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바뀌었음에도 일상은 계속되었다. 히나타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같은 도쿄라고 해도 한 끝에서 다른 끝, 넉넉잡아 두 시간 거리, 그나마도 서너 번 교통편을 바꾸어 타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히나타는 언제나처럼 아침에는 메시지를, 저녁에는 전화를 했다. 대화 내용마저 변함없었다. 그저 가끔가다 입에 담는 친구나 지인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이건 전적으로 쿠로오만의 생각이었는데—이제 같은 도시에 적을 두게 되었으면서도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예전보다 멀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한 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말을 했더니 히나타에게서 「저도 보고 싶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움에 관하여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못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히나타는 격주에 한 번꼴로 미야기에 내려가 주말을 보냈다가 일요일 오후가 되면 도쿄로 돌아와 쿠로오와 남은 반나절을 함께 했다. 둘 다 주머니 사정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경우는 쿠로오의 집에서 만났다. 그 좁고, 춥고, 아무도 없는 집이 무엇이 좋겠냐만은 히나타는 항상 햇살 같은 웃음을 머금고 문지방을 넘어섰다. 종일 손님 하나 없는 집의 오래된 초인종이 지직대며 기계음을 울릴 때마다 쿠로오는 심장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한 번 넘은 선은 적정기준을 긋기 힘들었다. 쿠로오는 집 문이 닫힘과 동시에 항상 히나타와 방에 들어가 눅눅한 바닥에 누웠다. 자신만의 공간에 아무 거리낌 없이 침범해 들어오는 소년은 몸과 마음을 달아오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예뻐요. 쿠로오 씨. 딴에 제법 굵은 목소리로 자기 귀에 중얼거리는 그 말이, 다른 이를 향해서는 절대 나오지 않을 거로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태어나 자란 곳도, 닮은 곳도, 비슷한 취미도 배경도 아닌 그저 고등학교 때 잠깐 얼굴을 본 인연. 쿠로오는 그의 어느 부분에 그렇게 욕정 하는지 자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 그가 자기 앞에서 옷을 벗었을 때 다리 사이에 자리한 것이 자신과 같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했다. 머리로 알면서도 몸으로 다가가는 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도드라진 목젖이라든가 딱딱한 몸 같은 것에는 곧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가끔 정사 중에 자기가 같은 남자와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곱씹을 때가 있었다. 손으로 비비면 똑같이 발기하고 사정한다는 사실에 적응하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역시 넣고 싶어요."


어느 날 관계를 가지고 나서 누워있던 히나타가 던진 말이었다. 쿠로오는 손에 묻은 것을 꼼꼼히 휴지로 닦는 중이었다. 뭐?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놀라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손으로만 하는 것 말고요."

"무슨 소리야. 어떻게 하든 빼면 다 똑같은 거지. 징그럽게 내가 여자도 아니고, 넣고 싶다니."


이 말을 했을 때 히나타가 지은 표정을 쿠로오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단순히 상처받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더 근본적이었다. 기분이 나쁘면서, 화가 나면서, 한편으로는 체념한 것 같은 여러 부정적인 감정만이 소용돌이치는 그 얼굴을 본 쿠로오는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해도 뭐라고 덧붙일 변명거리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건 자신이 한 대답이 가감없이 솔직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작은 방 안에 깔린 무거운 정적.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던 쿠로오는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고, 그것을 본 히나타는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은 일찍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하는 소년은 너무 비장해서 더 있다가 가라고 잡지도, 데려다주겠다 일어서지도 못했다. 쿠로오는 아직도 구겨지고 군데군데 젖은 휴짓조각을 손에 든 채로 히나타의 뒷모습을 좇았다. 쾅 닫히는 대문 소리는 여느 때보다 배로 더 크게 들렸다.





한동안 연락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막연히 예상한 것과는 다르게 히나타는 바로 다음 날 아침 연락을 했다. 매일 그래 왔듯이 하루에 두 번, 꼬박꼬박. 대화는 평상시와 다름없었고 목소리도 언제나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히나타가 지었던 표정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쿠로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둘의 관계를 고려해 보기 시작했다. 


쉽게 여긴 것부터가 문제였다. 간단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어린 남자. 게다가 자신은 원래부터 이성애자. 그리고 추측건대 이것은 히나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게 시작을 한 것부터가 기적이었고 원만하게 끝날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적어도 먼저 이것을 놓아버릴 마음은 없었다. 한 번 가지게 된 것을 툭 던져버리기는 힘든 법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무언가를 가지는 것을 꺼려왔었다. 난데없이 누군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어찌 됐던 간에 해결을 보아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갈 데까지 가보자, 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니었다. 친밀도 높은 애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 한 번 베어먹은 달콤한 과일은 너무나 커다란 충족감을 주었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허겁지겁 빠져든 채였다. 쿠로오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생긴 「꽤 중요한 존재」를 위해 평생 해 본 적 없는 심도 높은 고찰을 했다. 머릿속으로는 이성의 경종이 울리고 마음속으로는 혹여나 놓칠까 불안한, 모순으로 가득찬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한심했음에도 채찍질을 해가며 생각했다.


히나타가 다시 찾아올 이 주일 후. 쿠로오가 정해 놓은 마감 시간이었다. 그러나 토요일 저녁, 학교 일이 바빠져 이번에는 기숙사에 남아야 할 것 같다는 히나타의 연락을 받았다. 생각할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에 안심하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못내 아쉬워하는 속내를 느끼고 고뇌에 빠졌다. 그 후로 쿠로오의 휴대폰은 사흘 동안 잠잠했다. 둘이 연락을 시작하고 두 번째 있는 일이었다. 쿠로오는 밝아지지 않는 차가운 액정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바라보다가 며칠 지나고 나서는 의식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는데,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운 것이라기보다는 부러 신경을 써서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연락은 뜸해졌다. 하지만 쿠로오가 먼저 전화기를 드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는 생각을 했다. 일하고 밥을 먹고 잠에 빠져들기 바로 전을 합한 일상의 전부를 온통 이 관계에 대한 생각으로만 채웠다. 자신이 했던 말을 생각하고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하고 서로가 했던 행동을 생각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소년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쿠로오 씨. 조곤조곤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빨리 보고 싶어요. 


주로 끊기 전에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것을 기억하면 정해진 절차인 마냥 마음속에서부터 사무치듯 서글픔이 밀려 올라와 바닥에 얼굴을 묻고 혹시라도 남았을 소년의 냄새를 찾았다. 물론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낡은 다다미에서는 케케묵은 담배 냄새와 오래된 먼지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그래도 쿠로오는 매일 밤 그와 함께 눕곤 했던 그 자리에 몸을 뉘었다. 모두 그리움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그리고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지 한 달이 되고 얼굴을 본 것은 두 달이 넘어가는 때에, 쿠로오는 비로소 길고 긴 고찰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해가 져도 덥기만 한 한여름에 만난 히나타는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묻자 보통 때라면 헤실거릴 놈이 고개만 푹 숙였다. 안쓰럽다는 생각에 더 묻지도 못하고 자기도 고개를 돌렸다.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하자길래 일순간 집을 떠올렸다가 황급히 떨쳐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곳에만은 가고 싶지 않았다. 근처 적당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놓고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이렇게 바깥에서 히나타를 보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느낌에 곰곰이 기억을 되살펴 보니, 실제로 같이 일을 했을 때 빼고는 처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히나타가 대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뭐가?"

"그냥 다요. 연락도 받아주고. 만나 주고. 같이… 놀아 주고."


하.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나왔다. 그런 짓을 놀아 준 거라고 표현하다니, 아까의 미안함은 금세 사라지고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꼭 그만하자는 것처럼 말하네."

"네. 그만해요."


혼나는 강아지 같은 눈. 쿠로오는 화를 누르고 냉정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말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놈은 자신이 무슨 고민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그 날 미야기까지 달려갔는지 모를 것이다. 그저 자기가 불쌍해서, 라는 연민의 감정으로만 넘겨짚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먼저 그만두자는 말을 하면서도 되려 자기가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 테지.


물론 쿠로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조그만 대가리를 굴려서 나온 생각의 책임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있었다. 한 번도 말로 표현해준 적이 없었다. 같은 남자라고는 해도 나름 애인. 주야장천 집으로만 갔던 것도, 마지막에 그런 말을 한 것도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쉰 쿠로오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난 그러기 싫다."

"왜요? 저는—,"

"그냥 들어."


무언가 항의하려는 꼬맹이의 입을 그대로 다물게 하고 말을 이었다.


"네가 왜 그러는지 대충 알겠어. 그런 생각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그래도 어찌 됐든 아니야. 그만하자 그러지 말고 계속 만나자. 내가 앞으로 잘할 테니까."


쿠로오는 몇 달 동안 곱씹었던 말들을 술술 풀어냈다. 실제로 표현하는 건 머릿속으로 그리며 연습했던 때보다 더 어려워 식은땀이 났다. 그때 자기의 뒤통수에 대고 전화번호를 물었었던 아이의 용기가 어느 정도였던 것일까. 쿠로오는 진즉에 비어버린 커피잔을 손으로 뱅뱅 돌렸다. 이 아이를 상대로 이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하게 되다니, 얼마 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동그랗게 두 눈을 뜬 히나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하긴 몸을 섞으면서도 절대 하지 않았던 말들이니 그럴 만했다. 이렇게까지 신용을 못 줬다니, 애인으로서 실격이었다.


"이래 봬도 나, 너 꽤 좋아해."


만날 때부터 기운 하나 없었던 두 눈에 다시 반짝이는 생기가 돌아왔다. 하지만 곧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것에 쿠로오는 그 빛나는 소년의 눈을 더 즐길 수 없었다. 귓바퀴만 빨갛게 물들이는 것에 울려는 건가, 잠깐 생각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번쩍 다시 든 고개에는 환한 미소만이 있었다. 역시나 씩씩한 놈이었다.





그 날 둘은 쿠로오의 작은 거실에 누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무얼하고 어떻게 지냈냐는 가벼운 것부터 시작하여 서로의 감정이나 관계 같은 심각한 내용까지 다양했다. 가슴 속에만 담아 두었던 것을 소리로 빚어내는 그들만의 의식은 잔잔하고 단란했으며 따사로웠다. 쿠로오는 자신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직도 어색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내친김에 그 날 일—여자 운운한 것—에 진심으로 사과까지 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고 정말 자신은 어떻게 하든 다 좋다는 뜻이었다고 더듬더듬 나온 변명 같은 사과에도 히나타는 쿠로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알아요. 무슨 말인지."

"미안."

"아뇨.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미안했어요. 일방적으로 강요할 만한 일이 아니니까요."


쿠로오는 몸을 돌려 히나타를 끌어안았다. 말재간이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정작 중요할 때 말문이 막히는 쓸모없는 놈이 자신이었다.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간신히 히나타의 귀에 대고 하기 가장 힘들었던 말을 나지막이 속삭였다. 


"원하면 하자."

"네?"

"그동안 생각 많이 했어. 어떻게 하는지도 찾아봤고.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네가 해 보고 싶으면."


더듬거리며 나오는 말이 부끄러워 일부러 안고 고개를 묻은 것인데, 품 안의 소년이 굳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심이에요? 찾아본 거?"

"…뭐가 그렇게 좋아?"


활짝 웃는 얼굴에는 기뻐 죽겠다는 웃음이 한가득 넘쳐흘렀다. 반면 자신은 분명히 목덜미까지 새빨개졌을 거라고 생각하니 크게 손해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설마 그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고, 정말 고맙다고 말하며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에, 이런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히나타가 말했던 「넣는」 섹스는, 쿠로오가 얼굴을 붉혀가며 여기저기 얻은 정보에서 말한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려웠다. 우선 정신없이 치른 딱 그만큼—아니, 사실은 훨씬 더, 아주 많이, 어마어마하게—아팠다. 너만 좋다면, 이라며 호기롭게 말했던 쿠로오는 종반에 가서는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꺽꺽거리기만 했다. 이제까지 자기가 겪어왔던 모든 육체적 고통과 비교해도 거의 최악이었는데, 아마 쌍방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끝을 못 봤을 것이었다.


그 날 밤, 히나타는 처음으로 쿠로오의 집에서 잤다. 같이 몸을 섞은 적은 많았지만 밤을 보내고 아침을 함께한 것은 처음이었다. 돌아가봐야 되는 게 아니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방학이라고 했다. 「괜찮으시다면 일주일도 있을 수 있어요」 라길래 솔직하게 그러라고 답했다. 그놈이 그 말에 어떤 얼굴을 했는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헤어짐에 관하여



딱 한 번 헤어진 적이 있었다. 지지부진하게 감정싸움을 할 필요 없는 관계였기에 워낙에 둘이 다투는 일이 드물었다. 마음에 안 드는 일은 그저 화를 한 번 내고 말 일이었고 며칠 지나면 자연스럽게 풀리고는 했다. 그러나 하찮지 않은 것들은 쌓이게 마련이고, 그것은 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둑이 결국에 무너지듯 언젠가 망가지게 되어 있었다. 알면서도 그것을 내버려 둔 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그저 소위 말하는 사회적 눈으로 볼 때 비정상적인 이 관계가 가지고 오는 어쩔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 


히나타의 집으로 처음 초대를 받았을 당시 쿠로오는 두어 번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절대 그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미야기에 달려갔었던 그 날 딱 한 번, 먼발치에서 그 집을 본 적이 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한밤 자고 가라며 자기의 팔을 잡던 히나타에 끌려갔다가 결국에는 집 앞에서 한사코 거절하고 발을 돌렸다. 그리고 기차역 벤치에 누워 몇 시간 후에 있을 첫차를 기다리면서도 잘 내린 결정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쿠로오가 몇 년간 이삿짐센터에서 일하게 되면서 깨우친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집이라는 건 사는 사람의 성향을 전적으로 반영한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쿠로오에게 있어서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로, 비단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보금자리를 형성해서 살아가는 유기체라면 다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런 면에서 그 집은 히나타를 포함해 아마 그가 속한 가족의 모든 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물질이었다.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길 위에 소담히 올라있는 그 집은 차가운 달빛을 어스름하게 받음에도 봄볕 아지랑이 같은 따스한 분위기를 피워올리고 있었었다. 지붕의 색깔도, 창틀의 말끔함도, 조그만 정원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의 아기자기함도 모두 일관성 있는 포근함으로 대변되었다. 곤히 자던 히나타를 안았을 때 맡았던 그 향기가 가득할 것이라고 들어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곳은 쿠로오에게는 가까이 갈 수도 가서도 안 될 곳이었다. 어린 여동생이 있다고 했다. 이제는 제법 커 초등학교 고학년이라는. 언젠가 신이 나서 자신에게 보여준 사진을 얼핏 보았을 때로는 히나타와 판박이였다. 똑같이 복슬한 머리. 똑같이 밝은 표정. 티끌 하나 없는 두 얼굴이 한 쌍의 여름꽃처럼 꼭 붙어 있는 그 사진을 봤을 때, 쿠로오는 속으로 굳은 다짐을 하고, 또 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가족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로.


그러나 그런 것마저도 히나타는 가뿐히 뛰어넘었다. 화까지 내면서 거절하는 쿠로오에게 애걸복걸 매달리다시피 하여 겨우겨우 허락을 받아내었다. 조건은 두 가지. 이번 딱 한 번만일 것. 절대 들키지 말 것. 신신당부하고 나서야 날짜가 잡혔고 그 날이 가까워지면서 쿠로오는 만성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어서 오세요."


앞치마 차림으로 현관까지 나온 히나타의 어머니는 한눈에 보기에도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가정교육이란 것이 진짜로 있기는 하구나, 라고 쿠로오는 새삼 느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손에 들고 간 선물을 건네자 예의가 바른 청년이라는, 예상치도 못했던 칭찬이 돌아왔다. 히나타는 밥을 먹는 내내 싱글벙글 웃어서 어린 여동생에게서 바보 같아 보인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쿠로오는 마음속으로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어댔다. 그렇게 티를 내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더니 하여튼 믿는 게 아니었다. 


사실 헤벌쭉 대는 저 놈만 아니었으면 나쁘지 않았다. 저녁은 맛있었고 히나타의 어머니는 아주 친절한 사람이었으며 동생은 귀엽고 붙임성 있는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어있는 게 보였던 건지 반찬이 식성에 맞지 않냐는 걱정스러운 말을 들었다.


"아주 맛있습니다."

"그런가요? 고마워요."


커다란 미소는 영락없이 히나타의 것과 같았다.


"쇼요랑 많이 닮았죠?"


자기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았나 보다. 쿠로오는 고개를 숙였다. 히나타보다도 더 작은 키의 여인은 쿠로오의 앞에 조용히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히나타는 자기가 설거지를 하겠다며 부엌으로 뛰어들어간 여동생을 말리러 가고 없었다. 떠들썩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쿠로오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다.


"오늘 와주어서 고마워요."

"아니오. 초대해 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쇼요에게 이야기는 많이 듣고 있어요. 여러모로 우리 아이를 잘 봐 주신다고."

"별로 하는 건 없습니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올 것이 왔다는 기분이었다. 집에 초대받았을 때 언젠가 한 번쯤은 나누게 될 대화라 생각했다. 보통 그렇지 않은가. 누구인지. 무얼 하는지. 어떤 관계인지. 도대체 저 꼬맹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다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온갖 말을 주저리주저리 했을 텐데, 자신에 관해 저녁 내내 한 번도 추궁을 당하지 않았던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히나타가 뭐라고 언질을 준 것인지 아니면 원체 눈치가 빠른 사람인지 몰라 신경만 곤두서 있었다. 첫 번째는 아마도 저놈의 지금 상태를 생각해봤을 때 아닐 테고, 두 번째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쿠로오 씨."

"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로 그냥 저녁을 해주고 싶어서 부른 것이었어요."


자애로운 눈빛의 여인에게서 확실히 어른의 관록이 느껴졌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빳빳하게 굳은 자신을 단번에 알아보는 것부터가 그랬다. 게다가 어딘가 뼈가 있는 듯한 저 말. 쿠로오는 잘게 떨리는 다리를 멈추기 힘들었다.


"내 자식이긴 하지만 워낙에 친구를 잘 사귀는 아이라 따로 걱정하지 않으려 해도, 엄마의 마음이란 것이 그렇지 않아요. 집에 올 때마다 그렇게 목을 빼고 다시 갈 날을 기다리길래 새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하는구나 싶어 내심 안심했었어요. 게다가 요즘 들어 부쩍 쿠로오 씨의 이야기도 늘었고요. 처음에는 대학 친구인 줄 알았죠. 그런데 물어보니까 그건 아니라더군요."


쿠로오는 목 언저리에 꺼림칙하게 자리잡힌 무언가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저번에 한 번, 밤에 왔었죠? 우리 집 앞에."


잡고 있던 젓가락을 하마터면 떨어뜨릴 뻔했다. 얼굴로 확 뻗었던 열기가 온몸을 타고 내려가며 등줄기를 차갑게 식혔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아무런 편견 없어요. 이렇게 말하면 이상한 엄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쇼요가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상관없어요. 그리고 그 사람도 좋은 사람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요. 쓸데없는 극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꼭 만나 보고 싶었어요."

"..."

"쿠로오 씨는 좋은 사람 같아서 다행이에요."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어요. 진심으로 우리 쇼요를 잘 부탁해요."


부엌에서는 히나타가 조그만 사다리에 올라간 여동생과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쿠로오는 그 한 쌍의 종달새 같은 둘을 보고, 자신의 앞에 있는 그들을 똑 닮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부들거리던 몸이 진정 되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때보다도 더 차갑게 머리가 식었다. 모두 확실해졌다. 둘의 관계에 대한 결론. 이렇게 명확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히나타를 만나고 나서 항상 가슴 한쪽에 머물던 망설임마저 싹 사라졌다. 


"아닙니다. 진짜로 죄송했습니다."


탁. 젓가락을 반듯이 내려놓은 쿠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깊게 허리를 굽혔다. 


"저희는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부인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일, 절대 없게 하겠습니다."





대단한 여인이었다. 자식을 가진 부모란 다 그런 것일까. 조곤조곤. 사분사분. 그러나 마주 앉아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강단 있게 이야기를 하던 모습은 진정으로 모든 것을 납득하고 이해한 성인이자 원하는 바를 꼭 이루겠다는 투쟁자의 것이었다. 그 조그만 몸으로 아들과 자신의 전부를 다 품어주겠다는 그녀의 각오는 실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나 쿠로오는 그 한구석에 서려 있던 작은 공포를 읽었다. 물론 그것이 자신과 히나타가 가지게 된 관계를 향한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당당하게 편견이 없다고 말했던 것을 보건대 아마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저, 앞으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필히 겪게 될 난관을 걱정하는 지극히도 합당한 어머니의 마음이리라. 제 핏줄을 낳아 키운 부모로서 마땅히 행사할 수 있는 권리. 단지 그것이 싫어 그 집을 뛰쳐나온 것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자존심이 상한 것도, 기분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고마웠다. 아마도 그 여인은 저녁 내내 자기 앞에서 밥을 먹고 있었던 자기만큼이나 떨었을 것이다. 그 말을 언제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바르게 전달 될까, 무슨 말로 격려를 해주어야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면서.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까지 꼭 전하고 싶었던 마음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상냥한 것이라 이렇게 거부당할 줄 예상 못 했을 것이다.


쿠로오는 사실 무엇이 문제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좋아하는 이와 그 가족에게서 인정을 받으며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을 깨닫고 나서 당연하다는 듯이 포기했던 소소한 행복.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들이면 안 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자신이었다. 히나타의 냄새로 가득했던 포근한 집. 이상적이고 그림 같은 행복한 가족들. 그에 반해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은 변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그 변변하지 않은 것조차도 없었다. 처음부터 잘 될 것이 하나도 없는 관계였다. 쉽게 생각했던 것은, 이렇게 빠져버릴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쿠로오 씨. 쿠로오 씨. 필사적으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애절해 순간 모든 결심을 되돌릴 뻔했다. 저 문을 당장 열고, 잡아당겨 안고, 그렇게 나와서 미안하다고 앞으로 절대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그런 뻔한 말을 할 뻔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었다. 단호하게 내렸던 결정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쿠로오는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가 뱉었다. 문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며 이를 악물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뇨, 어제 그렇게 나가 버렸으니…."


자신이 막차를 탔었으니, 아마 새벽 첫차를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여기까지 필사적으로 뛰어온 듯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무심코 들어오려던 히나타는, 쿠로오가 가로막은 채로 가만히 서 있자 당황하여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울상이 된 얼굴은 바로 어제 자신의 따스한 공간에서 보여주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봇물 터지듯 소년의 입에서 절박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우리 엄마가 한 말, 미안해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다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히나타."

"사실 엄마는 알고 있었어요. 나도 엄마가 아는 거 알고 있었고요. 그것 때문에 화난 거죠? 모르는 척 거짓말하고 불러서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그런 거 아니야."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들어가게 해 줘요. 나, 쿠로오 씨 집에 들어가고 싶어요."

"안 돼."

"왜요?!"


소리를 지르는 히나타의 뺨을 타고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그런 그의 면전에 대고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도 본 적 없는 눈물이었다. 문득 자기 안에서도 밀려 올라오는 울먹거림에 쿠로오는 어금니를 세게 맞물었다. 여기서 울고 싶지 않았다. 그 생살을 찢는 고통을 견디며 했던 첫 섹스에서도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았던 것이었다.


"넌 네 집으로 돌아가."

"쿠로오 씨랑 있고 싶어요."

"떼쓰지 말고."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계속 만나자고. 잘해주겠다고."

"미안하다."

"사과하지 마요! 그냥 우리가 같이 있으면 되는 간단한 문제잖아요!"


자신의 허리에 매달리다시피 한 아이를 떼려고 하지도 않았다. 쿠로오는 팔짱을 끼고 문에 비스듬히 기댄 채,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 히나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작은 입에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 것과는 다르게 머릿속만은 맑았다. 


"우린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냥 여기까지인 거라고 생각해."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소년이 온 힘을 다해 꽉 둘러 잡고 있던 팔은 너무나도 쉽게 풀렸다. 쿠로오는 허망하게 서 있는 히나타의 어깨를 짚고 집 바깥으로 밀어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세상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다갈색 눈동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