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크리미유 북클럽에 냈던 회지입니다.

* 성관계에 관한 묘사가 있습니다.

 

 

 

 

 

“옆집 남자?”

 

쿠라모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안 듣는 척하면서도 제대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뜻이다. 미유키는 고개를 저으며 검지를 세워 허공을 가리켰다.

 

“아니, 윗집. 옆집에 있는 건 야마다 씨고. 저번에 놀러 왔다가 한 번 봤잖아?”

“아, 기억난다. 그 음침한 자식.”

“좀 변태 같긴 해. 특히 마주치면 허벅지만 쳐다보는 게.”

 

뜻을 이해함과 동시에 천천히 구겨져 가는 친구의 표정이 제법 괜찮은 안줏거리다. 미유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맥주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잘만 실실거리던 놈이…….”

“어쩌겠어. 이 몸 허벅지가 워낙 살인적이어야지.”

 

다소 과장된 손짓으로 테이블 밑의 다리를 가리키자 반쯤 젖은 종이 코스터가 이마 정중앙을 향해 날아왔다. 별 어려움 없이 잡아 몇 미터 떨어진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던지는 놈이나 받는 놈이나. 이 정도면 직업병 아닐까.

 

“그러면 옆, 아니. 윗집 사람 앞에서 흔들어보든가. 그 잘나신 허벅지.”

“…….”

“…….”

“……쿠라모치.”

“그만! 알았어! 그래! 너 자식이 안 해봤을 리가 없지!”

 

쿠라모치는 의문의 옆, 아니, 윗집 이웃에게 허벅지를 내미는 동료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 하는 놈인데?”

“몰라.”

“나이는?”

“몰라.”

“이름은?”

“몰라.”

 

성의 없는 대답만큼이나 미유키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정확히 말해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의 액정 위에. 현재 시각 오후 11시 17분. 8로 바뀌는 끝자리에 시선을 고정한 그를 보며 쿠라모치는 짜증 섞인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아는 게 뭐야?”

“얼굴이 끝내줘. 목소리도.”

“얘기는 제대로 해 봤어?”

“아니.”

“……이름도 모르고 얘기도 못 해 본 놈 생각하느라 밤에 잠을 못 자고 경기에 집중이 안 된다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진 알겠는데…… 목소리 끝내준다고 내가 얘기했었나?”

 

이 자식이 진짜, 중얼거리는 쿠라모치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넌 대체 그놈이 어떤 놈인 줄 알고 그래?”

 

옆 테이블이 돌아볼 정도의 고함이었다. 물론 미유키 카즈야는 이런 거로 화를 낼 필요 없는 어엿한 어른이다. 하지만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는 일본 최고의 행동형 두뇌파가—이번 달 종합지에 실린 웃기지도 않는 단독 인터뷰를 인용하자면—얼마나 심각한 수준의 외골수가 될 수 있는지는 그와 고등학교 때부터 동창이었던 쿠라모치가 제일 잘 안다. 자연히 우려될 수밖에.

 

“이상한 놈일 수도 있고! 사채업자일 수도 있고! 애인 갈아치우는 놈일 수도 있고! 아니, 애초에 그쪽이 아닐 수도 있고!”

“이놈, 저놈 소리 그만해. 모르는 사람한테. 버릇없잖아.”

 

방금까지 옆집 사람을 변태라고 칭하고선 지적질 한번 뻔뻔스럽게…… 쿠라모치는 팔짱을 끼고 또박또박 잔소리를 하는 미유키 앞에서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찰 지경이었다. 이 자식, 빠져도 단단히 빠졌잖아. 반쯤 일으켰던 몸을 털썩 의자에 묻으며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관자놀이를 엄지와 검지로 문질렀다.

 

“그럼 뭐라고 불러주련?”

 

십년지기 친우의 매끈한 미간에 깊은 줄이 하나 새겨지는 걸 보면서.

 

“……9층 미남?”

 

 

 

 

dressed to the nines

 

 

 

마지막 모퉁이를 돌며 걸음을 늦췄다.

 

아무리 치밀하게 시간을 계산했다 해도 항상 정시를 맞추는 건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 어리숙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고. 아무렇지 않은 척 빌딩 바깥에서 기다리기에는 수상해 보이고. 마지막으로 시간을 체크한 후 부자연스럽지 않을 정도의 여유를 두고 뒷주머니에서 출입 카드를 꺼냈다.

 

빙고.

 

미유키는 숨을 삼켰다. 불투명한 강화 유리문이 양옆으로 열리면서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선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흠집 하나 없이 깔끔하게 빗어넘겨 정돈한 머리와 반듯한 어깨를 꼭 감싸는 네이비 정장. 재킷의 더블 벤트를 따라 떨어지는 엉덩이 선과 그 밑으로 뻗은 긴 두 다리가 흡사 대리석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미유키 카즈야의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이자 불면의 주범이었다. 최우선 순위 목표. 일생일대의 과제. 수수께끼의 미남자. 오로지 그만의 열두 시 신데렐라.

 

“안녕하세요.”

 

미유키는 입가를 의식적으로 끌어올리며 인사를 했다. 참고로 이건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표정 중 하나였다. 부담 갈 정도로 과하지도, 삭막하다 느낄 만큼 덜하지도 않은 미소. 다년간 수많은 이들 앞에 나서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이로써 자의 반, 타의 반 갈고 닦아 왔던 대인 능력이었건만 이제는 그의 업인 야구 다음으로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이 비장의 무기 앞에서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처럼,

 

“안녕하세요.”

 

완벽함, 그 자체였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조화로운 음조, 필요 이상으로 벌어지지 않는 입술, 정확하게 십오 도로 까닥였다 돌아온 고개, 가방을 든 오른손과 팔꿈치에서 굽혀져 주머니에 들어간 왼손과 그리고 이 모든 찰나 조금, 아주 조금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깊은 눈꼬리.

 

미치겠네.

 

미유키는 고요한 정적이 도는 로비에 서서 남자의 뒤통수를 보며 소리 없는 절규를 질렀다. 그랬다. 남자는 오늘도 빈틈없었다. 이때까지의 패턴으로 봤을 때 예상했던 사실이지만 정작 마주하니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문득 걷힌 재킷 사이로 살짝 당겨 조여진 사이드 어저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저걸 조일 정도면 허리 사이즈가 어떻게 되는 거지?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어깨가 넓다는 건 진작에 파악했었다. 저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큰 키도.

 

이렇게까지 완벽한 건 반칙 아닌가.

 

단언컨대 남자가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였다면 이런 고생도 없었을 것이다. 슬리브 밑으로 빠진 셔츠 소매가 0.5센티미터 더 길었더라면. 더비 구두의 끈이 약간이라도 흐트러졌더라면. 척 보기에도 비싼 옷감 위에 주름 한 줄이라도 있었다면. 그러면 이렇게까지 긴장하진 않았을 거다. 초조한 동작으로 마른세수를 하던 미유키를 향해 돌연 남자가 웃는 얼굴로 손짓을 한다. 그 끝에는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말없이 손바닥을 펴 먼저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마주하고, 미유키는 그 자리에서 심장을 부여잡은 채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마디로 이번에도 완전한 실패라는 소리다.

 

이 일의 시작은 어느 느지막한 늦여름의 밤부터다. 미유키는 고등학교의 막바지 무렵 어렵지 않게 지명을 받았다.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첫 거주지는 졸업하자마자 몸담게 된 구단에서 제공하는 숙소. 당연한 이치였다. 미유키의 본가는 도쿄에서도 아주 먼 외곽이었고, 구장은 시내 한 가운데였으며, 소속된 팀의 숙소에서 지내는 건 그에게 몸에 밴 습관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미유키 카즈야란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패턴화된 일상에 강한 성정이었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숙소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이 몇 년, 어느 날 나갈 의향이 없냐는 제의를 받았다. 매니지먼트에서는 건물 리모델링을 핑계로 댔지만 이제 중견에 접어들기 시작한 선수에게 흔한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보통은 결혼 때문이든 뭐든 알아서 나가겠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미유키를 두고 구단도 적잖이 곤란했을 거다. 뭐, 저도 언제까지나 숙소에서 살 생각은 아니었으니 문제 될 건 없었지만.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알아본 곳이 지금 이곳이었다. 구장에서도, 원래 묵던 숙소에서도 멀지 않은 고급 맨션. 도심의 한가운데라는 특성상 시설은 최상이었고 가격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벽같은 보안을 자랑했다. 무인 로비는 CCTV로 사립 경비의 상시 감시하에 있고 카드가 있지 않으면 아무나 들어오지 못한다. 반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누가 누구를 데리고 어디에 들어가는지 철저히 비밀에 부칠 수 있는 구조였다. 쉽게 말해 돈은 많고 시간은 없고 정체는 숨기고 싶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시스템. 미유키는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구설수에 오르내릴 사생활을 향유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이로써 조심해서 나쁜 것도 없지 않은가.

 

이 평안한 일상이 깨진 것이 무려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계절에 맞지 않는 메마른 바람이 쌩쌩 불어오던 자정이었다. 장소는 맨션 앞. 드문드문 생기는 술자리에서 겨우 빠져나와, 어딘가 던져놓은 정문 출입 카드를 찾아 스산한 추위에 몸을 떨며 가방을 뒤지는 중이었다.

 

「들어가시죠.」

 

미미한 높낮이가 너무나 완벽한 톤이라 처음에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 줄만 알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목소리만큼이나 흠잡을 데 없는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내리자 그에 못지않은 몸이. 자동문이 닫히지 않게 직접 막아서고, 친절하게 엘리베이터의 버튼까지 눌러주는 매너는 덤이었다.

 

이 이후 무슨 마법 같은 조화인지는 몰라도 남자는 언제나 자정의 시각에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열두 시 정각을 가리키는 분침이 눈금을 옮기기 전에 로비 정문을 열기만 하면 되었다. 처음엔 맨션에 붙은 귀신이라도 되나, 의심했었다. 그러나 매일매일 바뀌는 정장과 거기에 훌륭히 매칭되는 구두는 미유키의 상상력을 뛰어넘고도 남는 세련됨이어서 일찌감치 그 생각도 접었다. 이런 귀신이면 기꺼이 홀려줄 의향도 있었다. 진짜 사람이면 더 좋고. 저 바지 안에 있는 게 뭐가 됐든 제 손으로 한 번 만져보고 죽어야 여한이 없을 것 같았으니까. 같은 맨션의 거주민이라는 게 좀 걸리기는 했으나 못할 것도 없었다. 미유키는 이 부분에서는 근거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시도해 본 적만 없다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누가 됐든 꼬시는 건 시간 문제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미유키가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 빠진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 갔다.

 

대체 뭘 어떻게 하든 이 과묵한 남자에게서 간단한 반응 외에 끌어낼 수 있는 게 없었다. 묵례와 기본적인 인사와 예의 이상은 없는 미소. 둘 사이에 그것 말고 다른 것이 오간 적은 없다.

 

뭐 하긴, 그럴 만했다. 이웃사촌은 현 사회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지 오래된 개념이다. 같은 곳에 산다고 꼭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게 하물며 오성 호텔 마냥 세 층을 아우르는 거대한 로비를 구비해놓고 지하주차장부터 집 문 앞까지 누구의 눈에 띄지 않게 도달할 수 있는 구조의 맨션이라면 더더욱. 평균 시가보다 훨씬 웃도는 세를 주고 이런 집을 구하는 사람들이 찾는 건 역시 프라이버시다. 개인의 사생활을 간섭받지 않을 권리, 불편을 감수하고 타인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보장, 등등.

 

물론 미유키가 원하는 것도 이런 것이었고. 아마도. 살을 저미는 칼바람이 불어오는 한밤중, 생소한 남자의 손이 닫히는 자동문을 막아주기 전까지는.

 

미유키는 바짝 말라가는 목을 쓸었다. 최대 정원이 스물네 명인 거대한 엘리베이터는 과장 조금 보태 캐치볼을 할 수 있을 만큼 넉넉했으나 이상하게도 벽이 옥죄어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다만 불쾌하기보다는 등줄기를 타고 묘한 전율이 흐르는 긴장감처럼. 미유키는 사방으로 폐쇄된 공간에 남자와 단둘이 갇힐 거라는 심리적 흥분을 이유로 들기로 했다. 이제 곧 문이 닫히고,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벽에 기대서고, 미유키의 목적지인 8층에 도달할 때까지 엘리베이터는 숨 막히는 침묵만이 감돌 것이다. 적어도 지난 한 달간의 평범한 전개에 따르면 그러했다. 이 이상의 기대를 하면 안 됐다. 단지 내리기 전 스쳐 지나며 교환할 찰나의 눈짓만이 미유키에게 남은 유일한 즐거움일,

 

“오늘 일이 많이 피곤하셨나 보군요.”

 

……그러나 아무래도 오늘은 그 평범한 날이 아닌가 보다.

 

“네. 뭐.”

 

애매하고 무성의한 대답을 내뱉고 미유키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무심한 척을 해 보여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티를 내도 모자랄 판에. 한편 머릿속에서는 남자가 왜 이리 느꼈을지 그 까닭을 짚어보느라 바빴다. 옷차림? 언제나 그랬듯 트레이닝복이다. 안색? 도통 거울을 보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아니면 표정? 이래 봬도 두뇌 싸움을 승부수로 내거는 포커페이스 지향의 플레이어인데, 표정이 흔들렸을 리가.

 

그러나 남자는 미유키의 건성 없어 뵈는 태도를 그다지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다. 되려 뒤를 돌아보며 정중하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고개를 한 번 까닥이는 것이었다.

 

“실례합니다. 말하고 보니 과한 참견이었군요.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대고 미유키가 할 수 있는 답이 뭐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다? 과하긴 한데 당신이라면 뭘 해도 괜찮으니 계속 참견해달라?

 

엘리베이터에는 다시 한번 정적이 깔렸다. 미유키는 서 있는 바닥을 깨부수고 땅속으로 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자가 제게 말을 다시 걸 확률이 얼마나 될까. 0.1, 아니, 0.05. 머릿속으로 의미 없는 숫자를 떠올리며 문득 모든 게 허무해졌다. 아마 현실과의 괴리 같을 무엇. 쿠라모치의 말마따나 이름도 모르고 대화도 못 나누어 본 남자와 마주치기 위해 자정까지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홀짝이다가, 일상 수준의 안부 한 마디를 겨우 받고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로맨스의 확률을 계산하고 있는 애처로운 제 처지가.

 

“실은요.”

 

그래서일까. 입을 연 것은 미유키 자신도 모를 충동에 휩싸여서였다.

 

“벅찰 때가 많아요. 웃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정작 화나고 초조할 때가 더 많은 직업인데, 사람들은 항상 미소로 끝나길 바라더군요.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닌데도.”

 

뜬구름 잡는 소리가 제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걸 인지한 때는 ‘미소’와 ‘가벼운 마음’ 사이 어딘가쯤이었다.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미유키 카즈야. 오늘부로 공식적으로 미친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의 지나가는 인사에 느닷없이 온갖 인생사를 줄줄 토로하는 한심한 영혼.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재미없는 이야기를 했군요.”

 

미유키는 진지하게 사과했다. 엎질러진 물이다, 그리 생각하고 털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0.05도 이젠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짧은 한 달 동안 어쩔 땐 풋풋하고, 또 어쩔 땐 양심 없이 문란한 수많은 판타지 속에 존재해줘서 감사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고 하면 이상한가요?”

 

그러나 미유키가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작별 인사를 고하는 동안, 남자의 거룩한 입술이 0.05를 밑도는 확률을 깨고 기적적으로 열렸다.

 

“이해가 될 만큼 평소 웃는 일을 하시는 건가요?”

 

이번엔 좀 더 매끄러운 대화인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미유키는 어느새 땀이 차 축축해진 손바닥을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아무래도…… 그렇죠.”

 

남자의 얼굴에서 항시 돌던 웃음이 사라졌다.

 

“본업이 무엇이 됐든 결국에는 몸과 얼굴을 파는 직업이니까요.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미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딩, 맑은 신호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텅 빈 복도에 혼자 남은 미유키의 입에서 의미심장한 웃음이 흘렀다.

 

몸과 얼굴을 판다고. 직업으로.

 

 

 

 

 

“모델?”

“그건 좀.”

“왜? 몸 좋다며.”

“그…… 생긴 게. 좀 꽉 막혔다고 해야 하나. 덜 자유스럽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그건 아니야.”

 

들고 있던 맥주병을 입에 댄 채 생각에 잠겼던 쿠라모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배우?”

“그것도 좀.”

“왜? 잘생겼다며.”

“그게, 생긴 게 너무 깔끔하다고 해야 하나. 지나치게 금욕적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아니야.”

 

급기야 쿠라모치의 입에서 짜증 섞인 욕지기가 터져나왔다.

 

“됐어. 안 해.”

“그러지 말고, 응? 본업은 따로 있는데 사이드로 몸과 얼굴을 파는 직업. 뭐가 있지? 쿠라모치. 잘 생각해 봐, 좀.”

“아, 진짜 귀찮게……. 몰라. 호스트?”

 

참나, 코웃음을 치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밤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고 입술이 벌어졌다. 어마어마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이 어이가 없어 쿠라모치는 맥주병의 끝부분으로 미유키의 이마를 툭 내리쳤다.

 

“당연히 아니지, 이 자식아. 퇴근 시간 칼이라며?”

 

아. 낮은 탄식이 적잖이 실망한 투다.

 

“왜 실망을 해……?”

“아니. 난 돈의 힘이라도 빌려볼까 하고…….”

“답답한 놈일세. 직접 물어본다, 솔직하게, 딱 까놓고. 그런 옵션은 없어? 네 인생엔?”

“응.”

 

쿠라모치의 입이 기어이 일자로 다물렸다. 미유키는 다소 과장된 윙크를 했다.

 

“요컨대 게임인 거지."

“게임?"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정한 스포츠 선수가 아니지 않겠어?”

 

 

 

 

 

“혹시 모델이세요?”

“……네?”

 

 

 

 

 

첫 번째 착각. 미유키 카즈야는 게임에 약하다.

 

경쟁 스포츠를 업으로 삼는, 이래 봬도 한 분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내로라 하는 선수였다. 그러나 다년간 갈고 닦은 공적 재능과 타고난 개개인의 사회적 역량은 엄연히 다르다는 걸 미유키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만난다고 하기에 9층 남자와 미유키의 연은 지지리도 얇디얇았지만—서로의 상호 적합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두뇌 싸움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가. 시작부터 다짜고짜 「생긴 게 취향이니 옷 벗고서도 마음에 드는지 봅시다」 라고 말할 순 없다. 설령 이게 궁극적인 목적이 맞다 해도,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란 실로 중요했다. 신속하지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척, 관심은 있으나 인생이 바쁘고 삶이 만족스러워 매달리지 않아도 잘 살 자신이 있는 마냥.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적 의례였다.

 

이 마인드 게임은 이론상으로는 야구와 다를 바 없다. 내가 지금 어떤 사인을 보냈을까? 안으로 칠까, 바깥으로 뺄까? 지금 들어오는 공은 노려야 할까, 보내야 할까? 이번 볼이 원하는 방향으로 들어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 모두는 물론 미유키가 아주 잘하는 게임. 타고난 센스와 절대 적다 할 수 없는 열정과 다년간의 반복된 훈련으로 숙달된 승부처. 그러나 맞붙는 것이 만약 감정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뇌 속에 확고히 적립된 이론이 있어도 성공적으로 실행하는 건 또다른 문제였다. 일은 바쁘고 연애는 힘겹고 인간관계는 고단했다. 단순히 육체적인 욕구만으로 피곤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성공이 보장되지도 않는 모험에 몸을 던지고 싶은 의향은 추호도 없었다. 온기가 필요할 때는 적절한 장소를 물색해 상호 목적이 맞는 상대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찾는다. 복잡한 승부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그러니 미유키는 이 게임에 형편없을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그라운드를 좌지우지하는 사령탑이라 해도 유니폼을 벗는 순간 스타트부터 망한 거나 다름없었으니.

 

“실례합니다.”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던 미유키는 닫히는 중이던 엘리베이터 문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기계적인 인사가 오간 후 오늘치 미유키에게 할당된 몫이 주어졌다. 남자의 매끈한 뒷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십몇 초의 시간. 미유키는 저번 주의 일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야 했다. 개인 사항을 물어본 건 처음이었다. 날씨나 안부나 느린 엘리베이터의 속도 같은 보람 없는 주제를 다 합친다 해도 아마 서너 번째? 그런 상황에서 대뜸 모델이냐고 묻다니. 아무런 전초전도 없이. 그것도 뜬금없이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중간에. 정신이 나간 거 아니면 미친 거 아니면 바보인 거다.

 

미유키는 한숨을 쉬며 차가운 엘리베이터의 벽에 기대어 섰다.

 

“이거.”

 

내리깐 시선 가장자리에 어떤 물체가 불쑥 들어왔다. 마디가 굵은 손이 휴대용 보온컵을 들고 있었다. 안의 내용물이 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남자의 은은한 미소와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짙은 커피 향이 금세 엘리베이터 안을 꽉 채웠으니까.

 

“새겁니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은데 드시죠.”

 

잠시 두 눈만 깜박였다. 이건 뭐지. 이제껏 매너 좋은 이웃으로서 절대 선을 넘은 적이 없던 사람이 돌연히 몇 계단을 훌쩍 뛰어넘어 버리면 어쩌라는 걸까.

 

미유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괜찮습니다.”

“커피 싫어하십니까.”

“그건 아니고요. 오히려 좋아하는데.”

“마셔요.”

 

귓바퀴를 따라 들어온 저음이 복부를 찌르르 울렸다. 미유키는 한 번 더 거절해볼까 고민하다 컵을 받아들었다. 손안에 퍼지는 온기는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에 딱 알맞은 섭씨 80도의 온도였고 짙은 밤갈색의 액체는 과부하 된 미유키의 뇌를 단숨에 날려버리고도 남을 강렬한 자극이었다. 벨벳을 덧씌운 듯 녹녹하고 부드러운 원두 향과 남자 특유의 또박또박한 발음이 주는 짜릿한 조화. 발가락까지 곱아드는 느낌이다. 저 단호한 명령을 한 번만 더 들을 수 있다면…….

 

남자의 손이 다가와 컵을 잡은 미유키의 손등을 감쌌다.

 

“어서.”

 

망했다.

 

 

 

 

 

“어쩐지 새디스트일 것 같지 않아?”

“꿈을 꿔라, 아주…….”

 

 

 

 

 

돌아온 주말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장을 본 건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다.

 

느긋한 오후 시간 전부를 주방에서 보내며, 간간이 건조대 위의 스테인리스 보온컵으로 시선이 갔다. 가족을 뺀 특정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하는 게 처음이라는 건 아주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이었다. 반쯤 얼이 빠진 채 기계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동안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얼굴이 있었다. 월요일 자정, 엘리베이터 앞에서 남자를 마주쳤을 때까지 줄곧.

 

“여기. 이거.”

 

반듯한 종이 상자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진정으로 놀란 표정이었다.

 

“호두 파이 좋아하세요?”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아무런 반응도, 대답도 없었다. 벨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다시 닫히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미유키의 손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부터 뜨거운 열이 올라 목덜미까지 화끈거렸다. 두루뭉술하던 우려가 순식간에 실체적인 위기감이 되어 미유키를 덮쳤다.

 

“별로 안 좋아하시나요?”

“아닙니다. 절대.”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 받을 거라고 예상 못 해서. 누군가 직접 만든 요리를 선물로 받는 건 처음이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선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그때 미유키는 그냥 망한 정도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머리 위의 하늘이 무너지고 발아래의 땅이 뒤집어지고 마음속의 바다가 들고 일어날 천지개벽이었다.

 

진짜, 정말, 진심으로 큰일이었다.

 

 

 

 

at sixes and sevens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음. 별 감흥 없는 동의가 돌아왔다. 9층 미남? 되묻는 쿠라모치는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뒤집어 폈다.

 

“이제 어쩌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

“뭘?”

“네 심정.”

 

미유키는 불경스러운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경악에 찬 표정이 되었다.

 

“댁이랑 섹스하고 싶으니 벨트 풀고 가까이 와 보라고? 못할 건 없다만 그 사람한텐 안 통할 것 같은데.”

“……고백 말이다, 고백. 방금 나한텐 잘했잖아. 사랑에 빠졌다고.”

“쿠라모치 요이치 군. 남사스럽게시리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을 어떻게 해?”

 

쿠라모치는 섹스하자는 말과 관심 있다는 말 중 어떤 게 더 남사스러운지 심각한 고민에 빠져야 했다. 당연히 전자였고, 아무리 궁리해 봐도 세상 누구든 똑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며, 따라서 여기서 미친 건 쿠라모치가 아니다. 맑은 화요일 아침부터 정신줄을 놓아버린 십년지기 동료인 거다.

 

나름 만족스러운 마무리를 끌어낸 쿠라모치는 하마터면 손안에서 구겨버릴 뻔한 종이 뭉치를 재차 고쳐 들었다.

 

“몰라. 그러면 우선 친해지든가.”

“그러니까, 쿠라모치. 그걸 어떻게 하냐고.”

 

 

 

 

 

미유키 카즈야는 친구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쭉 그래 왔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미유키는 바빴다. 여기서 말하는 바쁨이란 것은 세간에서 으레 말하는 유쾌한 분주함이 아닌 이를 악물고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녀야 함을 의미했다. 학생, 스포츠 선수, 주전 포수, 4번 타자, 주장, 이 모든 타이틀을 달았던 게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았던 고등학교 때였다. 지금 와서 형편이 나아졌을 리가.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밤에 눈을 감기 전까지 인생의 모두를 걸고 야구에 전념한 지 꼬박 두 자릿수의 해가 지났다. 그런데 친구라니, 그런 걸 만들 여유 따위가 있을 리 없다.

 

하기사 자처해 그렇게 된 거긴 했다. 한마디로 성격……인 걸까. 어떤 이들은 이게 제대로 된 삶이냐며 진작 그만두었을 수도 있겠으나 미유키의 경우 딱히 불만이었던 적은 없다. 사람이 그리울 때도, 마음을 열고 교감할 다른 이의 존재가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그건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익숙한 일상은 언제 어디서든 예외 없이 들이닥쳐 찰나 생긴 쓸쓸함을 단숨에 날려버리곤 했다. 가끔, 아주 가끔은 먼저 이를 극복하려 실행에 옮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후회에 빠졌다. 미유키란 사람은 원래부터 철저한 계획 하 반복되는 일련의 절차에 특출나게 강한 유형이었다.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을 즐기지만 그건 모두 치밀한 계산 후에만. 장기적 부작용이 없을 걸 확신하고 나서만. 무모한 모험은 그에게 하등 쓸모없는 객기였고 예상치 않게 불쑥 나타나는 예외란 최대한 지양해야 하는 오점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이 당혹스러울 수밖에.

 

달칵. 미유키는 스위치를 올렸다. 잠시 뜸을 들이고서는 다시 내렸다. 달칵. 그리고 다시 한번 올렸다 또 내렸다. 달칵. 달칵.

 

정전.

 

미유키는 언짢은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실로 오랜만에 옛 지인들을 만나 술자리를 가지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학창 시절 야구를 통해 알게 된 인연. 자주 만날 여건은 되지 않았으나 반은 강제적, 나머지 반은 자포자기를 담은 생존 신고를 위해 격년에 한 번꼴로 나가곤 했다. 정작 도착해서는 진심으로 즐기는 편이었다. 술도, 새로운 이야깃거리도, 청승스러운 과거의 회상도 넘칠 만큼 차고 돌아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이 되어서는 엉망으로 만취 상태인 것이 다반사였다.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미유키는 지금 굉장히 피곤하다는 거다.

 

이 마당에 정전이라니. 핸드폰을 꺼내 관리인의 연락처를 찾는 손길에 짜증이 다분히 섞였다. 몇 번이고 위로, 아래로 화면을 움직여도 원하는 번호를 찾지 못했을 때는 역정마저. 처음 이사 왔을 때 자잘한 보수를 위해 한 번 연락하고선 분명 저장해 놓은 것 같았는데.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봤자 적지 않은 양의 술이 들어간 뇌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란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휘청휘청 걸어 나가 맨션 앞의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리창 너머로 아직 불이 켜진 방이 드문드문 있는 걸 보니 이 거대한 맨션에서 정전된 가구는 미유키의 집, 한 군데인 모양이었다.

 

재수가 없으려니.

 

작게 조아리고 나서야 미유키는 ‘오늘따라 날카로워 보인다’는 옛 동료들의 말이 정확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자주 보지 않는 것치고 제법 나쁘지 않은 판별력이었다. 요즘 어딘지 모르게 가시 돋친 태도가 나온다는 건 누구보다 미유키 자신이 가장 기민하게 느끼던 참이었다. 이유야 뭐, 무엇 때문인지 뻔하고. 굳이 쿠라모치가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잘 안다. 철저히 야구와 윗집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유키의 현재 일과에서, 첫 번째가 관여된 부분은 날고 기는 중이었으니까 남은 건 하나뿐이다.

 

두 번째도 이렇게 돌아가면 좀 좋아. 미유키는 무릎 위로 교차시킨 팔에 턱을 묻었다. 다짜고짜 친해지라니, 대체 이런 조언은 어디다 어떻게 써먹으라는 거야. 그럴 수 있는 재간이 있었으면 일자무식으로 퇴근 시간을 맞추고 다녔을까.

 

다시 현 상황으로 돌아와서…….

 

고민이라고 하면 고민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하루에 남자를 생각하는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많고, 그 분량이 시간이 갈수록 늘어간다는 건 미유키도 인지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해도 가끔 절망적인 기분이 들게 되는 거다.

 

미유키는 소슬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코끝까지 올려 입은 점퍼의 틈을 통해 하얀 수증기가 나와 칠흑 같이 가라앉은 배경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취해서 헛것을 들은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정은 한참 전에 지났다. 그러나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 꿈이 아니라는 걸 단숨에 알았다. 제 앞에 선 남자의 얼굴에는 미유키의 상상 속에 출현하는 것과 비교가 안 될 만큼 환상적인 미소가 올라 있었으니 말이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면서 자신의 입가에도 포근한 미소가 번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다소 조심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미유키는 그제야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부는 계단에 쪼그려 앉은 자신의 행색이 꽤나 초라해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별건 아니고요. 산보.”

“이 밤에요?”

“밤이 아니고 새벽이죠. 그리고 산보에 시간은 관계없으니 말입니다.”

 

어깨를 으쓱이며 얼버무리자 다소 굳었던 남자의 표정이 환하게 풀린다. 다행입니다, 말하는 남자의 표정은 무척 진중해서 자칫하면 진짜로 미유키를 걱정했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주제넘은 말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셔서.”

“진짜요? 내가?”

“네. 지금 웃고 계시거든요.”

“아…… 네.”

 

남자는 알까?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미유키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는 것을. 적어도 눈앞의 이 사람과 우연을 가장한 고의가 아닌, 정말로 우연으로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좋아 보인다」는 게 「좋다」는 걸로 들리면 미친놈이다. 미유키도 그렇게 미친놈은 아니니 거기까지 착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좋아 보인다」는 게 「좋아서 지금 당장 팔을 잡아선 침대로 끌고 가 허리를 흔들고 싶다」 정도로 들리기는 했다. 좀 취해서.

 

……술이 원수지.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한밤중에 돌아온 집이 정전이니까요.”

“네?”

 

남자는 이 말을 뒤로하고 신속하게 움직였다. 미유키가 한 번도 목격한 적 없는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동작으로.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든 그는 단 두 번의 스크롤 후 관리인의 번호를 찾았다. 긴급 상황이 있으니 괜찮으시면 지금 당장 와주실 수 있겠냐는, 더없이 간략하고도 정중한 통화를 순식간에 마치고 곧바로 미유키의 손을 끌어 맨션 안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십 분 후, 필요한 장비를 모두 갖춘 관리인이 미유키의 집 앞에 도착했다. 간단한 점검 후 짧은 토론이 오가고, 수리하는 데 오늘 새벽을 넘기지는 않을 거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남자는 이제껏 멍하니 서 있기만 하던 미유키를 향해 물었다.

 

“괜찮으면 제집으로 가시겠어요?”

 

 

 

 

 

누군가가 미유키에게 사랑을 믿냐 묻는다면, 미유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 것이다. 누군가가 미유키에게 운명에 관해 묻는다면, 미유키는 그건 있든 없든 제 알 바 아니라고 넘길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미유키에게 현재 심정이 어떻냐 묻는다면, 미유키는 무형의 손이 목구멍 안을 쑤시고 들어와 뇌를 휘젓고 심장을 사정없이 쥐어짜는 중이라고 대답할 거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남자의 집은 미유키의 집 바로 위였다. 똑같은 정문과 똑같은 구조였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천차만별이었다. 미유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은 그 주인이 입는 정장만큼이나 정결하고 우아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가구는 적었으나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흔적은 미미했으나 그렇다고 냉랭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것마저 남자와 흡사했다. 칼같이 선을 지키지만 가끔 보이는 친절이 뿌리칠 수 없는 여운을 남기는, 던질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응어리. 미유키는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이는 이 앙금을 무어라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이웃 외에 남자가 어떤 존재인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편히 쉬다 가시죠.”

“…….”

“커피 한 잔이라도 드릴까요?”

 

반듯한 공간을 울리는 그에 못지않게 단정한 목소리. 미유키는 채도 낮은 담회색의 벽으로, 그보다 어두운 시멘트 그레이의 커튼으로, 높은 천장으로, 그 한중간에서 은은한 주백색 빛을 내는 조명으로 차례차례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 모든 것의 중심인 남자에게로.

 

“싫다면?”

“…….”

“편히 쉬는 것도, 그러다 가는 것도, 커피 한 잔으로 끝내는 것도.”

 

무슨 용기가 난 건지 모른다. 미유키는 천천히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팔 하나의 거리를 남기고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명치 부근의 허공을 배회하다 정갈한 남자의 턱선을 훑어 내려갔다.

 

“침대 파트너로는 뭘 좋아하는 편?”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답. 재촉하는 미유키는 어딘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술버릇이 심하시네요.”

“괜찮아요. 어차피 내일이면 다 까먹거든.”

“그건 안 좋은 거 아닙니까?”

 

하하, 미유키는 남자의 앞에서 처음으로 커다랗게 소리 내 웃었다.

 

“나름 좋은 점도 있죠.”

 

한 번 만지고 나니 훨씬 쉬웠다. 미유키의 손이 남자의 허리를 찾았다. 남자는 아직 재킷을 벗지 않은 채였다. 두 팔을 뻗어 부드러운 옷감 위로 어렴풋이 느껴지는 단단한 등을 가볍게 둘러 안자 자연스럽게 둘의 거리가 좁혀지고 가슴팍이 마주 닿았다.

 

“하룻밤이 간편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별로였으면 그건 그것대로 잊어서 좋고, 좋았으면 깨끗하게 미련이 남지 않아서 좋고. 그렇지 않으면 아침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못할 거고, 하룻밤은 다음 날 아침이 되고 독한 술은 구질구질한 아침 식사가 되고.”

“그렇군요.”

“물론 예외는 있어요. 단순히 좋은 정도가 아니라, 그 밤이 환상적일 경우.”

 

고개를 드니 코끝이 남자의 턱을 스치고 지나 입술에 살포시 닿았다. 조금 더 각도를 들자 깊은 시선이 있었다. 밀색이 감도는 금빛의 눈동자. 어두운 조명 아래 얼음 사이로 스며드는 위스키와 같은.

 

미유키는 절로 흐르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활짝 웃음 지었다.

 

“이렇게 생긴 건 사기 아닌가?”

 

남자의 입가도 옅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데요?”

“한판 뜨고 싶게.”

 

미유키의 팔을 어루만지던 손바닥이 순간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아. 이런 귀여운 반응이면 어쩌라는……. 미유키는 예의고 뭐고, 남자의 어깨를 밀어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혹시 이쪽 아니에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라는 거, 맞는다는 거?"

“……맞아요, 그쪽."

“남자랑 해본 적 있어요?"

“그건…… 네."

“아니면 하룻밤은 안 해?"

 

거기까지 가선 미유키의 바닥난 이성으로 판단하기에도 대담으로 넘길 수 없는 무모였다.

 

“댁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내 집, 여긴데.”

 

그리고 마지막은 이 상황에 쐐기를 박는 말.

 

“당신 아래.”

 

 

 

 

 

두 번째 착각. 미유키 카즈야는 필름이 끊기지 않는다.

 

적어도 가끔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뜨자 익숙한 침대 위였다. 옆에 난 창문으로 여유로운 오전의 햇살이 들어와 미유키와 미유키가 둘둘 말고 있는 시트 위에 내리쬐고 있었다. 누운 자세 그대로 몇 번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닫혔다 열릴 때마다 지난 몇 달간 지내왔던 방안의 정경이 차례차례 시야에 들어왔다. 미색의 천장. 활짝 열어놓은 방문. 질서 없이 방바닥에 늘어진 옷가지. 현관 언저리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스포츠 백. 그 옆에서 뒹구는 신발 한 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구 하나 없어 황망하게 빈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따라 마시고, 빈 물잔을 주방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고개를 드니 발코니 난간 위에 새 두 마리가 앉아 있다. 미유키는 잠시 주방 한가운데에 선 채 그 평화로운 광경을 응시했다.

 

그리고 짐승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기랄. 막말이 안 나올 수 없는 입장이지. 그렇지? 미유키는 깨질 듯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가슴 속에 고이 묻어놓았던 수많은 저속한 표현들과 욕지거리와 신랄한 비판을 참지 않고 열거했다. 대부분 본인에게. 그러다가 끊임없이 잔을 채우던 빌어먹을 동기들에게. 이따금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상황에. 미쳤구나. 미쳤어. 지금 상태는 다른 말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뇌를 깎아 새겨놓은 듯 선명하게 기억나는 어제의 모든 행동과 제가 보였던 추태와 무슨 정신에서 뱉었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말들을 되새기며 차마 형용할 수 없는 자기혐오에 빠져 매끈한 나무 바닥을 연속해서 내리쳤다. 어떻게 하면 고른 선택지 하나하나가 그 처지가 허락한 가장 최악이었던 거지? 기함할 판단력과 결과물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재기 불가능한 후회에 빠져 지금 당장 인생을 포기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주섬주섬 일어나서 씻고 나가긴 했다. 연습 때문에. 미유키 카즈야는 그런 남자였으니까.

 

 

 

 

 

윗집 남자를 다시 마주친 건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안녕하세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안녕하세요.”

 

마주 인사하는 그는 놀랍게도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태도였다. 언제나처럼 잠깐 숙였다 들린 고개와 얼굴을 장식한 온화한 눈웃음. 지난 한 달 반 동안 미유키가 보아왔던 그대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향해 쭉 뻗는 곧은 손가락.

 

“그, 아래, 아니. ……8층이시죠?”

 

죽을까.

 

 

 

 

three sheets to the wind

 

 

 

“쿠라모치.”

“왜.”

“고통도 뒤끝도 없이 가장 간편하고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 하나만 대 봐.”

“누굴 죽이게?”

“나.”

 

쿠라모치는 들고 있던 종이컵을 아랫니로 씹으며 눈을 굴렸다.

 

“……글쎄다. 네 허벅지?”

 

 

 

 

 

그 이후 미유키는 남자를 피해 다녔다. 유행병에라도 걸린 마냥,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다시는 없을 적극성을 동반해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술과 약속과 자정의 엘리베이터를 멀리하기만 하면 되었다. 착실한 칼퇴근과 건전한 저녁 메뉴로 점철된 나날은 쏜살같이 빠르고 몹시도 따분하게 지났다.

 

이 엄격하지만 일시적일 수밖에 없던 도피가 예상보다 더 일찍 끝을 맺은 건 중요한 하나를 간과해서였다. 쿠라모치. 최근 들어 주 5일 내내 바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주었던 둘도 없는 친구. 연습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향하는 미유키의 팔을 잡아끌고 하릴없이 동네를 전전하더니, 공교롭게도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에야 그를 놓아주는 것이다. 시종일관 툴툴거리기만 했으면서 근 한 달 반의 생활이 어느새 만성 습관이 된 걸까, 아니면 미유키가 고의로 남자와 마주칠 시간대를 피하는 걸 알고 일부러 잡은 걸까. 두 번째라고 해도 놀랍지 않은 이유는 합법의 기준치를 넘지 않는 선에서 어떻게 해야 미유키의 삶이 가장 고생스럽고 피곤할지 끊임없이 궁리하는 놈이었으니까.

 

이 자식도 피했어야 했는데.

 

미유키는 모퉁이를 돌며 속도를 높였다. 빨리 가지 않으면 곧 열두 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걸 떠올리자 자연스러운 반사작용처럼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이게 뛰기 때문인 건지, 그동안 착실히 훈련된 반사작용인 건지, 아니면 혹여나 남자를 만날까 두려워서인 건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난장판인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에도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져서, 맨션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 그가 있었다. 자정의 남자가.

 

이제 끝이다. 도망칠 길은 없다. 미유키는 묵례를 하는 그를 따라 고개를 한 번 까닥이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그들을 태운 승강기가 위로 오르며 안내 스크린의 숫자가 순차적으로 바뀌었다.

 

먼저 입을 연 건 미유키였다.

 

“저번엔 실례가 많았습니다.”

“뭘요. 이제 괜찮으십니까.”

 

가지런한 대답은 평소보다는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미미한 높낮이로, 미유키는 순간 이 남자가 그때의 일을 모두 까먹은 건 아닌지 얄팍한 희망을 품었다. 그만큼 평이하고 담담했다. 마디가 하얗게 물들 때까지 주먹을 쥔 미유키와 달리 남자의 한 손은 자연스럽게 가방 손잡이를 감싸 쥐고 있었다.

 

“네. 덕분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다시 발치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가깝다.

 

근소한 차이였다. 여타 다른 이들이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미유키는 몇 센티미터의 차이를 파악하는 것이 커리어와 직결된 사람이다. 남자와 저 사이의 거리가 대략 반 발자국 정도 가깝다는 걸 인지한 건,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리고 문이 열릴 때였다.

 

미유키는 고개를 들었다.

 

문을 등지고 선 남자가 한 걸음씩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곧 시야 가득 남자가 자리하고 어렴풋한 뒤편 어딘가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마찰음이 들렸다. 남자의 눈은 가라앉은 아몬드 색. 언젠가 그가 내밀었던 원두커피와, 미유키가 뭔가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를 떠올리고 바로 연상되었던 호두색이 섞인. 살짝 내리깐 시선에 남자의 입술이 들어왔다. 조각같이 선명한 입술 사이로 천천히 틈이 벌어지고 끝이 갈라진 목소리가 이마 언저리에서 울려왔다.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다.

 

“이름.”

“네?”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죠.”

 

두서없이 나온 말이 무엇을 서술하는지 깨닫는 데에는 1초의 시간으로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새벽 있었던 일은 미유키의 기억 속에서 아직 생생하다. 미유키는 입술 안쪽의 연한 속살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또 후회할 말을 뱉을 것만 같았다.

 

“특히 갈 때. 다만 다른 사람이 듣는 건 싫습니다. 하룻밤을 꺼리는 건 순전히 다른 놈팽이들과 나누는 게 싫어서니까. 집을 제일 선호해요. 이왕이면 내 침대 위에서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군요. 하지만 그게 별로라면 닫힌 공간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호텔이나, 차 안이나.”

“……엘리베이터라거나?”

“엘리베이터라거나.”

 

미유키는 뜨거워진 숨을 들이켰다.

 

“이걸로 대답이 됐나요?”

 

 

 

 

 

“확실해.”

“…….”

“새디스트.”

 

쿠라모치는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붓고 바를 빠져나갔다.

 

 

 

 

 

물론 이게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진 않는다. 미유키는 특정 성적 취향을 고집할 만큼 시간도 경험도 풍부하지 않았다.

 

그저 그거다.

 

월화수목금 열두 시 정각의 칼같은 퇴근. 얼굴, 또는 몸을 부득이하게 필요로 하는 직업. 좋아하는 음료는 부드러운 브라질산 원두를 우린 에스프레소이고 정확히 섭씨 80도까지 식혀 스테인리스 보온컵에 넣어 다니는 센스. 직접 만든 선물을 받고는 천진하게 웃을 줄 아는 순수함과 곤란에 빠진 이웃을 전화 한 통화와 미소 두세 줄기로 안심시키는 능수능란함. 거실의 전등은 깔끔한 매립형이고 천장의 이음새에는 먼지 하나 없으며 그러면서 도쿄 한중간의 고가 맨션 장식으로 블라인드보다는 커튼을 선호하는 정통파. 그리고 새디스트. (이 부분은 미유키도 확신할 수 없다.)

 

미유키 카즈야, 집중. 미유키는 그날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사라지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 한구석을 긁어대는 찜찜한 기분을 떨쳐내 보려 했다. 그는 그날따라 매우 피곤한 눈치였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점잖은 말투였으나 왠지 모르게 맥아리 없고 항시 장착하고 다니는 상냥한 미소였지만 어쩐지 눈썹 끝이 처연하게 보이는 듯한…….

 

작작 해라. 어디선가 쿠라모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미유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자에 관한 모든 기억은 마약과도 같았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흥미를 보인 적이 있던가? 없다. 있었으면 좋았겠다만 슬프게도 없다. 미유키 카즈야. 방년 25세. 애인 없음, 연애 전적 없음, 인간관계 센스는 전무, 사회성 개판 오 분 전. 특기는 야구, 취미는 야구와…… 요리 정도? 아, 그리고 가만히 있는 사람들 골라서 도발하기.

 

자. 여기까지 놓고 봤을 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관계는 희망이 없었다.

 

미유키는 문득 고요한 주방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해 건조대에 덩그러니 놓인 남자의 보온컵에. 돌려줄 기회는 많았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도 애써 달라고 물어본 적 없고 미유키도 굳이 이야기를 꺼낸 적 없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피했다. 남자가 구체적인 의도를 가지고 직접 찾기 전에는 먼저 건넬 의향이 없는 물품이었다.

 

이를테면 그런 거다. 인질. 남자와의 끈. 미끼. 자신이 현재 차지한 위치를 저울질할 척도 같은 무언가.

 

미유키는 궁금해졌다. 남자가 그걸 돌려달라고 하는 날이 올까? 그때가 바로 이 우습지도 않은 감정의 유통기한이 정해지는 날인 걸까.

 

 

 

 

 

“새디스트고 나발이고,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해.”

“왜?”

“여기는 신성한 덕아웃이잖냐.”

 

미유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그랬다. 홈구장. 경기중. 푸른 하늘. 선선한 공기. 그리고 화창한 날씨 덕에 제법 꽉 찬 관중석.

 

“그렇지만 그냥.”

“응?”

“좀 불안해. 그렇잖아? 이래 봬도 꽤 절박하니까.”

“…….”

“나도 알아. 그래도 나름 솔직하려고 노력했다고. 너한테도, 그 남자한테도. 그런데 결과는 매번 이렇고.”

“미유키…….”

 

그때다. 쿠라모치의 시선 가장자리에 휴게실로 들어가는 수석 코치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긴 코치도 그러더라. 초반에 마음고생 좀 했었다고.”

“코치? 왜?”

“모르냐? 길거리에서 번호 딴 사람하고 결혼했잖아.”

 

한동안 팀 내에서 유명한 화제였다. 연애와는 평생 거리가 멀었던 모리오카 코치가 말 그대로 어느 날 길을 걷다 만난 사람과 영화 같은 사랑에 빠졌고, 우여곡절의 연애 끝에 이번 해 초 성공적으로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미유키의 눈이 반짝였다.

 

“그랬구나.”

“그렇지. 그러니까 너도 어떻게든 잘 풀릴 거야.”

“그래.”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어?”

“응. 고마워.”

 

웬일로 능청스러움을 쫙 뺀 채 진정성 넘치는 감사를 표하는 친구의—나름 친구 맞는 건가?—어깨를 두드리며 쿠라모치는 오래간만에 뭉클했다. 요즘 들어 내내 근심걱정에 젖어 있던 그의 고민거리를 소소하게나마 해결해주었다는 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하긴, 돌부처 같던 코치도 어찌어찌 해결을 보았는데 미유키라고 안 될 리 없다. 발걸음도 가벼운 걸음걸이로 휴게실로 향하더니, 문틈으로 쏙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이제 쿠라모치가 할 수 있는 건 마음속으로 조용히 응원을 보내는,

 

휴게실?

 

“잠깐. 야,”

 

쾅, 소리와 함께 철문을 박차고 시뻘게진 얼굴의 코치가 뛰쳐나왔다.

 

“어떤 새끼가 미유키한테 솔직하라고 가르쳤어!”

 

 

 

 

 

세 번째 착각. 미유키 카즈야는 솔직하지 않다.

 

정정. 적어도 미유키는 매 순간순간 솔직했다. 그렇게 하려 물심양면으로 노력했고, 그렇다 믿고 살아왔으며,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게 옳다고 배웠다. 미유키와 조금이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이라면 코웃음을 치겠다마는 사실이었다. 다만 타고난 성정은 어쩔 수 없어서, 말을 할 필요성을 못 느끼거나 어떻게 말해야 할지 실마리를 잡지 못해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종종 있기는 했다. 그게 어쩌다 보니 ‘솔직하지 않다’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건지는 미유키에게도 미스터리였다.

 

그건 곧 솔직하게 직구로 털어놓거나, 아예 주제를 회피하는 게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전혀 짐작도 안 간다는 뜻이었다. 이제까지 미유키 특유의 이런 화법이 커다란 문젯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어렸을 때야 이걸로 미움도 좀 받았었다지만 다 큰 어른이 된 지금 주위에는 사건을 키우지 않고 넘어가길 바라는 경우가 오히려 대다수였다. 불만, 불화, 마찰 등등 자잘한 에피소드는 그때그때 말하고 즉시 넘어가거나 없던 일인 척 무시한다. 게다가 미유키가 정기적으로 교류하는 무리는 같은 구단 사람들뿐이었다. 전문 직업인들이 모여 조화로운 팀워크를 이끌어 나가는 걸 궁극적 목표로 삼는 곳에서 서로의 선을 넘기란 극히 힘들었다.

 

이건 실로 심각한 문제였다. 미유키는 친구가 없었으니까. 어째 종당에는 항시 이 문제로 돌아오는 것 같지. 이제 와서 솔직하게—솔직하다 함은 상대를 몰아가지 않는 선에서 참된 태도와 성실한 의도를 보이며—다가가는 법을 익히는 건 미유키에게 불가능하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불특정 다수의 인물에게 이러한 자신을 그 자체로 사랑해 달라 우기는 것도 억지였다. 물론 여기서 다수는 다수가 아니라 한 명이고, 불특정은 불특정이 아니라 아주 특정의 어떤 사람이지만.

 

바야흐로 미유키 인생 최대의 진퇴양난이었다.

 

어떤 돌파구가 있을까. 첫 번째 옵션, 무슨 수를 써서든 남자와 가까워지기. 이건 발밑의 땅이 두 쪽으로 갈리는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제 능력 바깥이라는 게 밝혀졌고. 그러면 두 번째 옵션, 고백. 각설하고 이것도 아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침대 파트너가 어쩌고, 온갖 개소리를 늘어놓았는데 이게 아직 실현 가능한 선택지로 남아 있을 리가.

 

그러면 세 번째, 포기.

 

바로 이 흐름에서였다. 풀지 못한 모든 숙제가 얽히고설켜 마침내 도달한 결론. 경기가 없는 주말 밤의 클럽행.

 

시끄럽고 어둡고 축축하고 붐비는 그곳에서 미유키는 대략 한 시간 정도를 소모했다. 좁은 계단을 끝도 없이 내려가 안에 들어서자 번쩍거리는 불빛과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가 저를 반겼다. 근원적이고 추잡한 냄새 속에서 제정신으로 오래 있을 자신이 없었기에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강한 술을 시켜 최대한 빠른 속도로 들이 삼켰다. 그러고 나서는 미친놈처럼 장내를 누볐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누군가와 제법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도 같다. 여러 명이었을 수도, 줄곧 하나였을 수도 있다. 중간에 누군가가 다소 성가시다 느낄 만큼 팔을 잡아끌었다는 건 기억한다. 그 외에는 대체로 모든 게 흐릿하고 모호했다. 마침내 일말의 이성이 돌아온 건 차가운 벽에 등이 눌렸을 때였다. 코가 닿을 거리에 있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얼굴. 미유키는 뱃속 깊은 곳부터 구토감이 오르는 걸 느꼈다. 어깨 위의 손을 뿌리치고 실타래처럼 엉킨 인파를 뚫어 바깥으로 나왔다. 땀에 젖은 이마와 그 위로 가닥가닥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불쾌했다. 헉헉거리는 숨을 따라 올라오는 알콜 냄새가 견딜 수 없이 역했다. 손을 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다. 거친 동작으로 문을 열고, 담배 냄새가 자욱이 밴 뒷좌석에 몸을 싣고, 팽팽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리고…….

 

떠오른 종착지는 오직 단 한 군데.

 

이곳, 9층.

 

“안녕하세요.”

 

한 손으로 문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문틀을 짚은 남자는 미유키가 처음 보는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물기 젖은 머리가 아무런 기교 없이 흐트러져 이마와 귓가를 가리고 있었다.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깜박이는 그의 모습에서, 미유키는 여태껏 심장 가장 깊은 부분을 간지럽히는 깃털 같은 무언가가 어떠한 감정의 한 종류였다는 걸 깨달았다.

 

한 걸음 다가가 남자의 팔에 손을 올렸다.

 

“미친 거죠.”

 

얇은 옷 위로 그가 긴장하는 게 전해졌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먹고 살기 위해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빠져서 온종일 그 사람만 떠올리는 거요. 좋아하는 게 뭘까, 싫어하는 건 있을까, 열두 시 집에 들어와 어떤 일상을 보내고 무얼 떠올리면서 잘까, 이런 걸 상상하는 것도.”

 

쿠라모치의 말이 떠올랐다. 길거리에서 마주치고 바로 깨달았다더라, 라는. 갑자기 알고 싶어졌다. 어떤 계기로, 무슨 경로를 통해 알았을까. 불현듯 나타났다 쓰라림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이 감각을 사랑이라 어떻게 확신했을까. 어떤 표정을 짓고 무슨 말을 했을까.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기회를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까.

 

“궁금한 건 그게 다입니까.”

 

미유키는 남자의 팔에 머무르던 손을 팔꿈치로, 팔뚝으로, 그리고 각진 어깨로 옮겼다.

 

“아뇨. 그 외에도 많아요. 침대에서는 어떨까. 키스할 때 손을 어디에 놓을까. 옷과 안경 중에 무엇을 먼저 벗길까. 자위할 때 내가 당신을 생각하듯 당신도 내 생각을 할까.”

“술을 자주 드시네요.”

“원래는 마시면 안 되는데요.”

 

순간 억울함이 치솟았다.

 

“사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쓰고, 맛없고, 귀찮고, 다음날 힘들기만 하고. 취해서 기분 좋다는 것도 모르겠어. 그거 알아요? 원래 잘 마시지도 않아요. 마셔도 일 년에 서너 번입니다. 취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왜요?”

 

미유키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어깨를 쓸던 손으로 남자의 뒤통수를 감쌌다. 손가락에 얽혔다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은 시원한 습기를 품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다가와 미유키의 어깨와 목이 만나는 지점을 짚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어떻게?”

“네?”

 

미유키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키스가 돌아왔다. 그로부터 포개어 오는 몸은 한없이 뜨겁고 급급한 입맞춤을 동반했다. 남자의 손아귀에서 미유키는 빠른 속도로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걸 느꼈다. 멀리 어딘가에서 들리는 문이 닫히는 소리. 맨피부를 스치는 옷가지. 등에 닿은 건 매끄러운 벽. 조금 후에는 차가운 나무 바닥.

 

그리고 마지막에는 푹신한 침대.

 

“하룻밤은 안 한다고 하지 않았나?”

“사이드만. 가끔.”

“그럼 삽입 섹스는 처음?”

 

남자는 대답 대신 깊은 키스를 했다. 잠시. 잠깐만. 미유키는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 밀었다.

 

“그전에 중요한 게 있었죠.”

 

하룻밤을 원하지 않는 남자. 그렇다면 이것만큼은 그의 취향대로 맞춰주고 싶었다. 미유키는 검지를 미끄러뜨렸다. 남자의 날카로운 콧날을 지나, 뜨거운 입술의 곡선을 따라 쇄골과 쇄골이 만나는 오목한 지점까지.

 

“당신의 이름은?”

 

 

 

 

 

크리스.

 

그게 이 남자를 구성하는 수많은 부분 중 가장 처음으로 알게 된 조각이었다. 이름. 기다리던 밤은 끝없는 대화로 시작되었다. 일방적인 고백과 두서 없는 독백과 평소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남자를 향한—주로 뒤태와 관련된—갖가지 칭찬을 대화의 일부로 간주하면 말이다. 미유키는 남자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앉아 평생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들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그동안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얼마만큼 곤혹스러웠는지. 하지만 또 한편으론 어찌나 행복했는지. 이 순간을 고대하고 기다렸는지. 그의 손이 얼마나 따뜻하고, 동시에 얼마나 저를 흥분으로 이끄는지.

 

밤이 지나고 새벽이 가까워지며 말소리는 점차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남자의 둥근 입꼬리와 부드럽게 접힌 눈가를 보며 복부 깊은 곳에서 응어리지는 울림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맨살을 스칠 때면 발꿈치를 침대에 묻고 필사적으로 시트를 밀어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다가와 목덜미의 솜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미유키는 헐떡이는 와중에도 벅찬 웃음을 터뜨렸다. 새디스트, 아니었잖아. 이 말을 소리로 냈다는 건 상대의 들뜬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섹스는 느리고 깊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미유키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은 남자의 이름이 되었다.

 

 

 

 

 

아침이 밝았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두꺼운 암막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한 줄기였다. 어제의 정사가 남긴 향기가 아직도 혀끝에서 가슴 뛰는 뒷맛으로 맴돌았다.

 

미유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위에 침대 시트를 아무렇게나 둘둘 감았다. 부엌에서 생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가까워질 때마다 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맨 발목에 감겼다.

 

목소리는 정확히 말해 둘이었다. 또렷한 쪽은 이제 제법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 뭔가를 하나 덧씌운 듯 잡음 섞인 불분명한 목소리는…… 아이? 아마도 네다섯, 많이 잡아봤자 여덟아홉.

 

주방 벤치 위에 놓인 태블릿에 비치는 아이의 얼굴은 생판 모르는 미유키가 보기에도 적잖이 신나 있었다. 남자의 정적인 목소리와 대조되는 재잘거림이 어떤 내용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영어였으니까. 미유키는 말했듯이 야구 외에는 담을 쌓고 산 인생이었고, 영어란 중등 교육의 졸업을 위해 익힌 조금이 다였다. 그마저도 거의 다 까먹은 현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다. 애초에 어린아이와의 대화이니 어려울 리가 있나? 요즘 잘 지내니. 어쩌고저쩌고. 학교는 어떻니. 좋아요. 좋은데 어쩌고저쩌고. 좋아하는 선생님은 누구니. 아마도 사람 이름. 그리고 이런저런 담소. 엄마가 왔어요. 가봐야 해요.

 

Yup. I love you too, sweetheart. Bye.

 

미유키는 거기까지 듣고 가만히 발길을 돌렸다. 침실 바닥에 구르는 옷을 집어 들어 하나하나 꼼꼼히 꿰입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한 층 아래, 자신의 휑한 집으로 향했다. 방에 돌아와 침대에 기어들어 갔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잠은 차갑고 검게 넘실거리는 밤의 파도가 되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미유키를 덮쳤다.

 

 

 

 

it takes two to tango

 

 

 

“……저 화상…….”

“…….”

“한심해 빠진 놈…….”

 

한숨만 푹푹 내쉬던 쿠라모치는 라커룸 소파에 걸터앉은 미유키를 향해 기어코 고함을 빽 질렀다.

 

“바보냐?! 그냥 물어보면 되잖아! 누구 애냐고!”

“…….”

“아니, 조카일 수도 있고! 친구 애일 수도 있고! 옆집 꼬마일 수도 있고! 비슷하게 생겼다니까 아마도 조카겠지! 그것도 아주 높은 확률로! 아, 다 됐고 자기 애면 어때! 살다 보면 애 한둘쯤 있을 수도 있는 건데! 어쨌든 바람이라는 보장은 없잖아!”

“귀 아파.”

“이 자식이……,”

“놔둬, 좀.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으니까.”

 

하. 길고 긴 한숨을 쉰 쿠라모치가 거칠게 뒷머리를 긁었다. 돌겠네.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리는 그는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미유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하여간 손 더럽게 많이 가는 놈…….”

 

질렸다는 듯한 동료의 목소리를 듣고 곁눈질로 슬쩍 돌아보기는 했지만.

 

“그딴 얼굴 해봤자 소용없어. 네 놈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설마 모르겠냐?”

 

모르면 쌍방 좋겠다만. 그러나 쿠라모치는 미유키에 관한 많은 사실을 낱낱이 파악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순전히 자의가 아닌 연유로 인해.

 

“사실 별 상관도 없지? 그 사람 애든 아니든.”

 

빈정거리는 쿠라모치를 향한 미유키의 시선에 날이 섰다.

 

“한마디로 그거잖아. 물어보면 괜히 매달리는 것 같고, 안 물어보자니 그건 그거 나름대로 신경 쓰이고. 물어보고 나면 일회성 불장난이 아니라 후에 뭔가 더 있는 제대로 된 관계의 시작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긴 또 죽어도 싫고. 그냥 단물 쪽쪽 빨고 연애 놀이 같은 거나 하다가 적당히 발 빼지 싶었는데 뚜껑 열고 보니까 진심 계속 나오고. 오히려 먼저 차일까 봐 불안하고. 좋게 좋게 헤어지자니 못 그러겠고. 그런데 그거 알고 있지? 지금 이거 전부 네가 진 게임이라는 거. 신경 쓰인 순간부터 인정했어야지.”

 

신랄하기 그지없는 평이 잇따라 쏟아져 나온다. 미유키는 결국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작은 알갱이로 변해 목구멍 안에 켜켜이 쌓이는 듯했다.

 

“인간관계가 그렇게 무섭더냐? 애매하게 아무나 잡고 놀면 감정이란 건 평생 무시하고 살아도 될 줄 알았어? 웃기지 마. 좀 자라라. 언제 클래.”

“이 정도면 여러모로 꽤 크다고 생각하는,”

“그 말 끝냈다간 목숨 날아갈 줄 알아.”

 

 

 

 

 

그날, 쿠라모치의 소원대로 미유키는 곱게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은 많았지만 그중 무엇도 쿠라모치를 향한 건 없었기 때문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고 싶은 모든 단어는 이곳에 없는 다른 이를 향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룻밤인 듯 아닌 듯, 사랑인 듯 아닌 듯, 장난인 듯 아닌 듯. 미유키가 바랐던 관계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다. 아슬아슬한 외줄 위에 서서 발밑의 막연이 주는 스릴을 만끽하는 건 오만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무엇도 아닌 미유키 본인 때문이었다. 정을 주지 않기에 미유키의 삶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부족했다. 처음 알았다. 언제나 일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우선순위였으니 차마 자각하지 못했고, 다른 것은 대충 넘기고 살아도 될 줄로 알았지만 결론적으로 그게 가장 큰 착각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빠진 공간은 캐치-22. 자신이 미쳤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도리어 제정신이어야 하는 조종사의 모순. 역설적이고, 자기 반복적이고, 비합리적인 궤변. 논리와 상식을 거부하는 딜레마. 궁지에 몰린 주인공은 사람들이 언제나 자길 죽이려 한다 믿었고 어떤 수단을 써서든 살아남기를 바랐다. 그는 성공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 가슴팍까지 저를 파묻은 무덤은 스스로 만든 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를 속박하는 굴레는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 직접 만든 것. 미유키는 깨달았다. 이곳을 자력으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저 자신이 그러모은 흙더미였으나 이 사태를 타개할 손은 한 쌍으로 부족했다.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단 하나인 누군가. 아는 거라곤 이름 하나뿐인 어떤 남자가.

 

 

 

 

 

어디 딴 데 가지 말고 곧장 내 오피스로 와.

 

오랜만의 오프 날, 늦은 오후까지 밀린 잠을 자던 미유키는 핸드폰을 열고 인상을 썼다. 보낸 시간을 보니 댓바람이 부는 새벽. 문자는 보면 볼수록 알쏭달쏭했다. 전송인은 이번 가을에 마케팅팀에 새로 들어온 과장이었다. 이름이 뭐더라. 미유키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느린 샤워를 했다. 모카포트에서 흘러나오는 짙은 원두 향을 맡으며 커피를 홀짝이는 잠깐의 여유까지 즐겼다. 그리고 본격적인 퇴근 시간을 비낀 늦저녁이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뭐야. 다들 모여서 뭐 해요?”

 

밥이나 얻어먹을까 싶어 먼저 찾은 곳이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웬일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경기가 없는 날이었으니 많아봤자 숙소에 잔류하는 몇몇이어야 할 텐데, 어림잡아 두 자릿수였다. 그것도 다들 쿠라모치의 주위에 모여 앉아서는…….

 

“왜. 왜 그렇게 쳐다봐.”

 

쿠라모치는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다. 그가 어리둥절한 미유키를 향해 말없이 쥐고 있던 핸드폰을 내밀었다. 미유키는 의심스러운 손길로 그걸 받아들고 화면 중앙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유명 프로 야구 선수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이 SNS를 통해 확산되며 개인 정보 보호에 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총 세 장의 사진은 유흥 업소에서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요, 정확한 출처도 모른 채 무분별하게 퍼지는 루머가 과연 선수 입장에서 정당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한편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소속 선수, 미유키 카즈야는 최근 들어 거액의 재계약을 성사시킨 팀의 1군 주전으로서……,」

 

그리고 차례로 뜨는 세 장의 사진.

 

두말할 것 없는 저번 주말의 미유키였다. 급하게 털어 넣은 술 때문에 정작 미유키의 기억 속에선 존재하지 않는. 클럽 2층에서 찍은 듯한 사진 속에서 그는 어떤 이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있었다. 상대의 몸과 기울어진 얼굴이 미유키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으나 뿌연 화질 속에서도 반박할 여지조차 없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식당 전체가 조용해졌다. 미유키가 조용했기 때문이다. 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는 미동도 없었다. 확장된 동공.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며 실낱같이 가느다란 단어를 뽑아냈다.

 

“이거.”

 

떨리는 손이 가리킨 건 액정 조금 왼쪽. 단정한 발성으로 가십 기사를 보도하고 있는 인물. 깎아내린 듯한 턱. 조곤조곤 움직이는 입술. 착 가라앉은 점토색의 두 눈. 데스크 위에 자연스럽게 포개어진 손가락의 도드라진 마디가 몸 안에서 어떤 감각을 불러일으키는지 미유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남자. 이름 뭐야.”

 

 

 

 

 

“안녕하—,”

“타키가와 크리스 유우.”

 

남자의 인사를 다짜고짜 끊은 미유키는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NHK 아홉 시 뉴스 간판 앵커시라고요.”

 

얼굴과 몸이 중요한 직업, 철두철미한 옷차림, 일주일 내내 같은 퇴근 시간, 목소리—그래, 목소리.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음색으로 귓바퀴에 착 달라붙어 달콤한 향을 남기고 몸속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가는 그 목소리.

 

머릿속에 있던 모든 퍼즐이 들어맞는 순간은 상상했던 것처럼 흡족하지도 통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났다. 남자는 잘못한 것 하나 없으니 남자에게는 아니고, 세상은 여느 때처럼 가감 없이 제멋대로 굴러가는 중이니 세상에게도 아니고, 다만 자신에게.

 

몰랐던 자신에게.

 

“네.”

“어떻게…… 그런…….”

“안 물어봤잖습니까.”

 

할 말이 없었다. 미유키는 아랫입술을 피가 날 만큼 세게 깨물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한결같이 다정하던 남자에게서 불협화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아무리 미유키가 인간관계에 서투르다 해도 이 정도는 알았다.

 

남자는 지금 화가 난 상태였다.

 

“맞아요. 맞긴 한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미유키는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았다.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그러니까.”

 

절박하게 더듬거리는 자신이 얼마나 우스워 보이는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코끝을 찌르르 울리는 열기가 무엇을 뜻하는지 미처 파악할 정신도 없었다. 남자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하는 건 미유키가 그렸던 그 어떤 최악의 시나리오보다 버겁고 절망적이었다.

 

“미안해요.”

“뭐가 말입니까.”

“전부. 아니, 그게 아니라……. 몇 가지. 아니. 이것도 아니고.”

 

살아가면서 이렇게까지 코너에 몰린 적이 있던가? 미유키는 거친 호흡을 다급히 골랐다. 어떤 수세에 빠졌든지 냉정하고 침착하게 넘겨야 한다는 걸 안다. 패배는 있을지언정 고결함은 언제나 그만의 소유였다.

 

알고는 있지만.

 

“그런 사진이 찍힌 건 당신 잘못이 아니죠. 사생활이 파헤쳐졌으니 정의 내리자면 피해자이고.”

“네.”

“그런데 뭐가 미안합니까?”

 

미유키는 언제나 뇌리 한구석에 남아 저를 괴롭히던 조언을 되새겼다. 솔직하게 말하라고. 탁 털어놓고. 그랬다면 나았을까? 여기까지 사태가 치닫는 건 막았을까. 단 한 사람의 손길을 갈구하는 주제에 그 사실을 부정하며 참고 참다가, 결국 도망치듯 찾은 곳에서 누군가와 붙어먹은 사진이 찍히고, 그걸 남자가 전 국민이 보는 뉴스에서 철저한 객관성을 가장해 조목조목 보도해야 하는.

 

미유키는 과거의 자신을 이 세상에서 깨끗이 지우고 싶어졌다.

 

“처음부터 끌렸어요. 하지만 내 깜냥이 안 될 거라 생각했다고 해야 하나, 조금 벅찼다고 해야 하나.”

“꼬신다고 확 넘어올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건드려서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대체 사람을 뭐로 보는 거예요?”

 

남자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미유키는 발끈했던 목소리를 낮췄다.

 

“네. 완전히 맞아요. 독해력 좋으십니다. 역시 앵커야.”

“진짜로 나한테 할 말 없습니까?”

 

진짜라.

 

미유키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었다. 진심과 가심과 거짓을 가장한 본심이 뒤죽박죽 섞여 이젠 무엇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말해야 했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돈되지 못한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변명 같지만 하룻밤만을 생각한 건 아닙니다. ……아니. 그러니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생각한 건 맞는데, 이건 내가 원래 이 부분에서 죽 쑤는 성격이기 때문인 거고 나도 부정하고 싶은 진심이 있었어요. 가지고 놀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절대 하룻밤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어.”

“죄송하지만 마지막 말씀만큼은 못 믿겠군요.”

“혹시 그 사진 때문이라면,”

“아침에 사라졌으니까.”

 

미유키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사라지는 하룻밤은 예외가 아니라고 당신이 말했었으니까.”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다. 힐책이라 생각했던 남자의 눈빛이 단지 상처였다는 걸 깨닫자 분노는 사라지고 대신 어마어마한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둘 사이에 납덩이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전화 내용을 들으셨나요?”

 

미유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젠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조아린 남자가 거친 동작으로 목 뒤를 문질렀다.

 

“뭘 오해하셨는지 알겠습니다만,”

“오해하지 않아요.”

 

미유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저, 난. 당신이, 나를.”

 

그리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이다음은 미유키가 한 번도 발을 들여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평생 경험할 기회도, 그러고 싶은 욕망도 없을 줄 알았던 곳. 모든 걸 말하기로 결정 내린 지금에 와서도 결사적으로 피해갈 방법을 찾느라 여념이 없는 곳. 있을지 없을지 모를 언젠가의 순간을 어렴풋이 상상하며 장난처럼 발을 들여보았던 곳.

 

당신이 나를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터놓고 물어보았으면 됐겠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알고는 싶었거든요.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남자의 고백은 짧고 단호하고 명확했다. 미유키의 머릿속을 굴러다니는 어중간한 말의 덩어리와는 다르게.

 

“나를 뭐라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나는 관심 없는 사람을 집에 데리고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 관심이란 건 간단한 게 아닙니다. 침대에 한 번 눕히고 말 의향이었으면 깔끔하게 호텔에 데려갔겠죠. 이왕이면 제가 사는 곳을 모르는 사람으로요.”

“내가 더 쓰레기 같아지는데요.”

“그쪽을 판단할 마음은 더더욱 없고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한 마디가 현실이 된 지금 이 순간, 남자와의 거리는 너무나도 멀었다. 미유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렴풋한 미래의 어느 순간 사랑의 고백이 있다면, 그건 순수한 웃음과 하염없는 키스와 교감을 나누는 포옹의 연결고리가 될 거로 생각했었다. 말이 없어도 마음이 맞았던 어느 날 밤처럼. 자신이 지레 겁을 먹어 차버린 일생일대의 기회처럼.

 

“사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도 전화가 중요하지 않아요.”

“처음 만났던 경로도, 원래 목적도,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유도 중요하지 않아요.”

“나도요.”

 

미유키는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올곧은 두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지금부터 할 말은 모두 진심이고 싶었다. 의심 없는 사실이고, 가슴 깊은 곳부터 우러나오는 간절함이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단지 하기가 두려울 뿐이었다. 술기운을 가장해 옷을 벗는 건 차라리 쉽다. 그러나 마음을 까발리고 진실을 속삭이며 혹시라도 돌아올지 모를 거절을 향한 공포를 이기는 건 그 무엇보다 어려웠다. 미유키는 마침내 그걸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은 겁쟁이였다. 제 손을 철저히 벗어난 승패이기에 게임에서 질 수도 있다는 가정 하나만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지난 한 달 반의 시간은 인생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는 것을.

 

“그러면 마음은?”

 

남자의 질문이 미유키를 향했다.

 

“당신의 대답은?”

 

 

 

 

 

좋아합니다.

 

미유키의 대답이었다. 그 후로 미유키가 주중에 쿠라모치를 데리고 바를 가는 일은 없었다. 정전이 된 집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오는 일도 없었다. 원하는 것에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손바닥에 손톱자국을 내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문득 튕기는 초침을 바라보며 느꼈던 공허와 텅 빈 천장을 바라보며 잠에 빠지지 못하는 나날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한평생 살아오며 그럴싸하게 친구라 부를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제 앞길에는 알고 보면 어찌해도 채울 수 없는 깊고 깊은 수렁이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할 까닭도 없어졌다.

 

그 외에는 같은 일상이었다. 그때의 미유키처럼 지금의 미유키도 변함없이 야구를 했다.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쉬는 날에는 요리를 했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우유를 넣지 않은 진한 커피부터 찾았다. 대중에게 수많은 응원과 찬사와 비난을 동시다발적으로 받는 공인, 동창들에게는 격년에 한 번씩 만나는 인연, 그리고 주위의 몇 안 되는 지인들에게는 가끔은 즐거운 동행, 가끔은 견딜 수 없이 화딱지 나는 눈엣가시였다.

 

대신 핸드폰에 번호 하나가 저장되었다. 사진도 한 장씩, 한 장씩 늘어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웃을 일이 잦아졌고 언제나 즐겁지만은 않은 감정이 불쑥 튀어나올 때도 생겼다. 이른 새벽, 졸린 눈을 비비며 부엌 벤치를 더듬을 때 다가오는 손길이 있었다. 기다려지는 발걸음이 있었다. 주위를 감싼 암흑에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갈 때면 한 발자국 앞에서 이름을 부르고, 언제나 한 방향으로 미유키를 이끄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 모두는 이따금 묵직한 무게가 가슴을 먹먹히 채울 때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어떠한 특정 인물의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만 눈앞에 나타난 이상 없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인연이었다. 미유키는 이걸 연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다른 것이 되기에는 이 사람의 모든 것을 더없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