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신입이 붙을 거야."


쿠로오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자신에게 말하는 담당을 향해 인상을 썼다. 때는 바야흐로 오전 바람도 제법 쌀쌀해진 늦가을이었다. 이제 계속 추워질 텐데 연말이 다가와 일마저도 바빠지겠다며 툴툴거리던 그의 파트너를 본 게 당장 저번 주였는데.


“시노자키 씨는요.”

“장기휴가. 고향에 내려간대.”


하아. 쿠로오는 책상 한편에 놓인 이번 주 분의 파일을 집어들고 눈대중으로 훑어보았다. 하나, 둘, 셋…, 대략 여섯이었다. 일이 쌓여 있는데 신입이 웬 말이냐, 라는 담당의 말을 듣고 떠오른 평면적인 짜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딘가 불공평하다, 같은 구체적인 불만이 되었다.


“왜 하필 나예요.”

“그럼 너 외에 누가 있어.”


그건 또 그렇지만. 담당과 자기를 포함한 몇몇을 빼면 풀로 뛰는 사람도 없는 데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나마 오래 일한 경력자들도 이번 달 들어 싹 빠져나갔다. 그래도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를 착실하게 가르치는 건 어찌어찌 하겠다만 새파란 신입은 딱 질색이었다. 이때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며칠 안 가서 못해 먹겠다며 책상을 내리칠 게 분명한데도 담당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한테 맡기고는 했다. 자신이 스트레스받는 것을 보며 은근히 즐거워하는, 좋지 못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놈은 어딨어요?”

“놈이 뭐야, 둘이 나이도 비슷한데. 열 시쯤 오라 그랬어. 이제 곧 오겠네.”


빠졌네, 빠졌어. 쿠로오는 커피를 단숨에 비운 후 손안에 든 빈 컵을 신경질적으로 와그작 구겼다. 처참히 찌그러져 이제 형체를 알 수 없는 내용물을 휴지통에 던지는데,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쿠로오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여기저기 멋대로 뻗친 주황색 머리. 동그랗고 뽀얀 얼굴에 커다란 눈. 아무리 보아도 자기 어깨까지 밖에 오지 않는 키.


“카라스노 꼬맹이?"

“어? 어, 네코마 주장!”




만남에 관하여 



여기는 쿠로오 테츠로, 여기는 히나타 쇼요. 짧은 소개를 듣고 담당과 오늘 분으로 해결할 건에 관해 몇 마디 토론을 나누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자 자기 어깨를 툭 치더니 어쨌든 잘 부탁한다며 먼저 나가버린다. 제기랄. 쿠로오는 불만에 가득찬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으며 아까부터 자기 옆에 서서 잔뜩 경계하고 있는 아이에게로 몸을 돌렸다. 햄스터처럼 덜덜 떠는 꼴이 자기가 뭐 밉보인 것 있나 싶었다. 인상이 더러운 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꼬맹이.”

“아, 네! 쿠…로오 씨.”

“너 이 일 해본 적 있어?”

“없습니다!”


됐으니까 소리 지르는 건 좀. 쿠로오는 한 손으로 귓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나는데 이제는 두통까지 오려고 했다. 신입이라고 온 놈이 생초짜, 그것도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체구가 작은 건 둘째 치더라도 어디를 봐도 딱 부러진 것 하나 없어 보여 더 걱정이었다. 이런 놈을 데리고 다니다가는 십중팔구 자기가 다 수습을 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었다.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한껏 얼어 있다가 다가와 자신의 얼굴을 기웃거리기까지 하는 것이, 이제는 두통을 넘어 복통까지 오고 있었다. 쿠로오는 하루가 아주 길어질 거라 예상하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오늘 안에 끝내야 하는 이사는 두 건. 보통이면 두 명으로 충분하겠지만, 이 시답지 않아 보이는 놈을 데리고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몰라 쿠로오는 오후에 있던 예약을 다른 팀에게 넘겼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 가지런히 두 손을 무릎에 올린 채 조수석에 앉은 꼬마는 연신 자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기,”

“왜.”

“저… 유의사항 같은 건 없어요?”


쿠로오는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질문에 순간 화를 내려다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잘 생각해 보면 그다지 문제가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아무리 신입이라도 저 이제 뭐해야 돼요, 이런 말에는 충분히 화를 낼 법해도 유의사항을 물어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원래라면 트럭에 타기 전 몇 마디 언구를 주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도 않았다. 밀린 잔업 때문에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는 것 같이 느껴져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다른 건 없어. 도착하면 그때그때 말해줄 거야.”


최대한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말했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았다. 뭐. 퉁명스럽게 묻자 꼬마가 헤헤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쿠로오 씨, 상냥하시네요."

“…헛소리.”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잘못하는 게 있으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씩씩한 목소리로 머리까지 숙이며 예의를 차리는 것에 흠흠 헛기침을 했다.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나오는 애를 계속 미워하기란 힘들지 않은가.





오후 늦게까지 끌 줄 알았던 이사는 뜻밖에 반나절 만에 다 해결되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생각보다 짐이 없었다는 것. 둘째는 주인이 벌써 짐을 반 정도는 싸 놓았다는 것. 그리고 셋째는—놀랍게도—미더워 마지않다 못해 허약해 보이기까지 했던 이 꼬맹이가 생각보다 일을 잘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체격이 크다고 모두 이 일을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선입견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비실비실한 팔뚝에 힘도 약해 보이고, 무엇보다 이 일은 처음이라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 것에 비해 이걸 들으라 하면 번쩍 들고 저걸 날라라 하면 단숨에 갖다 놓는 것이 상당히 쓸모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쿠로오가 이때까지 맡았던 신입 중 가장 편한 경우였다. 깔끔하게 마지막 상자를 다 옮기고 시계를 보니 아직 오후 한 시도 채 되지 않았다. 점심은 고사하고 해지기 전에 빵 한 조각 뜯어먹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제대로 된 식사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기분이 좋아 흥얼거리며 트럭에 올라탔다. 이제 어디로 가느냐는 히나타의 질문에 오후에는 일이 없다고 했더니, 작은 머리를 갸웃해 온다.


“일찍 끝난 거야. 예상보다 일을 잘해서.”


별다른 생각 없이 솔직하게 한 말에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올랐다. 뭐가 그렇게 좋냐고 물으니 칭찬을 받을 줄은 몰랐단다. 칭찬? 이게 칭찬이었나? 쿠로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를 하나 빼 물었다.


“아, 여기요.”


라이터를 찾아 주머니를 더듬거리고 있는 쿠로오의 눈앞으로 두 손이 올라와 불을 지펴주었다. 하. 쓸데없는 데서까지 빠릿빠릿한 이런 건 또 새로웠다.


“아, 쿠로오 씨 웃는 거 오늘 처음 봅니다.”


자기도 모르게 웃었나 보다. 쿠로오는 괜스레 멋쩍어 눈을 돌렸다. 또랑또랑 눈을 빛내며 자신의 옆자리에 타고 있는 아이가 어색해 사무실로 돌아가는 내내 앞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알아감에 관하여



“어쩌다 이 일 하게 된 거야?”


일 이외에 다른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그로부터 두 주가 지나고서였다. 처음부터 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실수가 없지는 않았던 히나타는, 얼마 가지 않아 능숙한 팀원이 되어 있었다. 특별히 지시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하는 것을 보니 처음 받았던 인상과는 다르게 어지간한 센스가 있는 아이였다. 눈치도 있고, 손도 야무졌으며, 태도도 바른데 성실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었다. 집도 멀다는 놈이 항상 제일 먼저 출근해 사무실 바닥을 쓸고 모두가 마실 커피를 뽑아 놓아 담당을 비롯해 이삿짐센터 모든 이들에게 금세 귀여움을 받았다. 이 아이의 붙임성이 어느 정도였냐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대하기 편한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마저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커피요. 아침마다 책상 위에 놓이는 따뜻한 종이컵을 받아드는 것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


“별건 없고요. 방학이니까 아르바이트.”


많이 봐주어도 부족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말솜씨로 이야기하는 것을 간추려보니, 고등학교 마지막 방학에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보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될 거로 생각해서 시작한 것이란다. 특별히 해 본 아르바이트는 따로 없었지만, 집에 남자가 귀해 친척들이 이사할 때마다 여기저기 불려 다녔어서 짐을 나르는 것이 자신 있었고, 이래 봬도 몸 쓰는 것 하나는 나쁘지 않게 하는 통에 별 고민 없이 시도해 보았다고. 어쩌다 보니 도쿄에 있는 대학교에 오게 되었는데, 방학 겸 이곳에 있는 친척 집에 머물면서 적응을 하는 것이 목표이며,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독립해서 살고 싶다 열을 올린다. 이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라디오만 듣던 히나타가 쉴 새 없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신기해 응응 추임새를 넣어주자, 더 신이 나 물어보지도 않은 갖가지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집 이야기, 동생 이야기, 공부 이야기, 그러고 나니 자연스럽게 배구 이야기가 나왔다. 


“쿠로오 씨, 그때 진짜 멋있었어요.”


블로킹을, 이렇게. 쭉 팔을 힘차게 뻗으며 자기를 따라 하는 폼이 그럴싸했다. 그러고 보니 이 놈, 꽤 배구 바보였었다. 아직도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제까지 본 것 중 최고로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대학에서도 할 거예요. 대학팀으로는 못 뛰겠지만, 그래도 나 같은 키 작은 사람도 뛸 수 있는 아마추어 리그가 많대요.”


적어도 쿠로오의 기억에 이 꼬맹이가 있을 적의 카라스노는 전국을 두 번이나 갔었다. 그런데도 추천 입학은 고사하고 학교 대표팀에도 못 들어가는 것은 역시 저 키 때문이겠지. 우울할 법도 한데, 해사하게 웃는 얼굴은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역시 대학에 가면 잘하는 사람들이 많겠죠. 주먹을 꼭 쥐고는 시끄럽게 떠든다.


“그러고 보니 쿠로오 씨는 어디서 배구하세요?”

“나? 나는 안 해.”


왜요! 갑자기 지른 괴성에 깜짝 놀라 운전대를 놓칠 뻔했다. 


“왜긴. 어차피 고등학교 때까지만 할 생각이었고.”

“그래도 쿠로오 씨, 그렇게 잘했는데,”

“이제는 일하느라 바쁘고. 나는 대학을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아….”


정신없이 떠들던 히나타가 갑자기 눈에 띄게 풀이 죽었다. 자신이 배구를 하지 않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진 쿠로오는 씩 웃으며 물었다.


“왜 네가 실망을 해?”

“그냥요. 쿠로오 씨랑 같이 배구 해보고 싶었거든요.”

“나랑? 왜?”

“진짜 대단했으니까요.”


물론 고등학교 때는 상대 팀이었지만, 이제는 졸업할 것이니 같은 팀에서 뛰어 볼 수도 있고. 횡설수설하는 것이 귀여워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갑자기 돌발적으로 나온 행동에 본인마저 놀랐지만, 역시 이렇게까지 칭찬 해주는데 뭐라도 해줘야 하지 싶었다.


“히나타.”

“네.”

“나는 아마 더는 배구를 하지 못할 거야.”

“…왜요?”


포슬포슬한 머리는 생각보다 작아서 평균보다 큰 쿠로오의 손바닥 안에 쏘옥 들어왔다. 따뜻한 온기가 올라오는 정수리를 가만히 문지르자 참새 같은 두 눈이 자기를 올려다보았다. 한때 모든 열성을 바쳐서 했지만 지금은 기억 한구석에만 자리 잡은 것. 그것을 향한 열정이 그 눈 속에 온전하게 담겨 있었다. 쿠로오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 세상에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도 있으니까.”




깨달음에 관하여



나이 먹을 대로 먹었다는 어른들이 학생의 신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젖살도 다 빠지지 않은 꼬마를 기어이 술집으로 끌고 간 것은, 히나타가 일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한겨울 즈음이었다. 뒤늦은 환영파티를 해야겠다며 사무실의 사람들과 함께 가진 회식 자리에 히나타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쿠로오는 상을 뒤엎을 뻔했다. 물론 자신도 고등학교 때부터 심심찮게 마시기도 했고, 따지자면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태생부터가 순진무구해 보이는 체육계 학생을 이런 곳에 데리고 온 사무실 사람들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도록 눈만 굴리고 있는 히나타는 기가 차게도 오렌지 주스 한 컵을 앞에 놓고 있었다. 쿠로오는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자기를 보고 반갑게 웃으며 옆자리를 탁탁 치는 꼬맹이의 모습에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부어라 마셔라, 몇 시간이 흐르고 테이블의 반 이상이 술에 곯아떨어지고 나서야 쿠로오는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얻어 마신 술 몇 잔에 얼굴이 빨개진 히나타를 끌고. 그다지 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추운 밤에 자전거에 태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금 고민하다가 택시를 불러줄까, 하고 물어보니.


“그냥 쿠로오 씨 집에서 자면 안 돼요?”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를 해댄다. 쿠로오는 이런 식으로 뻔뻔하게 자기 집에 오려는 이가 있었는지 생각해보았다. 어쩌다가 인연이 닿았던 몇몇 여자들마저도 한 번도 데려간 적이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그냥 돌아서려는 찰나 꼬마의 품에서 뭔가가 나왔다.


“그게 뭐야?”

“술이요.”

“뭐?”

“담당님이 한 병 줬어요. 쿠로오 씨 좋아하는 거라고. 가져가서 둘이 마시래요.”


허허. 그 썩을 양반이 드디어 돌았구나. 쿠로오는 히나타가 두 손으로 꼭 잡고 있는 병을 홱 낚아채었다. 이런 것 가게 앞에서 들고 있지 마. 짐짓 어른인 양 핀잔을 주고 저벅저벅 갈 길을 가려는데, 히나타가 당연하다는 듯이 쭐래쭐래 뒤따라온다.


“왜 따라와?”

“나도 마시고 싶어요.”

“아직 학생이 웬 술, 아니, 그것보다. …우리 집에 가려고?”

“가면 안 돼요?”


가고 싶어요, 중얼거리며 한 손으로 자신의 코트 자락을, 다른 손으로 앞에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붙잡고 선 놈을 보니 어떻게 거절할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입만 벙긋 거리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온 말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별 지랄 맞은….”


결국 잡은 손을 뿌리치지 못한 쿠로오는, 그렇게 자신의 가슴께까지 밖에 오지 않는 소년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혼자 살아요?”

“아버지랑.”

“어, 저 이렇게 늦게 가도 돼요?”


이제 와서 무슨.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며 째려보니 쥐새끼처럼 움찔, 몸을 움츠린다. 


“집에 잘 안 들어오셔.”


끼익 열린 문 안으로 익숙한 어둠이 퍼져 있었다. 좁고, 춥고, 아무도 없는 집. 쿠로오는 서둘러 보일러 버튼을 올렸다.


“금방 따뜻해질 거야.”


좁다란 거실 바닥을 대충 치워 적당히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작은 탁자를 폈다. 가지고 온 술도 꺼내고, 찬장을 열자 보이는 과자 같은 것들도 적당히 풀어 놓았다. 조금 어색할까 싶어 TV도 틀었다. 실례합니다. 정중한 인사말과 함께 쭈뼛거리며 들어온 히나타는 쿠로오가 바지런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쿠로오 씨, 살림 잘하시네요.”

“시끄러워.”


마개를 열어 내용물을 따르려 하자 히나타가 굳이 자기가 하겠다며 병을 가져갔다. 이상한 곳에서 섬세한 아이였다. 한 잔. 두 잔. 아무 말 없이 시작했던 술자리는 방 안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더없는 편안함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따로 즐거운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닌데도 이렇게 편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적당히 TV를 보면서 히나타가 가끔 한두 마디를 던지면 짧게 응, 그러네, 대답하는 것이 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나른해지고 마음도 풀어져 쿠로오는 종반에 가서는 거실에 모로 누운 채 반쯤 졸기 시작했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두운 방 안에서 TV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소년의 옆얼굴이었다.





“쿠로오 씨.”


퍼뜩 놀라 고개를 드니 동그란 갈색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 잠이 들었다는 것에 놀라 화들짝 몸을 일으키며 시계를 찾았다. 별로 오래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손님을 들여놓고 잠을 잤다는 것에 미안해 사과하려는 참이었다. 포실대는 무언가가 자기 위로 푹 쓰러져내렸던 것은. 


“히나타?”

“죄송합니다.”


저, 조금 많이 마신 것 같아요, 라고 자신의 가슴팍을 통해 울리는 웅얼거림에 정신이 확 들었다. 눈앞에 빈 술병이 보였다. 아무래도 쿠로오가 자는 동안 혼자서 다 마신 것 같았다. 어스름히 비춰 들어오는 달빛 아래에서 보니 말간 피부에 열이 올라 불긋해져 있었다. 쿠로오는 한숨을 쉬며 호기심 왕성한 고등학생과 맛 좋은 술 한 병을 놔두고 나 몰라라 자 버린 자신을 탓하기로 했다. 흐느적거리는 몸을 조심스럽게 거실 바닥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니 금세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쿠로오는 손을 들어 살짝 뜨거운 볼을 쓸어보았다. 투박한 자신의 손끝으로 비단처럼 보드라운 살결이 와 닿았다. 


무엇에 그리 끌렸는지 모르겠다. 자기와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았지만 어린아이였다. 필시 선입견이긴 하겠지만 겪어왔던 삶이라든지 경험했던 것들이 자기와는 무게부터 달랐다. 언제나 눈꼬리를 살포시 접고 입을 활짝 벌려 웃는 소년에게서 인생의 절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해 그렇게 해맑은 얼굴을 보여주는 이는 이제까지 별로 많지 않았다. 꾸밈없는 순수로 다가오는 누군가도 처음이었다. 같이 배구를 하고 싶었다며 눈을 빛내던 것도 잊을 수가 없었다.


"으으…."


갑자기 덮어준 얇은 이불자락을 그러쥔 히나타가 미간을 찡그린다. 추운가? 아니면 불편해서? 쿠로오는 히나타를 바라보며 거실 바닥에 누웠다. 눈앞에 온전히 들어온 얼굴은 소년이라 하기에는 성숙하고 어른이라 하기에는 어려 보였다. 문득 안아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 행동의 타당성을 가늠하기도 전에 팔을 이불 안으로 넣어 조그만 몸을 끌어안았다. 술기운에 조금 몽롱한 정신으로도 이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같이 일하는 동료를, 그것도 남자를, 이런 식으로 집 안에 들인다는 것부터가 충분히 비정상이었다. 하물며 이런 식으로 만지고 안는다니. 쿠로오는 머릿속에 의문만을 가득 품은 채 뜨거운 몸을 더욱 가깝게 끌어당겼다. 웬만한 여자들만큼 작은 소년의 몸은 나름 딱딱해서, 쿠로오는 새삼 한 팔 안에 쏘옥 들어오는 이 아이가 자기와 같은 남자라는 것을 실감했다.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설명할 수도 정의를 내리고 싶지도 않았지만, 확실히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의 알 수 없는 이 행동이 단순한 동료나 학창 시절의 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 술에 달아 뜨거운 몸이 조금 불편한 듯 꿈지럭거리더니 포개진 몸 사이로 설명할 수 없는 향기가 났다. 어딘가 포근하고, 어딘가 정겹고, 그러면서도 또 어딘가 이질적인 소년의 냄새. 쿠로오는 몸 속 가득 그 향을 느끼며 잠을 청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분명히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앞의 소년을 끌어안는 것 외에 아무런 다른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유함에 관하여



한 번 인정하고 나니 더욱 신경이 쓰였다. 여기저기 허술하게 흘리고 다니는 타입은 아닌지라 자신이 생각해도 퍽 능숙하게 티 안내고 지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계속 눈길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땀을 닦으며 이마를 훔치는 소매 사이로 보이는 팔뚝이라든가. 티셔츠를 흔들면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뜻밖에 탄탄한 허리춤이라든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무도 모르게 곁눈으로 훔쳐보는 것으로. 마치 어린아이가 성인잡지를 들춰보듯 간단히 즐기고 말면 끝이었다. 갈망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마음은 그저 그뿐인 것으로, 무언가를 해야겠다든가, 꼭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든가, 마음을 보답 받아야 하겠다든가 하는 그런 어리숙함은 아니다. 쿠로오는 「가지고 싶은」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을 철저하게 구별할 줄 아는 남자였다. 가질 수 없으면 그저 원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애초에 관계에 커다란 의미를 두지 않았다. 감정에 휩싸여 일상이 바뀌는 것은 한때의 치기이며 편한 삶을 누리는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부리는 여유. 그리고 쿠로오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시간이 흘러 초겨울의 서릿바람이 늦겨울의 포근함이 되고 또 초봄의 신선함이 되었다. 이제는 자못 베테랑급으로 일을 처리하게 된 히나타의 방학이 끝날 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쿠로오에게 허락이 되었던 기간. 그동안 쿠로오는 히나타와 저녁을 두 번 같이 먹었고, 술을 한 번 더 마셨으며, 셀 수 없는 점심을 같이 했다. 체구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먹성이 좋은 이 아이는 쿠로오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자주, 그리고 많이 먹었다. 그런 모습마저 눈을 뗄 수 없다는 생각을 무심코 했을 때 쿠로오는 그 자리에서 혀를 콱 깨물고 죽고 싶었다. 아주 단단히 콩깍지가 씐 것이리라. 


그러나 함께 보내는 시간이 짧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둘에게 그 밤 같은 시간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우선 파릇파릇한 애를 집에 데려가 술을 마시는 취미는 없었을뿐더러, 다시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만에 하나 벌어질 일이 무서워서였다. 자신의 자제력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자고로 술이란 사람을 비이성적으로 만들기 마련이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함과 동시에 쿠로오는 마음속으로 확실한 선을 그었다. 아무것도 바라지도 가지지도 않기로. 그리고 그것은 걱정했던 것보다도 훨씬 쉬웠다. 워낙에 밝은 히나타는 언제나 아무런 제약 없이 다가왔고 쿠로오는 똑같은 자리에 머문 채 그 대가 없는 친절함을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간단했다. 변한 것은 없었다.





하나 달라진 것 없던 나날들이 바뀌게 된 계기는 소년의 등장만큼이나 느닷없었다. 개학과 동시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게 된 히나타가, 마지막 일을 끝마치고 트럭에 타려는 자신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면서였다. 쿠로오 씨.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별생각 없이 물었다. 왜.


"연락해도 돼요?"


앞도 뒤도 다 자른 그 말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쿠로오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래. 몇 초 후 얼떨떨한 대답을 하자 주춤거리기만 하던 히나타가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한 그것이 그 겨울에 얼굴을 보고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 이후로 히나타는 하루에 두 번 연락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등굣길에 한 번, 그리고 자기 전에 한 번. 쿠로오는 오늘 하루 잘 보내라는 메시지를 받고 일을 시작했으며, 저녁 늦게 히나타의 짧은 전화를 받고 잠자리에 들었다. 오가는 대화가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날그날 무엇을 했는지 간단히 이야기를 듣고 전화는 끊겼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아주 귀찮아할 일이었다. 플라스틱 쪼가리에 대고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을 정신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도 쿠로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전화를 버릇처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조금은 바뀐 일상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세월의 무게를 더해 지나가던 어느 날, 쿠로오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히나타를 찾아갔다. 매일 두 번씩 울리던 휴대폰이 장장 나흘째 울리지 않던 참이었다. 결국에 오후가 되어서야 온 전화에서 시험과 연습 때문에 바빠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죄송해요. 그래도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요. 거침없는 소년의 말에, 정신을 차려보니 헐레벌떡 문을 열고 나가는 자신이 있었다. 


그 날 밤 쿠로오는 오랜만에 달렸다. 봄이라도 아직 쌀쌀한 밤의 공기를 폐 속 가득히 들이마시며 뛰고 또 뛰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이었다. 가는 길에 몇 번이고 넘어질 뻔했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다. 숨이 턱에까지 차오르며 헉헉거릴 때마다 뜨거운 응어리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뛰었는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정신없이 달리고 나서 센다이로 향하는 신칸센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려서는 털털 거리는 버스에. 미야기 촌구석—히나타의 말에 의하면—에 있다는 그의 집으로 향하는 그 안에서 쿠로오는 떨리는 심장을 멈출 수 없어 앞 좌석에 얼굴을 묻었다. 





"안녕하세요."


버스에서 내리자 눈에 들어온 것은 한쪽에 자전거를 고이 세워 놓고 벤치에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쿠로오는 가로등 불빛이 소년의 이마를 비추고 포실한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넘실거리는 것을 보았다. 자기보다 한참 작은 줄만 알았던 아이는, 여전히 작았지만 그럼에도 꼿꼿이 등을 펴고 조금도 떨림 없는 눈으로 자기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슴 속 가장 깊은 곳에 애써 숨겨놓았던 감정이 툭 터지는 것을 느꼈다. 달려가서 조그마한 몸을 안았다.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말없이 꽈악 안고만 있었다. 소년에게서는 그 날 밤과 같은 냄새가 났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그 향기를 탐했다. 콩콩 뛰는 맥박을 입술로 느끼며 한참 동안 머뭇거리던 쿠로오는, 이제까지 자신이 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말이 무엇인지 겨우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저도요."


낮게 깔린 목소리만큼이나 자신의 등을 안아오는 소년의 두 팔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으로 쿠로오는 자신이 원하지도 않았던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