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그런 거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이해다. 희생. 열정. 집착. 이런 일방적인 표현 방식은 관계에 대한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상호 이해를 하지 못한 사람을 향한 노력은 결국에 가서는 모두 물거품이 되게 되어 있다. 그 사람이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떠나면 끝. 혹여 알더라도 한쪽이 불행하다 느끼면 끝. 어찌어찌 지속하더라도 사람은 언젠가 죽게 되어 있으니 결론적으로 끝. 그런 면에서 쿠로오는 그때의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다.




아픔에 관하여



돌연 찾아온 결별은 예상보다 훨씬 큰 후폭풍을 몰고 왔다. 우선 쿠로오는 자신의 전화번호를 바꾸었다. 마음 한 편으로 만에 하나라도 그러지 않는 것이 어떻겠냐는 생각이 계속 들었으나 그것이 더 싫었다. 혹시. 어쩌면. 만약. 쿠로오는 이런 단어들을 저주했다. 쓸데없는 생각을 들게 하고, 하등 현실적이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게 하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기대를 하게 한다. 겨우겨우 결론을 내리고 피를 철철 흘리며 정리한 것들을 다시 원상태로 돌리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휴대폰을 새로 장만한 쿠로오는 미련 없이 자신의 옛날 것을 버렸다. 혹시라도 미쳐버린 마음에 다시 가서 뒤질까 싶어 벽에 던지고 발로 밟아 산산조각을 낸 후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다음부터는 다시 일상의 시작이었다. 그를 알았지만 그런 식으로 만나기 전인 그런 날들. 공교롭게도 그것이 두 번째의 변화였다. 쿠로오는 자신이 히나타를 만나기 전 어떻게 살아왔는지 마치 백지처럼 까먹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직장 동료들과 웃으면서 지냈는지, 일을 마치고 일과를 보내면서 무엇에 기뻐하며 살았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잘 생각해보니 원래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순수한 행복감에 웃음을 지었던 것은 히나타가 그의 삶에 들어오고 나서부터였다는 것을 며칠 지나지 않아서 깨달았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같았지만 달라졌다. 소소한 작은 것, 예를 들어 좋아하던 음식의 맛이라든가, 즐겨보았던 경치라든가 하는 것이 더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배고프면 먹는 것. 지나가면 보는 것. 이 정도의 것으로만 가득 찬 쿠로오의 인생은 그때 문틈으로 보았던 히나타의 눈처럼 빛이 없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가 너무도 좋아했던 눈동자였다.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 할 때면 보석처럼 반짝이고 싫어하는 것을 이야기하면 강아지처럼 풀이 죽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키만큼이나 조그마한 머리통을 붙잡고 놀리면서도 사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것은 귀여워 죽겠다는 것이었다. 유달리 좋다는 말을 꺼내는 것이 어려워 처음 그 말을 한 이후로 하지는 않았지만, 인제 와서는 그것도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뭐가 그렇게 힘든 것이라고 말을 아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많이 말해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표현해줄 것을. 조금 더 밖에 나가고 여기저기 다닐 것을. 지나가는 말이라도 다 귀 기울여주고 가지고 싶다는 것, 먹고 싶다는 것 다 사줬을 것을. 후회는 끝이 없었고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렇게까지 못 해줬나」 라는 생각은 「역시 헤어지길 잘했다」 라는 자기 위로로 넘어갔고 그것은 다시 「괴롭다」라는 단순한 마음속의 소리침으로 바뀌었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면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 친구를 몇 번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오가며 여자를 몇 번 만난 것 같기도 했다. 집에 데려오기는 싫어서 주로 하룻밤 상대로 만나 근처 숙박업소에서 관계를 맺었다. 싸구려 빨간 조명 밑에서 끙끙거리는 몸을 보면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밀어붙이다 보면 결국에는 사정 하는 것에 할 수 없이 관계를 맺었다. 성욕이라는 것은 실로 무섭게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것이다. 그 몇 초간의 절정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언젠가 한 번 히나타에게 말했었던 「뭐로 하든 빼면 그만이다」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동물적인 해소가 모든 것을 충족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얼굴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여자와 뒹굴다가 해가 뜨는 것은 죽어도 싫었다. 밝은 곳에서 마주쳐야 할 얼굴이 역겨울 것 같아서였다. 외향의 문제가 아닌, 그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쿠로오는 언젠가부터 사람의 손길이 끔찍할 정도로 싫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같이 섹스를 할 여자를 찾는 주제에 또 만지는 것은 싫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자주 가던 클럽에서 막말로 개새끼라는 소문이 퍼지고 나서는 여기저기 옮겨 다녀야 했다. 한 번은 그냥 대놓고 길거리에서 여자를 찾은 적도 있었다. 이러다가 병이 옮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가 이러다가 죽는 게 인생이지, 라는 웃기지도 않은 자포자기를 했다. 


쿠로오를 조금 안다는 사람들—예를 들어 소꿉친구라든가, 고등학교 때 동창 몇몇—은 자신이 많이 변했다고 했다. 원래부터 염세적이긴 했지만 나름 상냥했고, 굳이 따지자면 성실한 편에 이렇게 마구 사는 놈은 아니었는데, 라는 말까지 들었다. 살다 살다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까지 자제력이 없지는 않았었는데. 갸우뚱하다가도 과연 무엇을 위한 자제력이었나 고민하면 모든 것이 우스워졌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오르락내리락하던 기분도 점차 나아졌다. 결국, 모든 것의 해결책은 시간이었다.


꽤 시간이 흐른 후 쿠로오는 그때의 일이 모두 아득하게 느껴졌다. 사귈 때도 그렇게 알찬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만나서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문틈으로 보이던 눈동자였고 또 하나는 우습게도 동생과 설거지를 하던 모습이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을 쥐고 했던 고백이나 같이 보냈던 첫날 밤, 이런 좋고 아름다웠던 것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싸우고 자기 집을 떠났을 때의 표정. 커피잔을 앞에 두고 헤어지자 말하던 때의 모습. 그런 것만을 곱씹게 되는 것은 역시 쿠로오 자신이 그다지 바람직한 애인이 못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렇게 매일매일 되뇌었다. 그런 되뇜마저 우스워졌을 때는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 있었다.


그 날로부터 일 년이 지나고, 또다시 일 년이 지나고, 그리고 다시 해가 바뀌어 삼 년이 지났다. 그사이 길을 지나가면서라도 히나타를 마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생을 살며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과는 달리 관계는 너무나도 쉽고 허무하게 정리되었다. 어차피 이렇게 하려고 했던 거, 다행이지 않냐 넘기며 애써 그리움을 집어 삼켰다. 가끔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동그란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욱신거리는 심장도 숨을 삼켜가며 견뎌냈다. 그렇게 산 듯 죽어가는 듯 살아가다가 삼 년째가 되던 한겨울, 쿠로오는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공사판에서 노역을 하던 아버지가 밤길에 운전하던 차량에 치여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죽음에 관하여



조촐한 장례식이었다. 아버지의 직장에서 온 서너 명.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온 두 명. 동네 사람 한 명. 고등학교 때 친구 하나. 그것이 다였다. 친척도 없었고 있다 해도 쿠로오는 모르는 이들이었다. 연락할 생각도 들지 않아 화장터에서 바로 직접장을 치렀다. 밤샘이나 영결식 등 들어보지도 못한 것들을 알아볼 정신도 여력도 없었다. 쿠로오는 일을 해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당장 내일 날라올 지도 모를 전기세 공지 따위를 걱정해야 했다. 참례에 온 이들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한 쿠로오는 건네받은 작은 단지를 손에 들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잿빛 가루가 바로 쿠로오의 마지막 남은 가족이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렇게 살다가 갔다. 살가운 사이는커녕, 이야기를 하는 것도 손으로 꼽힐 정도였다. 없으니만 못하다고 장난처럼 말한 적도 많았지만 정작 이런 상황이 되니 쿠로오에게 닥친 것은 끝없는 공허함이었다. 모두 다 떠나버린 화장터 입구에 자리한 의자에 앉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쿠로오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운 적이 언제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고 나서였을 것이다. 울며 엄마를 찾던 그 날 자신의 손을 꽉 잡아 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렇게 둘만이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한밤중이었다. 미안하다며, 이제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경비에 의해 등을 떠밀리고 그렇게 문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사람은 쿠로오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히나타.


곱슬한 머리. 조그만 키. 하지만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얼굴은 자기가 알던 것보다도 훨씬 더 성숙한, 어엿한 어른의 모습이었다. 까만 양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어색한 것 같았지만 또 그렇지도 않았다. 엄숙한 표정을 하고 자신에게 하얀 조화 한 송이를 건네는 것에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그 꽃을 한 번 보고, 또 자신 앞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또 꽃을 보고. 히나타를 보고.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차오르는 눈물을 느꼈다. 자리에 주저앉음과 동시에 이제 어른이 된 소년이 자신을 안아왔다.


꺽꺽 울었다. 목청을 놓고 소리 내 가슴이 뻥 뚫릴 때까지 울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셔츠 깃을 적셨다. 젖은 옷감에 얼굴을 비빌 때마다 그리웠던 향기가 몸을 파고들어 좋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슬펐다. 파들파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어 손에 잡힌 히나타의 재킷을 그러쥐었다. 정말로 한심한 모양새였지만 말이다.





쿠로오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기 새처럼 자라나던 때가 있었다. 한 손으로는 이제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어머니의 손을, 다른 손에는 커다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었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당시의 쿠로오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당연시 받아들이는 그 모습은 쿠로오가 채 열 살이 되지도 않았을 적에 사라졌다. 죽음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부터 쿠로오는 아버지와 단 둘뿐인 가정이 되었다.


아버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쿠로오에게 남겨졌던 단 하나의 가족이었다. 본디 말이 없고 조용한 양반이었다. 어린 아들 하나만을 남기고 아내가 훌쩍 떠나간 뒤로는 더욱 그랬다. 쿠로오는 아버지와 간단한 인사 외에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또 언제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 고등학교 때까지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집에 들어오던 아버지가 한 달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게 되고 나서, 쿠로오는 그냥 자신이 빨리 성숙해지기로 했다. 


그래도 무리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쿠로오였지만 취업반을 선택한 것에 아무런 불만은 없었다. 처음부터 대학이란 것에 미련도 없었다. 학교에 다니며 좋아하는 부 활동도 원 없이 했고, 친구와 선후배와 웃고 떠들며 제법 즐거운 추억도 만들었다. 상냥하게 다가가 다른 이의 문제를 들어주기도 하고, 하릴없는 장난을 치면서 웃고 떠들기도 했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이렇게 사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학교를 끝내고 더 큰 곳에 나가면 분명 자기에게 준비된 자리가 있을 지도. 하지만 사회에 나간다는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에 젖어 있던 졸업 직전, 쿠로오에게 날아든 소식은 아버지의 사고였다. 한쪽 다리를 절게 되어 직장에서 잘렸다는 것은 덤이었다. 


둘 뿐인 식구의 대소사를 챙기기 시작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액수의 빚이 있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풍족한 가정도 아니었는데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진 어머니와 아버지의 재활 비용이 모두 합쳐졌던 것이었다. 쿠로오는 졸업을 하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했다. 갓 성인이 된 자신에게 떠넘겨 진 세상이 얼마나 모진 것이냐에 대해 불평할 정신은 없었다. 하물며 그 나잇대의 이들이 보통 가지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여유가 있을 리가.


그때 나타난 것이 히나타였다. 쿠로오와 다르게 똑바른 길을 차근차근 밟아 나갈 수 있을 소년. 타고난 밝음이 아름다워 자기도 모르게 주위에 뿌리는 햇살만큼이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랑받는 아이. 그러면서도 자신을 골라 곁에 있어준 아이. 그런 소년의 집은 쿠로오가 예상했던 것 그 이상으로 눈부시고 완벽해서 자신의 존재가 가지고 올 자그마한 균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가슴을 찢는 것 같았던 헤어짐의 순간을 처음에는 단지 히나타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며 견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깨닫게 된 건 결국에 도망친 사람은 쿠로오 자신이었다는 것이었다. 추하고 모자란 자신을 받아주겠다 내민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선 것은, 그저 무서움에 웅크린 채 내지 못 했던 용기. 또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려워 도망친 비겁함.





“어떻게 알고 왔어?”


한참 울다가 겨우 진정이 됐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삼 년 만에 본 옛 연인에게 하는 말치고는 너무 분위기가 없었지만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켄마가…”

“켄마랑 아직 연락해?”

“가끔요.”


히나타가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을 찾아올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집도 알았고 일하는 곳도 어딘지 알았다. 아마 히나타의 사교성으로 짐작해보건대 담당이랑도 열심히 연락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을 터였다. 쿠로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단호한 결심으로 전화기를 바꾼 이유는 사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해서였다. 언젠가는 힘에 부쳐 하찮은 변명을 대며 그 번호를 누를 것을 알았기에 그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쿠로오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퍼뜩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휘영청 뜬 달을 등진 채 선 그의 실루엣이 생각보다 큰 것에 놀랐다.


“그때는 죄송했어요.”


쿠로오는 도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멍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런 자신을 보면서 히나타는 웃었다.


“그 날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 찾지 않았어요. 무서웠습니다. 다시 거절당할까 봐. 그러나 그러면 안 됐어요. 싫다고 계속 우겨도 쿠로오 씨 옆에 있었어야 했습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바닥을 굴렀다. 히나타의 뒤로 작은 먼지 바람이 생겼다가 다시 없어졌다. 차근차근, 바람에 실린 듯 말을 전하는 히나타의 모습이 우습게도 꽤 멋있어서, 쿠로오는 완전히 망가져 버린 자신이 밑도 끝도 없이 부끄러워졌다.


“한동안은 쿠로오 씨가 떠난 거로 생각해서 미웠어요. 하지만 그때 깨달았죠. 쿠로오 씨에게서 한 번도 가족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걸요.”


조막만한 두 손이 내려와 쿠로오의 자잘한 상처투성이인 손을 꼭 잡더니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제가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받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쿠로오 씨를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안 그럴 자신 있어요. 그러니 다시 만나 주세요.”

“히나타. 난—,”

“그냥 들어 주세요.”


단호하게 자신의 말을 자르는 것에 쿠로오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쿠로오 씨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요. 이제 그렇게 어리지 않으니까요. 정말 많이 생각했어요. 그 날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말이에요. 처음에는 단지 그때 일에 화가 난 거라고 생각했지만 곧 아닌 것을 알았죠. 쿠로오 씨가 그렇게 마음이 좁지 않다는 건 제가 잘 아니까요.”

“…”

“제가 걱정됐던 거죠?”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짓고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어느새 열여덟의, 열아홉의, 그리고 스물의 천진난만함을 벗어난 어른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두 팔을 쭉 펴고 아무런 의심 없이 다가오면서도 모든 단점과 추함과 상처를 보듬어 주겠다는 맹세였다.


“만약 그런 거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쿠로오 씨랑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니까요.”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울지 않는 남의 앞에서 우는 것이란 이렇게 꼴사나운 일이었다. 문득 삼 년 전, 자신의 집 문 앞에서 오열하던 히나타가 생각났다. 몸부림을 치며 자신에게 매달렸던 그를 매정하게 쫓아 보낸 것은 둘도 아닌 쿠로오 자신이었다. 나는 그런 너를. 그러나 너는 이런 나를.


“없이 살아봤는데, 역시 안 되겠더라고요. 이제 절대 놓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내가 싫어진 게 아닌 이상, 평생 함께할 겁니다.”




영원함에 관하여



작고, 하얗고, 밝은 것. 쿠로오가 이를 악물고 한 번 버렸던 그것은 자신의 두 발로 걸어 다시 쿠로오에게로 찾아왔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순수한 시선 뒤로 그런 단단한 마음이 있을 줄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세상 모르는 어린애라 생각했지만 결국 마지막에 와서 겁을 낸 것은 다름 아닌 쿠로오 자신이었다. 세상의 눈. 가족을 만들지 못하는 만남. 사랑의 맹세도 절차도 밟지 못하는 알고 보면 별것 없는 종잇조각 한 장도 허락되지 않은 관계. 세상 많은 이들이 자연스럽게 누리는 그것을 사랑하는 이에게 쥐여주지도 못 한다며, 자신의 존재를 한심하고 경멸스러워 한 자신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려 들었다. 그렇지만 히나타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열 살의 쿠로오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더 흘러 삼십 대라는 나이에 접어든 지 제법 된 지금에 와서도 둘은 그 눅눅한 다다미 위에서 잠을 청한다. 힘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싸운 적도 많았고, 울고 울린 적도, 소리 지른 적도 많았다. 그래도 둘은 꼬박꼬박 이곳에 돌아왔다. 이사를 가려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이 하나 남겨준 집을 팔기 아깝다는 히나타의 고집이 있었다. 차가운 정적만이 감돌던 그 집은 이제 더는 좁고, 춥고, 아무도 없지 않았다. 낡은 선반 구석구석, 한쪽에 쌓인 색바랜 상자 안, 먼지 가득한 방의 네 귀퉁이와 천장 끝까지 히나타로 가득했다. 그것은 냄새였고, 손길이었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온도였다. 눈에 보이는 흔적이었다가, 무형의 성질이 되어 히나타가 없는 날에도 조용히 쿠로오를 감싸 안았다. 장례식장 앞에서 오열하는 그때의 그를 안았던 두 팔처럼 말이다. 


지금 쿠로오의 옆에는 히나타가 곤히 잠들어 있다. 이제는 제법 어엿한 남자의 티를 내며 성숙한 말투와 행동을 보이는 이 사람은, 잘 때만은 아직도 그 무방비한 옛 얼굴을 보여준다. 두꺼운 이불에 둘러싸여 색색 숨을 쉬는 모습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그와 바뀐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