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tiating protocol one to fifteen.」

“Proceed to eight.”

「Overruling sequence one to seven. Eight needs SP's verification. Enhance ARM?」

“ARM to max.”

「ARM to max. Safety Compound Quota disengaged. Launching protocol, in 3, 2, 1.」


위잉, 나직한 주파수의 잡음이 울리고 후루야의 정면에 홀로그램이 떴다. 시작은 도로 한복판.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배경으로 늘어선 낮은 구조물은 뜨거운 일광에 대비한 흰 코팅이 발라져 있다. 건물 사이의 좁은 틈을 따라 몰아치는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뜀박질. 새의 지저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려주듯 간간이 울리는 헤드셋의 희미한 머플링.


전방에 둘. 


하이드런트의 뒤에서 팔이 삐죽 빠져나온다.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은 코일건을 쥔 손에, 다른 한 발은 그 뒤를 따라 나온 이의 허벅지에. 이 둘의 홀로그램이 채 사라지기 전 또 다른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오른편 갓길, 아마도 하나. 그러나 인질이 있었다. 딱히 문제는 아니었다. 급하게 물러서는 발길을 기다렸다가 정강이를 겨냥했다. 이번에도 명중. 곧이어 한 블록 가까이에서 튀어나온 셋을 차례로 무력화.


배경이 바뀌었다. 숲이었다. 기괴한 형태로 틀어진 뿌리가 시야를 불규칙하게 가리고 있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렸다. 본능적으로 그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나 적이 튀어나온 곳은 반대쪽. ARM을 최대치로 올린 프로토콜에서 몸을 피하는 선택지는 없다. 그러면 남은 건 재빠른 무력화뿐이다. 견착대를 받친 왼손을 놓고 오른팔만 틀었다. 방아쇠를 당기자 시선 구석으로 명중을 알리는 푸른 점이 떴다 사라진다.


후루야는 순간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잡았다. 


“괴물이네.”

“괴물이야.”


한 발, 한 발 총성이 들릴 때마다 계기판의 스코어가 무섭게 올라갔다. 쥐죽은 듯 조용하던 좌중에서 기어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후루야의 뒤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들의 숫자는 못 해도 서른이 넘었다. 초반에는 같은 수사과 소속인 예닐곱이 구경꾼의 전부였으나 조금 후 교통과의 대여섯이 우르르 내려오더니, 어디서 소식을 듣고 온 것인지 경무기획과 장비관리, 인사과까지 몰려들었다. 평소 쌓인 먼지를 치울 필요마저 없던 한산한 지하실이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건, 이온시티 지부가 만들어지고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관전하던 쿠라모치는 고개를 쭉 빼 무리의 끝에 있는 이를 향해 소리쳤다.


“어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명중률은 그렇다 쳐도 스피드에서 못 따라가.”

“너도 꽤 빠르잖아.”

“저 정도는 아니지. 절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유나는 현재 이온시티의 서부특별변경대에서 가장 높은 사격 점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제 몇 분 후면 그 타이틀의 보유자가 바뀔 전망이지만. 연방경찰청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어 종종 수도로 차출되곤 하는 재원이었으나, 그런 그마저도 후루야의 견습용 전자 리볼버에서 나온 금속 탄자가 목표물의 한가운데에 꽂힐 때마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중이었다.


“저거 물건이네. 어디서 데려왔는지 솔직히 말해봐요. 혹시 정밀 개량형 사이보그 아니에요?”

“미쳤냐? 아무리 궁해도 그렇지 불법 조작까지 손을 대게?”

“아무래도 이상하잖아요. 저렇게 잘난 놈을 이 깡촌에 왜 보내. 본청 강력팀에서 간부로 모셔가도 모자랄 판에.”


뜬금없이 서장을 닦달하는 쿠라모치도 덩달아 핀잔을 주는 서장도 똑같이 놀란 표정이다. 정확도도 굉장했지만 동료의 말마따나 더 놀라운 것은 속도였다. 실전과 최대한 비슷하게 진행되는 증강현실 테스트 모듈은 지형, 거리, 날씨 등 모든 자연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준과 격발 사이에 시간 차가 거의 없었다. 버리는 탄환도, 공포도 전무했다. 시작부터 완료까지, 타깃을 포착하고 총구를 정렬해 방아쇠를 당기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물 흐르듯 정결하고 완벽한 움직임이었다.


「Evaluation Module completed in thirteen minutes twenty-one seconds. Ninety-nine targets acquired. Zero civilian casualties.」


오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십오 분도 안 걸렸어. 오발도 없대. 만점은 처음 봐. 소란스러운 인파를 등지고 후루야가 느린 동작으로 디스플레이용 글래스와 이어피스를 벗었다. 유리문을 밀어 열고 나와 쿠라모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담담한 태도였다.


“잘하는데, 신참.”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답하는 후루야의 시선이 쿠라모치에게서 자연스럽게 뒤편으로 옮겨갔다. 미유키. 방금 사격장에 도착한 듯 입구에 서서 절연용 글러브를 끼우며 옆의 장비 담당과 무어라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줄곧 웃음이 떠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정작 이쪽엔 눈길도 주지 않더니, 남은 보호구의 착용이 끝나자마자 빈 컴파트먼트에 들어가 곧바로 전원을 켠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제법 괜찮은 솜씨다. 미유키가 고른 첫 모듈은 후루야가 건너뛴 워밍업 스테이지였다. 색이 다른 원형 물체나 과녁을 골라 맞추는 순발력과 정확도 위주의 테스트. 지시하는 물체를 차례차례 겨냥하는 총 끝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조준 각도도 흠잡을 구석 없이 안정되어 있다. 그날 본 형편없는 모습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잘하지?”


옆에 선 쿠라모치는 짐짓 자랑스러운 투였다.


“육탄전 점수 좋아, 체력 튼튼해, 통신 장비 다루는 건 국내 최고야. 정보수집능력에선 가히 따라올 자가 없고 전투기기, 비전투기기 포함 육상과 비행 조종 전부 다 가능해. 그런데 사격 하나가 엉망이거든. 깃발, 과녁, 이런 건 곧잘 맞추는데 조금이라도 사람과 비슷한 모양이면 저 꼴이 되니까.”


후루야의 시선이 쿠라모치가 턱 끝으로 가리키는 곳을 따라갔다. 때마침 정식 프로토콜이 시작되면서 타깃이 인간형 홀로그램으로 바뀐 참이었다. 어느새 자세는 엉망이 되어 있고, 방금 보여주었던 적중률이 무색하게 수치가 죽죽 깎이는 중이다. 아직 저러네. 이번 테스트 승급 시험 겸 아니었나. 술렁이던 주위는 마침내 숫자가 한자리로 떨어지자 단숨에 싸늘한 적막이 돌았다. 


쿠라모치의 얼굴에 쓴웃음이 피었다.


“첫날 사건 일어났다면서?”


후루야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기절한 채 늘어진 남자를 묶어 루프 뒤에 싣고 사시나무처럼 달달 떠는 미유키를 옆자리에 태워 서에 도착했을 때는 동녘이 밝아오는 아침이었다. 한 차례 발칵 뒤집힐 거라는 예상은 했으나 여파는 생각보다 더 컸다. 의료 베이에 실려 간 미유키는 감감무소식이었고 대신 서장부터 시작해 의사, 행정관, 감사원, 기록담당까지 차례차례 면담을 가져야 했다. 대부분 어떻게 된 경위인지, 그곳에는 왜 갔었고 지금 기분은 어떤지를 물었다. 그 모든 질의에서 철저하게 빠진 단 하나는 미유키였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고사하고 다친 곳은 없냐는 간단한 질문에도 답을 피하는 미소만 돌아와, 사흘 째부터는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그게 꼬박 한 주 전. 첫날 이곳에 도착해 반나절을 함께 보내고 얼굴을 다시 보는 건 그 일 이후 처음이다. 괜찮은 건가? 걱정이 되어 유심히 살펴보았자 알 길은 없었다. 이야기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인 사람의 컨디션을 눈대중으로 파악할 수 있을 리가. 딱히 몸이 상한 곳이 없어 보인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후루야는 컴파트먼트의 계기판으로 눈을 돌렸다. 런스루 적중률 42%. 실성공률 3%. 대 인간형 스코어 0%. 어마어마한 편차는 둘째치고 한심하기 그지없는 성적이다. 저 수치로는 경찰학교에 입학하지도 못한다.


“하긴 뭐, 겁도 없이 경찰 유니폼 입고 살랑살랑 돌아다니는 거 보니까 불안하긴 하더라.”

“그건…….”

“서장이 경고 안 해주던?”


했다. 그것도 도착한 날 아침에. 방사능 수치와 나란히 언급한 걸 보면 피폭과 동급의 심각성인 모양이었다. 경찰 루프의 푸른 다이오드 불빛만 봐도 도망가는 엔자스에 비해 어이없이 낮은 경권이긴 하지. 굳이 위로를 덧붙이는 쿠라모치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뭘 잘했다고. 아무리 예상 밖이었다 해도 제대로 지시를 듣지 않고 경솔히 넘긴 건 분명 후루야의 책임이었다.


“하여간 미유키 그 자식도 말이야. 첫날이면 점퍼 하나 사주고 고이 데려와서 재울 것이지 방벽에는 왜 끌고 가? 대낮에 기동장비 풀로 채우고도 잘 안 가는 곳을.”


그마저도 후루야 자신이 졸라서 간 곳이지만. 이 말을 할 타이밍도 놓쳤다. 후루야는 하는 수 없이 일주일 만에 보는 파트너의 뒷모습만 뚫어지도록 응시했다. 이제 모듈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어쩔 줄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그를 보며, 문득 마지막으로 마주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바들바들 떨리던 총구 너머의 절박했던 두 눈.


“놀랐습니다.”

“하긴 전임 첫날에다 돌발상황이었으니,”

“그렇게까지 떠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후루야는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첫날이랍시고 어수룩하게 굴었던 건 인정하지만 그런 류의 긴급 상황은 후루야가 있던 곳에서는 사건도 아니다. 정말로 충격이었던 건 눈앞의 이가 보인 기행이었다. 공터에 주저앉아 발작이 온 마냥 사지를 벌벌 떨어대던 남자. 그를 두고 후루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헤맸었다. 말을 걸어도 답이 없고 이름을 불러도 얼빠진 되물음만 돌아왔다. 어찌나 심각했는지 종반엔 호흡곤란까지 와서, 핏줄이 선 목덜미를 부여잡고 헉헉거리는 그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아 어깨를 두드리고 손을 쓰다듬고, 하여간 별짓을 다 해야 했다.


“웃기지도 않지. 수사관 별 달고 변경 요소에서 종이 쪼가리 뒤적이는 이유가 뭐겠어.”


쿠라모치의 냉정한 평가는 비관적이라기보단 현실적이었다. 수사관이라는 직함은 굳이 정의하자면 계급이 아니라 개별 사건을 독자적으로 맡을 수 있는 지휘권을 소유한 특별 직책이다. 따라서 상당수가 본청 수사팀에 소속되어 있었고 큰 사건이 비교적 적은 지방경찰청에는 얼마 있지도 않았다. 기간제 파견을 빼면 기껏해야 서넛? 후루야가 본청에 있을 당시, 인사과에 배치된 동기에게서 지나가는 것처럼 전해들은 정보였다.


“어쩔 수 없잖아. 경찰이 총을 못 쏘면 어쩌겠다고. 언제 동료 머리통에 탄환 박을지 모르는 일인데 현장 형사 일을 시킬 리가 있겠냐.”

“그래서 여기 있는 건가요?”


쿠라모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셨잖습니까. 이곳은 다들 어딘가 고장 나서 온 거라고.”

“……완전 맹물은 아니네, 이거.”


「Evaluation Module suspended after twenty-one minutes fifty-seven seconds. Zero targets acquired. Eleven civilian casualties. Protocol terminated upon SP's request. 」


결국 중도 포기. 길게 이어지는 종료 신호음을 배경으로 헤드셋을 벗고 테스트용 마루더를 홀더에 꽂은 미유키가 바람처럼 뒤돌아 사격장을 나섰다.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는 그의 등에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직접 물어봐.”


파트너잖냐. 어깨를 툭 치고 그 뒤를 따라 사라지는 쿠라모치를 보며 후루야는 할 말이 없었다.





“미유키 선배님.”


발밑에 깔린 물체를 하나씩 뒤집어 보던 미유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천천히 들린 고개가 뒤돌아 후루야를 향했다. 이건 어떻게 해요? 이마를 따라 주룩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묻자 필요 이상으로 긴 눈초리가 돌아왔다.


“너 말이야. 이름 뒤에 뭔가를 꼭 붙여야겠으면 님 자는 빼.”


얕은 한숨을 내쉬며 받아치는 그의 얼굴에는 정체 모를 피곤함이 드리워 있었다. 불렀다는 생각이 괜히 들 정도로. 고민 끝에 나온 호칭이 단호하게 거절당하니 또 묻기도 뭐하다.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한 후루야는 잡고 있던 실린더 블록만 만지작거렸다. 미유키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로 흘렀다.


“놔둬. 딱 봐도 쓰레기잖아.”


후루야는 제 손에 들린—미유키의 말에 의하면 쓰레기인—물체를 내려다보았다. 군데군데 녹이 슬긴 했으나 플러그가 들어갈 배치구만은 깨끗했다. 둥그런 가장자리에 흠집 하나 없는 게 꽤 괜찮다 싶었는데, 저만치에서 흘끗 한 번 보고 바로 깔 줄이야. 물론 낡긴 했지만……. 머뭇거리던 후루야는 블록을 내려놓고 앞에 즐비한 부품들을 다시 뒤적이기 시작했다.


둘은 현재 이온시티의 위성 지역 중 하나인 테미스 콜로니에 위치한 큐레이터 시설에 와 있었다. 그중에서도 수송수단 부품 재가공 센터에. 이유는 터무니없이 간단했다. 첫날 있었던 습격 사건 때, 기절한 남자의 주머니에서 미등록 센서 칩이 나왔던 것이다. 아마 불법 루프일 거야. 서장의 말을 듣고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던 미유키가 오전 테스트를 마친 후루야를 데리고 온 곳이 이곳이었다. 


말이 좋아서 재활용 관리처이지 폐착장이나 다름없다. 하루에 두 번 꼬박꼬박 스콜이 오는 날씨, 차양 하나 없는 바깥에 금속체를 수북이 쌓아놓은 것부터 그렇지 않나. 오면서 들은 미유키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자주 찾게 될 곳이란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이 도시를 쏘다니는 루프의 반 이상이 불법이고, 그중 대다수가 어떤 경로로든 이곳에 처박히게 될 신세라며.


후루야는 다소 짜증이 섞인 동작으로 눈앞의 크랭크 케이스를 들어 올렸다. 어떤 건 부러지고, 또 어떤 건 원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삭았고, 한마디로 말해 이것도 쓰레기 같고 저것도 쓰레기 같고, 하여간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드넓은 평야에 산처럼 쌓인 것들 죄다 쓰레기 일색이라 전혀 차이점을 모르겠는데 대체 어떻게 구분해내라는 건지. 막막한 심정이 된 후루야는 괜히 발끝에 치이는—아마도 캠샤프트인 듯한 기다란 관을 집어 들었다.


“이건요?”

“그것도 쓰레기.”

“이것도요?”

“그래.”

“이것들은요?”

“그러니까 다 쓰레기라고…… 너 일부러 이러지.”


영차. 자리에서 일어난 미유키가 성큼성큼 후루야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후루야가 든 원통형 허브를 홱 빼앗아 가더니 나누어진 부분을 보란 듯이 이리저리 돌린다. 제대로 기름칠이 되지 않은 조인트에서 귀가 거슬리는 삐걱거림이 났다.


“잘 봐. 액슬이 망가졌지? 이런 건 가져가봤자 소용없어요. 기체 챔버만 바꾸면 작동은 하겠다만 교정이 안 된단 말이다.”

“그래도 정식 수사 신청을 보내면.”

“의뢰서에 뭐라고 적을 건데. 고작 불법 루프 하나 찾겠다고 정밀분석해달라고? 아서라. 이건 글렀어. 버려.”


공학 시간에 졸았냐? 입꼬리 한쪽만 올려 웃고 돌아서는 미유키의 이마에서도 마찬가지로 구슬땀이 흐르고 있었다. 더위를 느끼긴 하는구나. 그걸 인지하자 심통을 부린 게 슬쩍 미안해졌다. 후덥지근한 열대의 무더위에서도 꿋꿋이 검은색 점퍼 차림을 고수하길래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었는데.


후우. 긴 한숨을 내쉰 후루야는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아침부터 범상치 않은 구름이 몰려와 오전 내내 폭우를 퍼붓더니, 정오를 지나며 해가 정수리 위에 뜨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개어 있다. 그때부터 시작된 건 무시무시한 열대의 폭염이었다. 후루야는 허리춤의 리벳에 달린 휴대용 분석기를 뒤집어 보았다. 상온 섭씨 39.3도, 상대습도 91%, 풍속 초당 0.2미터……, 한마디로 끔찍한 수치. 땡볕이 쨍쨍 내리쬐는데도 살갗을 통해 달라붙는 탁한 공기는 중금속이 실린 듯 묵직했다.


후루야는 문득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오기 전, 미유키가 내민 둘 중 하나였다. 하나는 후루야의 코드가 정식으로 인식된 센서 칩.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직 상표를 떼지 않은 청회색의 낙낙한 웃옷. 입어. 짧은 말과 함께 무릎 위에 툭 던져진 옷가지를 받아들고 색깔이 촌스럽다, 그런 불평을 할 겨를은 없었다.


“저기.”

“왜. 또 쓰레기 가지고 이러는 거면,”

“이제 괜찮으세요?”


고철 더미에 몸을 파묻다시피 숙이고 있던 미유키에게서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못 들은 건가 싶었다. 응. 짤막한 대답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미유키는 살피고 있던 기계의 점검을 끝내고 흙먼지투성이인 무릎을 털며 말했다.


“그날은 미안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 후루야의 가슴에 무지근한 무게를 들여놓았다.


“많이 놀랐지?”

“아……, 네. 놀라긴 했는데요.”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


사과를 바란 건 아니었습니다. 걱정된 것뿐이에요. 이렇게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후루야에게는 이 둘의 차이를 설명할 말재주가 없었다.


“혹시 바꾸고 싶은 거면 말해.”

“뭘요?”

“파트너.”


후루야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었다.


“서장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고집을 부려서. 거기 가고 싶다고. 알고 보면 내 잘못이었는데. 역시나 하지 못한 말들이 혀끝에서 먹혔다. 후루야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미유키의 등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는 아까의 대화가 끊임없이 맴돌았다.


파트너잖냐.


도무지 떨어낼 수 없는 쿠라모치의 목소리였다. 물론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반론과 변명과 질문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왜 그날 총을 쏘지 못했는지? 무엇이 공포스러웠던 건지? ARM 모듈이 시작하면서 성적이 확 떨어진 이유가 무엇인지? 얼굴을 보지 못한 일주일간 무엇을 했는지? 왜 저를 찾지 않았는지?


아니. 후루야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물어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경사님. 이렇게 쿠라모치에게 대답했어야 했다. 직접 물어보는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아요, 라고. 


후루야는 지평선을 붉게 물들인 석양을 배경으로 어느새 몇 발자국 더 멀어진 미유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확연히 느껴졌다. 부정하고 싶어도 피부로 스며드는 감각이라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리 스스럼없는 웃음이어도, 옷을 내미는 손끝이 깃털처럼 나긋하더라도, 앞장서 걷는 걸음이 경쾌하고 던지는 농담이 실없고 바람에 묻어 오는 목소리가 조곤조곤하대도 바뀌지 않는 사실.


거부. 이 사람은 나를 싫어한다는 확신.


먼발치에서 요란하게 메탈이 구르는 소리가 메아리를 남기며 울려 퍼졌다.


“……정합 점검은 받아보셨어요?”

“응.”


미유키는 대답과 함께 주머니에서 검출기를 꺼냈다. 삑. 간단명료한 단음. 이것도 아니네. 중얼거린 그가 들고 있던 파이프를 아무렇게나 옆으로 밀고서 바로 다음 부품으로 손을 뻗는다.


“그러면 신경 정밀검사라든가. 수근 조직 테스트도 있고.”

“후루야.”


중간에 말을 끊은 미유키는 쥐고 있던 기계를 내려놓고 고개를 틀었다. 얼핏 보이는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깔려 있었다.


“다 해봤어. 네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전부.”


몇 년간. 빠짐없이. 모두. 한 마디, 한 마디씩 힘주어 말하는 그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기다란 검지 끝이 톡톡 두드리는 이마 언저리 위로 갈색 머리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었다.


“결국 이거거든. 여기가 문제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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