에 닿는 모두가 오로지 미유키뿐이었고, 그 기억만큼은 청사진처럼 선명하게 뇌 표면에 각인되어 아무리 긁어 지우려 해도 잊히지 않았다.

 

필시 셀 수 없이 보아왔을 그의 맨몸을 마주하고 몸속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가 거꾸로 추락하는 기분을 기억한다. 깍지 끼워 잡았던 젖은 손바닥이 몇 번 미끄러졌다가 다시 잡혔는지 기억한다. 하얀 빛줄기에 반사된 눈썹이 언제 떨리고 또 어떻게 빛났는지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몸이 움직여주는 그대로만 따랐던 자신의 어리숙함을 후회했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은 간간이 터졌던 숨결 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래서 온 우주를 통틀어 둘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갇힌 채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당신 때문이야.

 

그리고 후루야는 말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펑.

 

가까운 곳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후루야는 번쩍 눈을 떴다. 와,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주위를 잠이 덜 깬 눈으로 둘러보았다. 모두 껴안고 소리 지르며 새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펑.

 

다시 큰 소리가 났다. 놀라 하늘을 보았다. 색색의 불꽃이 둥그런 원을 그리고 터졌다가 기다란 궤적을 남기고 떨어지는 중이었다. 어느새 대성당 앞의 높은 계단은 사람으로 빼곡히 차 있었고 다들 일어설 자리마저 없어 다닥다닥 붙은 와중에 자신만이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었다. 그제야 후루야는 여기가 어딘지 떠올렸다. 자신이 여기에 누구와 왔는지도. 선배. 어울리지 않게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곳엔 있어야 할 이가 보이지 않았다.

 

선배.

 

후루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빽빽이 들어찬 무리를 뚫고 계단을 내려갔다. 거리에는 신년의 시작으로 흥분한 이들이 가득했다. 스페인어, 영어, 그 외 갖가지 언어로 인사를 전하는 행인들을 지나치고 또 지나쳤다. 좁은 골목마다 화약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어딘가에서부터 흘러온 연기로 사방이 자욱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이름을 외쳤다. 미유키. 선배. 미유키. 필사적으로 내지르는 이름 사이로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격하게 터져 나왔다. 어디 있지? 후루야는 혼란스러웠다. 옆자리에 있어야 할 그가 없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어 시끌벅적하게 기쁨을 나누는 이들 사이를 정신없이 헤집고 다니며 오직 하나 남은 어린 시절의 흔적을 찾았다.

 

“후루야.”

 

뒤쪽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려왔다. 고개를 홱 돌렸다. 그곳엔 그렇게나 애타게 찾던 사람이 있었다.

 

“선배.”

“후루야.”

“안돼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미유키는 진심으로 지금 상황이 당황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자신의 기행을 설명할 여유는 없었다. 잠시 뭐 사러. 말을 끝맺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두 손에 뭔가를 들고 있다는 건 차마 인지하지 못했다. 또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품에 담은 몸은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두꺼운 스웨터 밑으로 한 번도 잊은 적 없던 그 밤을 꼭 닮은 체온이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달리면서 열띤 목소리로 외쳤던 이름을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고백했다. 한참이나 늦은, 기적처럼 눈앞에 다시 나타난 이에게 아무리 전하려 해도 할 수 없었던 그의 진정한 마음이었다.

 

“가지 마세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한없이 미성숙하고 어렸던 밤이 지나고 후루야는 짐을 쌌다. 실제로 가방에 넣은 양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버렸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미련이 남은 것은 없었다. 있어도 두지 않으려 했고, 조금이라도 손에 붙는다 싶은 물건은 죄다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 비행기 표를 샀다. 출발 날짜는 풀잎 끝에 맺힌 서리가 녹고 나뭇가지의 마디마다 꽃봉오리가 맺히기 시작한 어느 화창한 봄날.

 

미유키의 졸업식을 사흘 앞두었던 시점이었다.

 

 

 

 

C/1995 O1 (Hale-Bopp)

 

 

 

“보여?”

“아뇨.”

“추워?”

“아뇨.”

“졸려?”

 

후루야는 결국 손에 들었던 쌍안경을 내리고 옆을 돌아보았다. 쉴 틈 없이 질문을 던지던 미유키가 입술을 꾹 닫았다.

 

“아니요. 그리고 정신없어요. 조용히 좀 해봐요.”

 

또박또박 말하자 그제야 침묵이 깔렸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전방으로 향하는 걸 확인하고 쌍안경을 재차 눈앞으로 가져갔다. 지금은 신년으로부터 닷새가 흐른 밤이었다. 한밤중의 어둠이 곱게 깔린 거리는 공현축일의 행렬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신성神性이 하늘을 밝히고 그 표식을 따라온 동방의 세 현자가 마구간에서 왕의 출현을 축복했던 이 날은, 종교가 큰 의미를 가지는 이곳에서 대표적으로 지키는 절기 중 하나였다.  

 

즐거운 날에 걸맞은 웃음소리와 발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신년 파티만큼의 떠들썩함은 아니었으나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소란스러움이었다. 그건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인 이 낡은 호스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한번 보내보겠다며 며칠 전부터 대여섯 명이 부엌에 틀어박히더니, 놀랍게도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의 메뉴가 저녁 식탁에 올랐었다. 캐러멜을 입힌 과일을 올려 구운 케이크, 돼지기름을 넣은 계피 쿠키, 아몬드가루와 꿀로 만든 사탕 등등, 먹자마자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질 만큼 달고 기름진 음식으로 가득한 식사였다.

 

물론 이것을 피하고자 밤바람이 쌩쌩 부는 한겨울에 옥상에 쪼그려 앉은 것만은 아니다. 둘은 지금 한 달이 넘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그놈의 혜성을 찾는 중이었다. 쌍안경은 라일리가 빌려준 것이었고 장소는 안나가 제공했다. 호스텔의 옥상은 원래 건물 전체가 사용하는 공용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안나의 지대한 관심사인 화분을 놓고 관리하는 개인 공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끼익, 후루야가 앉은 볼품없는 나무의자는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부러질듯한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그런데도 미유키는 싱글벙글이었다. 무슨 종교의식이라도 행하는 양 풀떼기에 둘러싸여 물 한 잔 떠다 놓고 하늘만 쳐다보는 이 행위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후루야로서는 아마도 평생 이해 못 할 취미였다.

 

“그 날 없어진 건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니라고요, 진짜.”

 

기어코 짜증 섞인 소리가 나왔다. 짓궂은 고등학교 선배가 그의 이런 반응을 즐긴다는 걸 잘 알면서도 왜 매번 곧이곧대로 행동하는지 모르겠다. 후루야에게 있어 신년 파티 때의 일은 잊고 싶은 수치였다.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소리치며 미유키를 잡던 꼴이라니, 생각만 해도 귀 끝이 달아오르고 목덜미가 간질거렸다.

 

우습게도 미유키가 그날 자는 후루야를 두고 자리를 떴던 이유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만든 일회용 컵 두 개를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그 안에 든 열두 개의 포도알. 주위에 일찌감치 자리 잡고 있던 이들이 사라졌다가 하나 같이 그걸 받아들고 오는 걸 보고 무심코 따라갔단다. 그리고 한참을 헤매다 골목 어귀의 작은 손수레에서 그걸 파는 걸 발견했고, 금전 감각도 없어 후루야가 나중에 듣고 아연실색한 가격을 지불한 후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사이 일어난 후루야는 영문도 모른 채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그를 찾았던 것이고. 미유키는 시들어 빠진 청포도를 먹으며 나름 괜찮지 않냐고 물었었다. 당시 후루야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는데, 대뜸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지는 한참 나중에 떠오른 의문점이었다.

 

“어.”

 

왜. 미유키의 대답이 0.1초 만에 돌아왔다. 잠시만요. 뭐가 잠시만이야.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왜 놀라. 실수할 수도 있죠. 그게 뭐야,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기다려보라니까요. 그거 이리 줘봐. 잡아당기지 마요. 옥신각신 다투던 사이 얄팍하게 깔렸던 구름층이 걷히고 어렴풋한 혜성의 꼬리가 드러났다. 맞아요, 혜성. 그렇게 소리치자마자 쌍안경을 빼앗겼다.

 

“……혜성이네.”

“혜성이네요.”

 

누구누구가 온갖 난리를 친 것에 비교하면 허탈한 소감이었다. 뉴스에까지 떴던 천체현상은 남쪽 하늘의 지평선, 오리온자리의 가장 밝은 별을 끼고 희미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쌍안경으로 보아야 겨우 식별할 수 있는 꼬리가 그것이 혜성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단 하나의 증거였다. 와아아. 늘어지는 감탄사를 내뱉은 미유키는 페인트칠이 벗겨진 난간 위에 쌍안경을 내려놓고 맨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의 한 지점에 시선을 고정했다.

 

“신기하다.”

“하늘에 가끔 혜성도 있고 그런 거지, 뭐가 그렇게 대단해요.”

“봤다는 것처럼 얘기하지 마.”

“봤었어요, 한 번.”

“유성이랑 헷갈리는 거 아니야?”

 

후루야는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였어요. 일곱 살 정도. 할아버께서 공을 선물로 주셨고 그걸 매일 밤 던지고 놀았어요. 아직도 똑똑히 기억나요. 하늘에 혜성이 있었어요.”

 

어찌 보면 후루야에게 남은 제일 오래된 기억이었다. 따뜻하게 입고 나가야 한다는 잔소리를 들었던 걸 보니 겨울이었던 것 같다. 텅 빈 공터에서 공을 던지고, 받고, 또다시 던졌다. 지치지 않고 한 가지에 몰두해 본 건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즐거웠던 무언가를 경험해 본 적도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장담한다. 굉장히 서툴렀지만 휙 날아온 공이 어쩌다 한 손에 잡힐 때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한참을 그러고 놀다가 하늘을 바라보면 길쭉한 꼬리를 그린 별이 있었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다. 한 자리에 고정된 듯했던 천체가 실제로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건 항상 드러누웠던 나무의 위치와 대조해보고 깨달은 사실이었다. 거의 석 달 가까이 되는 시간을 공과 혜성과 할아버지와 함께 보냈었다. 새까만 밤하늘의 어떤 것보다 밝게 빛났던 그 별이 사라지기 전까지 후루야는 역사의 수호자라고 불렸던 그 혜성이 당연한 현상인 줄만 알았다. 원하기만 하면 나타나고, 바라고 또 바라다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기적.

 

“한심한 후배네.”

“그렇죠. 한심하죠.”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저를 돌아보는 미유키의 시선이 느껴졌다. 웃음기가 사라진 그의 얼굴에는 근심걱정만이 가득했다.

 

“사실은 잘 알고 있어요. 선배 때문이 아니에요, 그 경기. 다른 것도 같아요. 그 창고에서의 밤도, 이 여행과 내 마음도, 모두 내 선택으로 내가 주체가 되어 내 결정 하에 벌인 일이에요. 비겁하게 선배를 비난해서 미안해요. 내가 어떻게 됐었나 봐요.”

“후루야, 나는.”

“아니.”

 

후루야는 그의 말을 끊었다. 잠시만 들어주세요. 천천히 운을 띄우며 먼 지평선 너머 다시 한 번 자취를 드러낸 기적을 우러러보았다.

 

“책을 보면요, 선배.”

“…….”

“잊혀진 고대의 영웅이 나와요. 자신이 다스리는 땅을 수호하는 왕족의 핏줄들이요. 적들에게서 도시를 지키거나,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리거나,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무모한 줄 알면서도 뛰어들거나, 상상도 못 할 일을 해요. 전장에 나가서 용맹하게 싸우다 잡히면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죽고 적군은 시체를 마차에 묶어 끌고 다녀요.”

“……요새 대체 무슨 책을 읽는 거냐?”

“그런데 말입니다, 이 영웅을 수호하는 건 신들이더라고요. 그들은 뒤에서 격려하고, 따끔하게 혼도 내고, 충고도 하고, 가끔은 교묘한 계략을 부려 자신이 수호하는 영웅에게 유리하게 일을 꾸며요. 어쩌다가 대신 싸워주기도 하고, 위험에서 구해주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다 영웅이니까 그런 거겠죠. 인간이면서 남들이 하지 못 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럴 용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후루야.”

“용기는 가지고 태어나는 걸까요, 아니면 혹독한 훈련 끝에나 가능할까요. 나는 그런 사람이 되는 데 실패한 걸까요? 그들은 자신이 신의 가호를 받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그런 믿음이 있었다면 괜찮았을까요.”

 

물밀듯 감정이 몰려온 건 비단 옛 추억을 상기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잊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던 과거는 너무나 견고하게 싸두었기에 반대로 썩지도, 바스러지지도 않아 언젠가부터 후루야의 가장 추한 흉터로 자리 잡았다. 하지 않은 것, 해야 했을 것,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 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 고스란히 후회로 똘똘 뭉치고 고통으로 점철되어 어디를 가든 후루야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그것은 망각을 모르는 고뇌였다. 유념이고 멍에였다. 덮지 않은 책과 같은 미련으로 남아 지금도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호흡을 막고 폐부를 찌르곤 했다.

 

“나의 하루는 밤에 시작됩니다.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기 직전, 의식 너머 깊은 바다로 가라앉는 순간. 그때 기도를 해요. 바라는 건 기적이고, 그래서 평생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 빠집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스물다섯의 제가 있어요. 일곱 살 때부터 하나도 자라지 못한, 그래서 열여섯에 모든 현실이 드러나 버린.”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달라졌으면 바랐다. 이기적이고 어리석다는 건 알지만 정말 아무 노력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자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새벽에 일어나 훈련을 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며 단 숨이 턱 끝에 차오를 때까지 뛰고, 수많은 벽을 마주해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한때 자신이 당연시했던 것들은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으나, 이렇게 된 것도 한순간이었으니 괜찮아지는 것도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오지 않을까,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몇 년을 살았다.

 

“선배는 그날 왜 저랑 잤습니까? 위로해주려고 했던 거예요? 아니면 그냥 불쌍해서? 어쩌다 흐른 분위기에 몸을 맡기다 보니? 한심한 자식이 안쓰러워서? 보고 있기가 힘들어서 어떻게든 닥치라고?”

“어떻게 그런 결론을 낼 수 있는 거냐.”

“나는 싸구려 동정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게 당신에게서라면 더더욱.”

“그런 적 없어.”

“그랬잖아요.”

“안 그랬어.”

“그랬다고!”

“정신 차려!”

“정신은 당신이 차려!”

 

가슴 속에서 눌러왔던 것이 울컥 휘몰아쳤다. 시선 끝으로 그가 움직이려 하는 것이 보였다. 손을 뻗어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눈앞에서 또 사라지려는 줄 알았다.

 

“나는!”

“…….”

“당신을!”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쏟아낼 수 있을 줄 알았던 말이 이상하게 나오지 않았다. 생각은 머릿속에서 확실한 언어로 구체화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차오른 단어는 잇새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너는, 나를?”

 

미유키의 두 눈에 잔잔한 눈웃음이 서렸다. 후루야는 달싹이는 아랫입술을 씹었다가 풀었다.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말 못 하겠어?”

“…….”

“난 할 수 있어. 좋아해.”

 

구명줄처럼 그의 어깨를 그러잡았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쉬워서 대답 대신 하, 커다란 헛숨이 터졌다. 하고 싶었고, 할 수 있었고, 하려고 했으나 끝끝내 하지 않았던 고백.

 

“내가 원하는 건 너야. 그때나 지금이나 너 아닌 다른 누군가를 생각한 적 없다.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 하나뿐이었어. 그래서 그 밤에 너를 데리고 간 거야. 아무도 없는 구관의 창고로.”

 

후루야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가 해주는 이야기는 자신이 기억하는 바와 전혀 달랐다. 그 밤, 팔을 잡아끌던 이는 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분명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이 있고 네가 날 찾아왔어. 넌 정상이 아니었어. 핏기가 없고,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손이 얼음장 같았고……. 난 무서웠던 것 같아.”

 

후루야는 입술을 씹었다. 두텁게 드리웠던 장막이 서서히 걷히면서 오래전 망가져 다신 고칠 수 없다 여겼던 퍼즐이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여긴 아무도 안 와. 보수가 안 끝났거든. 그리 말해주었던 얼굴은 이제껏 추리극의 어두운 배경에 선 범인처럼 검디검은 베일에 싸여 있었었다. 그러나 도통 떠오르지 않았던 얼굴에 점점 실체가 생기고, 그건 다시 눈앞의 인물로 바뀌었다.

 

“넌 나한테 어쩌면 되는 거냐고 물었어. 이제 뭘 해야 하느냐고. 머리가 텅 비어서 방법도 모르겠다고, 어떻게 할지 가르쳐달라고 했어. 그때 내가 했던 말을 아직 후회해. 도움을 청하러 온 널 내 이기심에 이용한 것도. 넌 나 때문이 아니라고 하지만, 난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다. 미안해. 아마 평생 거둘 수 없는 나만의 짐이겠지.”

“……여기엔 왜 왔어요?”

“보고 싶어서.”

 

마음속에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그 날 밤 미유키는 괜찮을 거라 했었다. 누구나 겪는 관문이라고, 도와줄 테니 내일부터라도 열심히 하자고. 냉정히 따져 본다면 한없이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다른 누구였더라도, 하물며 자신마저도 그리 대답했을 것이다. 그 말을 하는 미유키는 다정했었다. 후루야, 라고 지금처럼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며 따사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었었다. 그래서 떠났다. 눈물이 날 만큼 사려 깊고 올곧은, 후루야의 생에 다시는 없을 선물을 또 실망케 하고 싶지 않았다.

 

“알고는 있냐, 인마. 넌 몇 년 전과 아주 달라.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나아. 내일은 아마 지금보다 더 나아져 있겠지. 이건 비단 내 감정 때문만은 아니야. 그냥 네가 그렇게 괜찮은 놈이기 때문이야.”

“꼭 그렇지는.”

“물론 그러다가 하루쯤은 좀 덜 괜찮겠지. 딱 봐도 티가 날 정도로. 네가 자주 그랬듯, 아침부터 짜증을 내고 매사에 예민하고. 어쨌든 다음 날엔 달라질 거야. 좋아지든 나빠지든 미래는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가끔 생기는 기쁨이 더 아름다운 거야.”

 

후루야는 무릎을 꿇었다. 더는 서 있을 힘이 없었다. 나도 좋아해요, 선배. 하지만 너무 힘들어요. 고장 난 영사기처럼, 끝없이 돌아가는 핀이 나가버린 턴테이블처럼 똑같은 문장을 거듭 반복했다. 미유키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알아. 그래. 맞아. 그저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썩은 고목처럼 바닥에 무너져내린 후루야의 앞에 쪼그려 앉아 마찬가지로 같은 답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분명 실패할 거예요.”

“어떻게?”

“괜찮아지지 않을 거라고요. 이대로 쓸모없을 거예요.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죠.”

 

그것이 정말로, 가장 깊은 곳에,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진심이었다. 이 방황은 과거의 영웅이 잠시 느끼는 좌절 따위도, 삶에서 필연적으로 맞닥뜨리는 벽을 향한 짜증도 아니었다. 여행 중 어쩌다 흘러 들어가는 호스텔에 공짜로 머물며 무보수로 일하는 떠돌이로 8년을 살았다. 그마저도 지쳐 내리 삼 년을 한 도시에.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묻은 채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는 겁쟁이. 바로 감추고 싶었던 후루야 사토루의 본 모습이었다.

 

“난 힘들어요. 일어나지 못하겠어요. 나를 일으키는 건 나이기 때문에 결국 이 상황에서 꺼낼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해도 일어나기가 힘들어요. 이렇게 뒤처져 있으면 안 되는데. 나 빼고 다들 열심히 사는데. 나는 벌써 늦어졌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해가 졌다가 뜨고, 밤이 후딱 지나 아침이 오고 그보다 더 빠르게 오전과 오후가 흐르고, 또 하루가 지났고 달력의 숫자가 늘어났다 리셋되고 그러다 보면 한 해가 훌쩍 지나 있고.”

“후루야.”

“열심히 하고 싶어요. 그런데 쉽지 않아요. 아니……. 쉬운데 하지 않아요.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해야 할 일들로 향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안 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도 않으면서 모르는 것만 많아서 더 한심해요.”

“괜찮아.”

“하지만.”

“괜찮아.”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눈꼬리부터 입 언저리까지 눈부신 미소만이 가득했다.

 

“너는 이때까지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이제 좀 쉬어도 돼.”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눈물이었다. 후루야는 울먹이는 얼굴을 어깨에 묻었다. 선배는 등을 다독이며 사과했다. 그 당시의 저를 보고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냥 보고 있기 힘들었다고. 괴로워하는 후배를 앞에 두고 어떻게든 고쳐야 한다는 압박뿐이었다고. 그래서 지금은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미유키의 셔츠 자락에 눌러 닦으며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절망은 너만의 것이니 내가 지울 순 없고, 그렇다면 그것마저 사랑하기로 했어.」

 

한심한 후배는 조금 더 울었고, 그러고 나서는 웃었다. 한참 미유키의 품에 안겨 실없는 소리를 하다가 감정이 북받쳐 또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진짜 그쳤다고 하자 그는 이제부터 뭘 할 건지를 물었다. 다만 다그치는 것이 아닌, 만약에, 가령, 어쩌면, 이런 단어를 써 가며 나지막하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후루야는 아이처럼 웃었다. 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어투가 참을 수 없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들은 이제 어른이었으니 이상하다 느낀 자신이 이상한 것이었다. 어쨌든 웃었다. 그 일 이후 웃으려 할 때마다 가슴을 내리누르는 납추 같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후루야는 즐거웠다. 뭐가 그렇게 심각했던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돌아가는 거야?”

“그전에 잠시 여행 좀 하고.”

“지금까지 했던 건 뭐였는데?”

 

도망. 회피. 숨바꼭질. 비겁한 후퇴. 무모한 포기. 아마도 그때의 후루야였다면 그렇게 둘러댔을 것이다. 이제는 정확한 답을 알았다.

 

“휴식.”

“…….”

“난 피곤했었나 봐. 그냥 좀 쉬고 싶었어.”

 

잘됐네. 라일리는 그렇게 말하고 악수를 청했다. 옆에 섰던 안나도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어디 어디 갈 거야? 우선은 그리스. 다음은 터키. 시간이 되면 카자흐스탄. 어젯밤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미유키와 정했던 리스트를 읊었다. 다들 신이 나서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여행을 업으로 삼는 젊은이들의 열정은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하기 마련이었다. 그곳에 도착하면 어느 도시가 좋다든가, 어느 골목의 어느 가게가 싸고 맛있다든가, 술을 사려면 어디가 가장 손쉽다든가. 모두 저 좋을 대로만 던져주는 정보는 방대하고 두서가 없어 아마도 후루야가 전부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래도 귀 기울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인연이란 별 의미 없이 찾아와 언제나 가장 큰 흔적을 남기고는 사라지는 것이니 분명 그리울 때가 올 것이라 예감했다.

 

모든 인사가 끝나고 후루야는 미유키의 손을 잡았다. 지난 몇 해 집으로 여기며 지내던 보금자리를 떠나는 발걸음이 믿을 수 없이 가벼웠다. 머릿속에는 그간의 추억과 고생이 빠르게 스쳐지나갔으나 가슴만은 고요하게 뛰었다. 물론 근거 없는 희망은 아니었다. 새로 시작하리라 굳건히 다짐했지만 얼마 안 가 또 슬퍼하고 좌절하는 순간이 찾아올 걸 잘 알았다. 다만 새로운 기적의 시작인 걸 믿었다. 구원은 예상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경험했다. 일곱에는 야구를 시작했고, 열여섯에는 여행을 떠났으며, 스물다섯엔 내미는 손을 맞잡았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온기는 힘들었던 만큼 평생 변치 않을 것이 그의 곁에 있다는 증거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후루야는 눈앞의 문을 밀어 열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산봉우리 위의 나무였다. 뭍으로 나누어진 대양이었다. 태초부터 시작해 끝없이 팽창하는 진공 속의 태양계 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다. 그리고 전부였다. 그는 상대의 모두였고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굽이친 길을 돌아 돌아 비로소 찾아온 건 어렸던 시절의 미숙함으로 인해 갈라선 마음이었다. 오해는 사람을 돌아서게 하지만 또 하나가 되게도 해서, 정말로 간절할 때만 이루어지는 마법의 주문으로 변해 앞으로 나아가고픈 이들의 길을 밝혀주었다.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훨씬 더 커다란 현상의 시작이었고 그래서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날 기적을 보았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