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의 휴가를 맞아 여행을 떠난 미유키와 후루야. 도중 차가 고장 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우가 쏟아진다.
샘플
“어때?”
“역시요.”
“그게 뭔데?”
“예상한 대로요.”
“그래?”
“네.”
“다행이네.”
“아니요.”
“응?”
“망했어요.”
뭐? 되묻는 미유키를 향해 고개를 돌리다 뒤통수를 부딪쳤다. 쾅, 어마어마한 충돌음이 지평선까지 황량한 벌판에 메아리를 지며 울려 퍼졌다. 후루야는 얼얼한 뒤통수를 잡고 휘청했다. 캄캄해졌다가 아득하게 새는 시야 어딘가로 놀란 미유키의 얼굴이 얼핏 보이는 듯했다.
Take Me Home, Misty
“아깐 고칠 수 있다면서?”
후루야는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는 미유키의 손을 뿌리치고 열린 차의 보닛 밑으로 고개를 수그렸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달구어진 등이 더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얼굴선을 타고 흘러 흙먼지 범벅인 기체 위에 똑 떨어졌다.
“내가 언제 그랬어요? 뭐가 문젠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다고 했죠.”
“고치는 법도 안다는 뜻인 줄 알았지.”
아무런 대꾸 없이 하던 일을 묵묵히 계속했다. 구동 벨트를 당겼다가 놓고, 고무의 표면을 차근차근 훑어보면서 딱히 대답을 하지 않은 이유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콧등에 축축하게 배어 나오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훑자 짙은 기름 냄새가 난다. 후루야는 다소 성급한 동작으로 청바지에 손을 눌러 닦았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몸짓 하나하나에 원망이 서리는 걸 어쩔 수 없다.
“많이 고장 났어?”
“네.”
“얼마나 많이?”
“제대로요. 완전히. 전부 다.”
그럼 그 뜻이다. 왔던 길로 250km. 가장 가까운 다음 마을은 적어도 200km. 그 사이를 채운 건 천연 상태로 보존된 미합중국이 자랑하는 국립공원.
한 마디로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서의 조난.
이번에는 부딪히지 않게 조심조심 보닛 밑에서 나왔다.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저 한숨만 나온다. 말이 좋아서 국립공원이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안 그래도 한가하기로 소문난 인터스테이트70, 쭉 뻗은 2차선 하이웨이 중에서도 가장 외진 구간이었다. 길 양옆으로 깎아지른 듯 늘어섰던 협곡도, 그나마 햇볕을 가려주었던 울창한 숲도 어느새 없고 사방으로 훤한 평야에는 낮은 덤불과 풀들뿐이었다. 뾰족뾰족한 산쑥과 선인장의 굴곡 사이로 간간이 우뚝 솟은 미루나무를 망연자실하게 둘러보던 후루야는 출발했던 방향인 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마 대륙 서부였으니 비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테고, 다행히 화창한 하늘에는 구름 하나 없이 맑을……
이런.
후루야는 눈 부신 햇살을 피해 손을 들어 이마에 대었다. 실눈을 게슴츠레 뜨고 보아도 저 멀리 지평선에 걸린 건 부인할 수 없는 비구름이다. 그것도 제법 두텁고 흉흉한 회색에, 밑으로 뿌연 물보라가 일고 있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의.
“왜?”
“비 올 거 같아요.”
“응? 어디?”
후다닥 후루야의 옆에 선 미유키가 부러 후루야와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선 오, 작게 감탄사를 뱉는다. 그러더니 “그러게. 한바탕 쏟겠다,” 지나가는 옆 동네 불구경이라도 하듯 하릴없고 심심한 감상평이나 내고 있다. 후루야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마저도 심기에 거슬리는 걸 보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적잖이 짜증이 나 있는 상태인 듯했다.
“얼굴이 왜 그래. 비가 그렇게 싫어?”
“분명 일기예보에는 그런 소리 없었단 말이에요.”
“야, 야. 그걸 믿어? 일기예보는 원래 재미로 보는 거야. 오늘의 운세 같은 거라고.”
후루야의 삶에는 드물지만 단편적인 순간들이 있다. 짤각거리며 뇌 한구석의 스위치가 눌리고 이성이 암전되는 때. 하마터면 그게 지금이 될 뻔했다. 다행히 참았지만. 후우우, 길게 한숨을 내쉰 후루야는 돌아서서 길 한복판에 처참하게 까발려진 차체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촉박했다. 한가하게 농담이나 따먹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점프스타트 해볼까?”
“아까 했잖아요. 완전히 나갔다니까요.”
“모르잖아. 또 하면 될지.”
어느새 옆에 쭐레쭐레 다가온 미유키가 눈치를 보면서 묻거나 말았거나, 후루야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닛에 걸어놓은 수건으로 손가락 사이 선명하게 묻어나오는 검은 기름때를 꼼꼼히 닦아낸 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먹통. 전파는 잡히지 않고 심지어 배터리마저 거의 없다. 분명 아침에 꽉 채우고 나오지 않았었나? 한 시간 전쯤이었을까, 분명 이메일이 도착하는 소리가 났었던 듯도 한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핸드폰을 머리 위로 들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보았다. 아직 희망이 전혀 없진 않다는 소리였다. 그때 쯤 이메일이 왔다는 건 고속도로 한중간에서도 전파가 잡혔었다는 뜻이니까. 필사적인 심정이 되어 실낱같은 기대를 놓지 않고 주위를 서성거리는데, 돌연 코앞으로 미유키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후루야.”
“내 말 듣기는 한 거예요?”
후루야는 핸드폰을 내리며 그제야 미유키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점프스타트가 무슨 소용이에요? 방금 해봤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백 미터 가지도 못해서 또 멈췄죠? 그런데 다시 해서 뭐하게요. 밑 빠진 독에 물 쏟아 넣으면서 목욕까지 해보겠다고?”
따박따박 늘어놓자 미유키의 입이 일자로 꾹 다물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슬슬 치미는 화를 누르기가 더 힘들어진다. 뻔했다. 그냥 되는 대로 해본 말이겠지.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데 뾰족한 방법은 없으니 앞뒤 안 보고 부딪혀 보겠다는. 요새 들어 둘은 부쩍 이런 패턴이었다. 미유키는 매사에 느긋한 태도를 취하고 그때마다 후루야는 어김없이 조바심을 내고. 분명 어렸을 때는 정반대였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이건 그냥 주행 불능이에요. 시동 걸리기는 하는 걸 보면 배터리 문제라기보다는 알터네이터일 거고. 벨트는 괜찮아 보이니 베어링이 고장 났거나, 그냥 파트가 오래됐거나…… 이거 마지막으로 점검 언제 받았어요? 몇 킬로미터 뛴 차에요?”
“…….”
“지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죠?”
동그랗게 뜨인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가로젓는 모습이 허무해 화를 낼 의욕도 싹 사라졌다.
“그럴 줄 알았어요.”
중얼거린 후루야는 손가락 마디를 굽혀 탁탁 두드리던 차체에서 손을 떼고 아까부터 계속 굽혀 뻐근한 어깨를 주물렀다.
“심각한 문제야?”
드디어 사태의 중대성을 알아차린 건지 목소리가 제법 차분해졌다. 후루야는 고조되었던 기분을 의식적으로 가라앉혔다.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지만 애인이며 나름 고등학교 선배기까지 한 사람에게 욕심껏 성을 냈다는 게 어느 정도 미안해진 탓이다.
“아니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고.”
“그게 무슨 뜻인데?”
“당장 폐차장으로 끌고 가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손쓰기에는 물 건너갔다는 뜻이요.”
후루야는 지평선에 꾸역꾸역 모여든 비구름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번개가 치는 걸 얼핏 본 것도 같았다. 늦여름의 짧은 몇 주는 이 근방의 유명한 우기였다. 이 여행을 처음 구상할 때 콜로라도 출신인 팀의 동료가 해준 이야기였는데, 당시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었다. 평소 미국 출신이 아닌 후루야를 가지고 온갖 과장을 섞어 가며 놀려 먹곤 하던 사람이 손사래를 치며 딱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하는데 아무렴. 정오를 지나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대부분 달이 뜨기 전에 맑게 개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했었다. 가끔 자연 재해급의 돌발 홍수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아주 드문 일이고, 설령 그렇다 해도 핸드폰도 안 터지는 도로 한가운데만 아니면 괜찮으니 그런 날은 잠시 휴식이다, 생각하고 모텔 방에서 느긋하게 쉬면서 텔레비전이나 보는 거라고.
어차피 오래 못 본 애인하고 가는 거잖아? 하릴없이 지역 방송 볼 틈이나 있겠어?
저질스러운 장난이 꽤나 의미심장한 발언이라도 되는 마냥 저를 툭 치는 동료를 향해서는 그저 인상을 한 번 쓰고 넘어갔었다. 결국에는 이 극히 적은 확률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현실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다행히 짙은 회색의 구름 덩어리는 지금 둘이 주저앉은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제법 멀리 있는 듯했으나, 이런 황망한 평지에서 정확한 거리를 가늠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아직 피부로 느껴지는 바람이 세지 않으니 이곳까지 오는 데 시간이 다소 소요되겠지만 이 동네에 익숙하지 않은 후루야로선 이것마저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아마도 한 시간? 희망 좀 보태서 두 시간? 아무튼 그전에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결정을 내린 후루야는 점검 차 빼놓았던 배터리의 케이블을 다시 연결했다. 그리고 보닛을 한 손으로 받치고 지지대를 접었다. 쾅, 소리와 함께 닫힌 걸 확인한 후 고개를 들자 대견하다는 듯 웃고 있는 미유키의 얼굴이 보였다. 저런 표정 예전엔 많이 봤었는데. 마치 걸음마를 막 떼기 시작한 아이의 뒤에서 보폭을 맞추어 걷는 부모 같은.